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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Jul 11. 2021

엄마는 사십사 살

동인 수수밭길 3호 <맑은 날, 슈룹> 수록

“엄마는 몇 살이야?”

일곱 살 막내아들의 질문이었다. 두 딸과 마찬가지로 녀석도 대여섯 살이 되자 식구들의 나이를 궁금해했고 해가 바뀔 때마다 다시 물었다. 제법 숫자를 잘 세긴 했지만 마흔넷은 모를 것 같아 “엄마는 사십사.”라고 대답했다.

“헐, 그럼 엄마는 사십사 살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개구진 표정을 만드는 아이를 보며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사십사 살인데도 학교에 다녀?”

작가의 꿈을 놓지 못해 입학한 디지털 대학에서의 수필 동아리 합평 모임에 갈 때마다 학교에 간다고 했더니 이어진 질문이었다.

“엄마는 사십사 살이니까 엄마의 선생님은 오십오 살이야?”

아니라는 내 대답에 육십육 살, 칠십칠 살, 팔십팔 살…. 대답과 관계없는 숫자 놀이가 이어졌다.


https://youtu.be/bG_UKzF_IhA


그 뒤로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사십사 살’이라는 대답과 함께 막내의 이야길 덧붙였다. 나이를 말할 땐 44세, 혹은 마흔네 살이라고 알려 줘야겠지만 나는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둬도 자연스레 알게 될 날이 곧 다가올 테다. 그거 하나 늦게 알게 된다고 아이의 인생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게 내 어설픈 교육관이다. 앞니 빠진 발음으로 내놓는 귀여운 말이 뿜어 대는 행복을 누리는 건 지금뿐, 이 시기를 지나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온라인 수업만 하는 대학이지만, 공부하랴 일하랴 세 아이의 육아는 어설픈 엄마에게 늘 벅찬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따로 눈맞춤해 주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한꺼번에 엄마를 불러 대며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소릴 높이면 고만고만한 세 가지 목소리는 한 귀로 들어갔다 한 귀로 나왔다. 혼은 쏙 빠져 달아나고 껍질만 남아 있는 느낌이라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누나들에게 밀려 가장 불리해지기 십상인 막내는 내 얼굴을 조막만 한 두 손바닥으로 감싸 눈맞춤을 하며 말했다.

“여보세요. 예쁜 아가씨,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정수리에 젖내도 빠지지 않은 녀석이 저런 동네 건달 같은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십사 살이나 먹은 내가 어디 가서 ‘예쁜 아가씨’ 소리를 들어 보겠는가. 막내의 넉살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돌잔치 상에 장난삼아 놓은 뽀로로 마이크를 잡고 종알거리던 아들은 커 가면서도 에너지를 모두 말로 소비하려는 건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궁둥이를 두드리며 “우리 똥강아지.”라고 하면 “나는 용띠니까 똥강아지가 아니라 똥용이야.” 하는 녀석이었다.


그런 아들이, 연일 폭염으로 신기록을 세우던 여름에 자다 일어나 기침을 하며 구토를 했다. 열대야 때문에 세게 튼 에어컨, 선풍기가 과했나 싶었다. 아침 일찍 소아청소년과에 가니 감기에 장염이 겹쳤단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바로 먹이자 기침하다 또 토해 버렸다. 집에 가서 다시 먹자고 달래 나오는데 “엄마, 나 입원해야 하는 거 아냐?” 하며 한껏 엄살을 떨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심하게 아픈 건 아니었다.

집에 와 따뜻한 미음을 조금 먹인 후에야 약을 토하지 않았고 울렁거리고 아픈 배도 차츰 가라앉는다 했다. 그날은 드라마 스터디 모임이 있는 토요일이어서 큰딸에게 아들을 맡기고 나갈 참이었다. 아픈 녀석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약해져 공부하러 가야 한다는 말꼬리가 힘없이 늘어지는데, “엄마, 잘 다녀와. 큰누나랑 있을게.” 하는 똥용이. 예전 어른들 말처럼 크려고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때로 앓기도 하며 또 한 뼘 자라는 건데 어린애 취급하면 안 되지 싶어 약해지는 마음을 추슬러 짊어지고 내 일을 하러 나섰다.


사실 나는 여러모로 부족한 엄마다.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에게 맡기고 자율성을 중요시하며 키우는 것은 내 나름의 교육관을 실천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일이 쫓아다니며 거들어 주기에는 체력이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모든 시간을 쏟기보다 내가 좋아하고 행복한 일에도 시간을 적절히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아이들에게 쏟는 시간에도 충분히 행복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온 정성을 아이들에게 쏟는 다른 엄마들에 비하면 부족하기 그지없을 텐데, 이런 엄마에게 똥용이는 넘치는 사랑과 웃음을 준다. 물론, 녀석의 두 누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엄마로 성장시켜 주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운 일곱 살 노릇을 하느라 양쪽 귀를 잡아 늘여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싫은데?”를 남발하는 막내가, 사십사 살 엄마의 가을을 어떤 색깔 말풍선으로 물들여 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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