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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콤S Nov 26. 2019

매운맛 S쌤의 달콤한 보건실

어르신이 나타났다

1교시가 시작도 안했는데, 최고 어려운 어르신이 납셨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허리를 쭉 펴고 앉았다.    

“선생니임, 너무 힘들어요...”

채민이는 세상 기운 없는 모습으로 들어섰다. 숱 없는 머리에 덕지덕지 꽂은 똑딱핀마저 버거워 보였다.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서는, 물에 빠진 휴지마냥 책상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주절주절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배도 아프구, 머리도 아프구, 기운도 없구, 왜 그럴까요?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빛이 애처롭다. 뭐라고 딱히 대답을 못해주니 보건쌤이 그런 것도 모르면 어쩌냐고 툴툴댄다. 그러게, 대체 왜 그럴까. 내가 다 궁금하네요, 어르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구, 물리치료도 소용이 없구... 에구구, 진짜 못 살겠어요.”

수업종이 울리자 채민이가 익숙하게 찜질팩을 데웠다. 3, 2, 1, 땡. 뜨거워진 팩을 껴안고 교실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나타난 어르신은 점심 무렵 다시 돌아올 것이다.  

3교시 쉬는 시간, 채민이가 똑같은 말을 한다. 찜질팩을 대도 소용이 없구, 엎드려도 불편하구, 곧 급식도 먹어야 하는데 배도 계속 아프단다. 어찌해줄 도리가 없어 그저 바라볼 뿐이다. 6교시 후에도 온다. 찜질팩 반납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너무 힘들었어요. 병원을 다시 가볼까요? 약을 다시 지어볼까요? 약도 너무 많아서 먹기도 싫어요. 약도 너무 크구, 목구멍도 아프구, 잘 넘어가지도 않구...” 

채민이는 몸이 아픈 것보다도 제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누군가가 더 필요한 듯하다. 나는 그저 다독이고 또 다독여준다. 그래도 그것으로 약이 되고 힘이 되는 모양이다. 

“선생님, 오늘은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요양실에서 쉬었다 가면 안돼요?”

자리를 펴고 드러누운 아이의 이불을 살피고 얼른 나왔다. 금세 다른 아이들이 밀고 들어온다. 무릎이 까진 아이, 손톱이 부러진 아이, 눈에 다래끼가 나려는 아이까지... 소란스럽고 북적이는 보건실에서도 채민이는 단잠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볼게요.”

수업이 끝나자 돌아가는 아이를 배웅하고 요양실을 정리하러 갔다. 그런데 요양실은 치울 것 하나 없이 깔끔했다. 채민이가 4채나 되는 이불을 전부 개킨 것이다. 베개까지 탁탁 두들겨 단정히 제자리에 놓았다. 

내가 출근한 뒤, 빈 집에 오셔서 나와 아이들이 던져놓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이불을 개는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는 채민이가 두고 간 귤 하나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는데, 그걸 보니 냉장고에 과일을 채워주는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앓는 소리가 심해 장난삼아 어르신이라 불렀더니만... 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마냥 기특하고 야무진 아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칭찬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차 싶었다. 항상 축 쳐져서 친구 없이 다니는 채민이가 보건실에 와서 쉬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그때마다 다른 학생들이 구겨놓은 이불까지 곱게 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오늘도 혼자 끙끙대며 이불을 개는 채민이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채민이의 힘없는 손목이 인형처럼 덜렁거렸다.   

“채민아, 그냥 내버려둬.”

“네? 왜요?”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정리할게. 너는 네가 잔 이불만 잘 정리하고 어서 교실로 가. ”

진지하게 말했지만 아이는 도통 못 알아들겠다는 얼굴이다.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채민이는 언제나처럼 이불을 전부 개어놓고 스르르 빠져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의 흐린 웃음을 생각한다.  

채민아, 잘하는 게 없어도 사랑받을 수 있어. 착하게 굴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어. 너무 애쓰지 마, 이미 충분하니까. 너는 착하고 배려 깊은 아이란 걸 선생님은 알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툭하면 길고 길게 늘어지는 넋두리는 지겹기 짝이 없지만, 그게 나름의 어리광이라면 끝까지 들어줘야한다고 생각했다. 내일도 채민이는 보건실 문을 두드릴 것이다. 어르신을 뵙듯 정중하게 맞아 달콤한 양갱이라도 하나 쥐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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