‘이러다 심장마비 오는 거 아냐? 그럼 신문기사에 날 텐데, 로또 1등 당첨 복권을 손에 쥔 채 심장마비로 간 여자라고. 진정하자, 진정. 심호흡하고. 후유. 후, 후, 후, 후유.’
아이들 임신 때 해본 호흡법을 떠올리며 숨을 고르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달이나 먼저 태변 섞인 양수가 터져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 가 둘째를 낳던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고작 돈 몇억에 이런 꼴이라니. 갑자기 한심한 생각이 잠깐 스쳤으나, 벌벌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휴대폰 검색화면에 1등 당첨금액이 37억-그 이하 숫자는 보이지도 않는다-인 것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 스스로 한심한 속물임을 시원하게 인정하고 만다.
들고 있는 복권 번호와 당첨 회차를 휴대폰과 비교해 보고, 또 보고, 안경을 벗어서 닦은 후 또 본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 아니, 생각해보려 한다.
남편한테 연락해야 하나? 그러면 또 사업하겠다고 일을 벌이려나? 하긴, 37억인데 한 10억쯤 사업자금으로 떼가라지 뭐. 어차피 공돈인데. 갑자기 엄청난 큰손인 양 통이 커진다. 아이들 셋 다 유학이라도 간다고 할지 모르니 그건 따로 충분히 남겨놔야지. 100세도 모자라 120세까지 살지 모른다는데 노후 자금도 넉넉히 떼어놔야 하고. 아이들 각자 방 쓸 수 있고 서재도 딸린 넓은 집부터? 건물을 사야 하나, 연금을 통 크게? 이걸 남편 모르게 가능할까? 안되겠다. 일단 남편한테 연락 먼저. 아니지, 돈을 찾아서 비자금이라도 떼어 놓고 연락할까? 세금은 얼마나 떼려나? 어디로 찾으러 가야 하지?
조금 진정된 손가락을 재촉해 검색해 보니 로또 1등은 농협 본점에 가야 한다는데, 지하철을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정신 나간 얼굴을 하고 지하철을 타면 누군가 가방에서 복권만 빼 갈 것 같다. 택시를 타자니 기사아저씨가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면 어쩌나, 별의별 걱정이 다 된다. 결국, 한창 바쁠 남편에게 응급실에 가야 한다며 당장 오라고 전화를 건다.
회사에서 집까지 차로 5분 거리인데 남편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5분이 500년 같다. 남편이 온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시댁에 생각이 미친다. 어머님은 더 좋은 병원 찾아봐 모셔야지. 친정엄마도 낡은 주택에서 벗어나게 해드려야지. 이래서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단 거야. 일확천금을 손에 쥐어봐야 애면글면 키워준 부모보다 제 자식, 저 살 궁리만 하고 있으니.
사업이 힘들 때마다 어려운 살림에도 큰소리 안 내고 통장을 채워준 시누이들도 이제야 생각난다. 이자 듬뿍 쳐서 갚아드리고 근사한 옷도 해드리자. 옷? 로또 1등에 당첨되어 놓고 고작 옷? 그건 아닌가? 남편하고 상의해봐야겠다. 증여세가 나가겠지만 그쯤이야. 만날 툴툴대지만 하나뿐인 동생 녀석도 챙겨야겠고.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힘들 때마다 밥 사 줘가며 도닥여준 친구, 선후배도. 생각해보니 갚을 빚이 사업 빚만은 아니다. 난 어쩌다 이렇게 남의 신세만 잔뜩 지고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
쿵쾅쿵쾅, 마음 급한 남편의 발소리다. 툭하면 비실비실, 약봉지를 달고 사는 마누라가 급기야 쓰러졌나 싶어 바쁘게 들어온다. 다짜고짜 내민 복권을 보고 왜 하필 응급실 핑계냐며 인상을 쓰던 남편이 ‘벌렁벌렁, 쿵덕쿵덕’부터 내가 했던 과정을 되풀이한다. 아! 남편은 나처럼 이기적인 인간은 아니니 부모형제, 친우들 생각을 먼저 하려나?
37억짜리 김칫국을 들이키게 된 건 소아과 아래층 빵집아저씨 때문이었다. 소아과에 환자가 많을 때면 기다리기 지루해하는 아이를 데리고 잠깐 내려와서 빵을 사 먹였다. 한 개를 사도 늘 웃는 얼굴로 편하게 테이블에서 먹이고 가라며 챙겨주는 사장님이 꼭 사촌오빠나 형부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빵집은 문을 닫고 가게는 비어 있었다. 장사가 제법 잘 되는 거 같았는데, 주인이 월세를 올려 달랬나? 지나가며 슬쩍 궁금했다.
동네 터줏대감인 친정엄마가 소식을 알려준 건 몇 달 후였다.
“그 빵집 사장님, 로또 돼서 돈 쓰느라 장사도 안 한다더라.”
옆에서 얘길 듣던 남편이 세금이랍시고 차 떼고 포 떼고 한 10억 받아봐야 하던 일도 접고 쓰기 시작하면 금방 탕진할 거라고, 그렇게 돈 쓰는 습관이 들면 오히려 패가망신할 수 있다며 일확천금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를 하고 나섰다.
그럴까? 나는 어떨까 싶은 생각이 길어졌다. 얼마나 받았으려나 궁금한 마음에 검색해보니 이번 주 1등 당첨금은 37억이었다. ‘억’ 소리 나는 숫자를 들여다보며 김칫국을 시원스레 들이마셨다. 뭐,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어떠리. 37억이니 배가 부르다 못해 터져도 아쉬울 것 없건만 어쩐지 뱃속이 헛헛했다.
로또라는 복권이 나오고 호기심에 한두 번, 몇 년 전 남편 사업이 힘들었을 때 한두 번, 그 외에는 사본 적이 없으니 당첨될 리 없다.
사람이 평생 가질 수 있는 행운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그걸 로또로 받고 싶지 않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러니 혹시 당첨되어 다른 곳에 써야 할 행운을 그렇게 쓰게 될까 아깝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데, 김칫국이 습관인지 걱정도 팔자다. 어차피 손에 닿지 않는 포도는 시게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