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연말은 지금 생각해도 색다르고 가슴 뛰는 날들이었다.
1992년이니까 고2 때였나보다. 상업고등학교라 취업 고민을 시작하던 우리에게 그 해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로 각인된 해이기도 했다.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라떼’는 연말이면 각 방송사에서 연말 가요제를 하며‘10대 가수상’이라는 것을 주었다. 그해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가수들을 뽑고 그중 한 명에게 ‘대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92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너무 큰 반향을 일으키는 바람에 다른 가수들이 모두 맥을 못 추는 상태였다. 지금이야 TV를 틀면 채널이 너무 많아 뭘 봐야 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달랑 지상파 다섯 개 채널에서 음악방송도 한정된 것뿐이었으니 ‘서태지와 아이들’의 독주는 지금의 ‘방탄소년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니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열 명을 뽑아 10대 가수상을 주고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신인상을 주기가 난감했나 보다. 갑자기 ‘최고인기가요상’이라는 것을 만들어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을 호명했다. 그 뒤로 ‘10대 가수상’은 흐지부지 없어졌다.
그들이 영향을 미친 것은 10대 가수상만이 아니었다. 트로트가 대세이던 한국 가요계에 한국어 랩을 대중화시키고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으로 새로운 유행을 원하는 10~20대를 만족시켰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규제, 남자 연예인은 염색할 수 없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이른바 꼰대들의 검열에 반항을 시작했다. 음반업계의 관행이나 기득권에 대해 저항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모든 음악을 작사, 작곡, 편곡하며 활동했던 서태지는 음악적으로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그의 대단함은 다른 부분이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 / 우리 몸을 반을 가른 채/ 현실 없이 살아갈 건가/ 치유할 수 없는 아픔에/ 절규하는 우릴 지켜줘/
서태지와 아이들이 94년도에 발표한 <발해를 꿈꾸며>의 일부이다. 그냥 마구잡이로 춤이나 추는 댄서가수로 생각했던 어른들의 시선과 다르게 ‘통일’이라는 우리나라 시대의 아픔을 담은 노래다. 이 노래뿐 아니라 <교실 이데아>에서는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다며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컴백홈>에서는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 COME BACK HOME’이라며 젊은이들을 다독이기도 했다. 이런 노래에 빠져 살았던 내 젊은 날이 새삼 뿌듯하다.
그 서태지가 50대 아저씨가 되었다니….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 나는 걸 보니 나도 중년인가 싶다. 그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반을 가른 채’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교육 현실은 여전히 갑갑하고 젊은이들에게 괜찮은 미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해주지 못한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개개인이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정치인들은 그동안 뭘 했나, 새삼 한심스럽다. 하기야 말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대선에 나오고 지지율이 40%가 넘는다는 기사를 보니 지금의 현실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정치계에도 ‘서태지’ 같은 파격적인 인물이 나와 온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혁신을 이루길 바라는 건 너무 꿈같은 얘기일까. 서태지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째려보는 사람이 많더라도 뉴스를 볼 때마다 속 시원한 기사를 빵빵 터트려줬으면 좋겠다.
코로나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더 갑갑한 연말, 100개가 넘는 채널을 아무리 돌려봐도 <발해를 꿈꾸며> 같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뉴스를 틀어봐도 속 시원한 기사 역시 없었다. 또 이렇게 맹숭맹숭 해가 가나 보다.(2020년 연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