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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Jan 03. 2024

뒷담화

 의리가 없어, 의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작가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등산할 때도 서로 손잡아주고 뒷사람 기다려주며 그렇게 함께 가는 거 아냐?

 아, 미안. 내가 너무 흥분해서 앞뒤 없이 본론을 말했네. 박 작가라고 내가 얘기한 적 있지? 벚꽃 같은 글 쓰는 언니. 분홍분홍, 살랑살랑, 간질간질을 빼면 그 언니 글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었잖아. 오죽하면 유튜브에 “로맨티시스트 박 작가”라고 써뒀겠어. 나? 나는 리얼리스트. 로맨티시스트 박의 글 느낌이 분홍 살랑 간질이라는 거지, 재미없다는 건 아냐. 우리 수필동아리 임헌영 교수가 합평 때마다 얘기하거든. “우리가 박 작가 글 잘 쓰는 거는 익히 다 알고 있잖아요?” 하고. 문제는 그다음이야. 칭찬으로 시작해놓고 “다만,” 이러면서 지적을 하는 거야. “잘 쓰는 실력으로 좀 더 폭넓은 소재와 주제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만날 쓰는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걸 써봐라.” 그런 말씀이지. 이 얘기는 사실 아무한테나 하진 않아. 글솜씨가 있고 더 잘 쓸 능력이 될만한 사람 한정이야.

 그런데 그게 쉽냐고. 인문학 지식이 짧으니 소위 말하는 ‘있어 보이는’ 글도 못 쓰고, 아줌마들 생활반경이야 뻔한데, 뭐 얼마나 새로운 소재를 찾겠어. 보통은 가던 길이 편하고 신던 신발이 편하지. 낯선 길에선 어리바리 헤매기 일쑤고 거기다 새 신발까지 신으면 발도 절룩거릴 거 아냐. 나 엄청난 길치잖아. 내비게이션 없이는 한 걸음도 못 움직이고 시장이나 미용실은 늘 가던 곳만 가고. 뭐든 안 해봤던 걸 시도하는 건 너무 어려워.

 이 얘기가 박 작가 의리 없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기다려봐. 진짜 얘기는 지금 시작이야. 이 언니가 글쎄, 천날만날 고만고만한 글만 쓰느니 이제 수필을 그만 써야겠다는 둥, 비슷한 내용을 또 쓰자니 재미가 없다는 둥, 엄살이란 엄살을 다 떨었거든. 한동안 글 못 쓰겠다며 손 놓고 있기도 했고. 같이 푸념하고 글 쓰라고 서로 잔소리하느라 휴대전화 요금이 만만치 않게 나갔다지? 아, 전화는 내가 받는 쪽이었던가? 아무튼, 그러더니 갑자기 혼자서 한 계단을 훌쩍 올라간 거야. 우리 스승님까지 인정했다니까. “박 작가가 기존에 쓰던 글과 다른 글을 썼다고, 그것도 아주 잘 썼다.”라고. 사실 이 얘기는 내가 했고, 임 교수가 맞는 말이라고 동의했어.

 여고 때 시험 끝나면 만날 우는 애들 있잖아. 시험 망쳤다고.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동동거리면서 달래 주고 그랬지. 그래놓고 성적표가 나오면 예상외로 상위권이고. 딱 그 느낌인 거야. 

 휴, 나도 알아. 시험성적이나 글솜씨가 등산하듯 손잡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또,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 그는 그만의 기준과 목표가 있다는 것도 안다고. 아는데…. 그래,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샘나고 아니꼬워서 그래. 사촌이 땅을 사니 배가 아팠던 거지. 사람 심보가 그렇더라. 나도 따라 성큼 올라가면 되는데, 다리가 아파 못 가니, 체력이 안 되니, 시간이 없다느니, 핑계만 대놓고 먼저 올라간 사람 뒤통수에 대고 투덜거리는 것만 잘하는 거야.

 로맨티시스트 박이 노력한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고전을 열심히 사들이더니 읽기도 부지런히 읽더라고. 최민자 수필가의 글이 너무나 멋지다며 읽은 책에 밑줄을 그어서 카톡방에 보여주기도 하고, 너도 읽어 보라며 나한테도 한 권 보내줬는데, 난 아직 다 못 읽었어. 박 작가는 당연히 다 읽었지. 괴테가 “진정 열의가 있다면, 나중에 하겠다고 말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이 순간에 할 일을 시작하라.”라고 했는데, 이 언니가 그렇게 했나 봐. 그 밑천을 바탕으로 한 걸음 나아간 거야. 물론 본인은 썩 만족하지 않는 거 같아. 아직 분홍, 살랑, 간질이 살짝 남아 있긴 하거든. 어쩌면 그건 박 작가의 유전자에 새겨진 고유한 특성일지도 몰라. 완전히 빠지면 2% 부족해 보일 수도 있어. 그리고 한 계단 정도로 만족할 거 같았으면 아직 그 하나도 못 올라갔을걸? 그걸로 되겠어? 성큼성큼 계속 올라가야지. 곧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위기감을 느끼는 바람에 반성도 해 보고 그러는 거야. 반성 두 번 했다간 박 작가 멱살 잡겠다고? 설마, 내가 옹졸한 구석은 있어도 한참 언니한테 싹수없게 그러진 않지.

 실은 치즈라면이라도 먹으면 로맨티시스트 박의 말마따나 “녹슨 기계에 기름칠이 되듯 꼬불꼬불 구겨졌던 머릿속에서 명문장이 주르륵 나올”까 싶어서 점심시간에 사무실 길 건너 한 블록을 걸어가서 라면 전문점에서 치즈 라면까지 사 먹었단다. 국물까지 다 마시고 박 작가에 빙의라도 된 양 젓가락을 공손히 내려놓고 사무실로 돌아왔지. 결과는? 명문장이 주르륵 나오긴커녕 평소보다 과식하는 바람에 오후 내내 꾸벅꾸벅 고개만 아팠어. 늘 그렇게 병든 닭처럼 조는 거 아니냐고? 고등학생일 때나 졸았지, 지금은 안 그래. 사무실에서 그렇게 졸기는 처음이라니까. 리얼리스트가 로맨티시스트 따라가려다 목디스크 올 뻔했지.

 아무튼, 뒷담화 한번 후련하게 잘했네. 이걸 보고 후배 작가들이 내 뒷담화 하면 어떡하냐고? 뭐 어때? 나한테 대놓고 하는 것도 아닌데. 후배들이 나처럼 후련해지면 그걸로 된 거지. 사실 박 작가랑은 글을 다 보여주는 사이라 이건 뒷담화가 아니라 앞담화에 가깝긴 해. 게다가 로맨티시스트 박은 나처럼 밴댕이 소갈딱지가 아녀서, 내가 글 잘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되면 이렇게 배 아파하지 않고, “나 쟤랑 되게 친하다.” 이러면서 자랑하고 좋아해 줄 거야.

 이럴 시간에 박은실 작가처럼 고전이라도 한 줄 읽어야 나도 따라 훌쩍 올라갈 텐데, 난 그게 잘 안 된다. 이런 푸념도 사람 사는 이야기고 그런 소소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문학이지 문학이 별건가? 자위하는 수밖에. 

 음, 그래도 이번 달엔 언니 따라서 주문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완독에 도전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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