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1)

by 정둘

* 이 글은 '인간폐지 (저자: C.S. 루이스)' 의 일부를 발췌해, 정리한 기록입니다.

[Chapter 01. 가슴없는 사람]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절대적인 가치는 없으며,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라는 사조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즉 “너가 좋다고 생각하면 좋은거다, 무엇을 따를지는 각자 선택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는 생각이 주류가 되었다.

한때는 이것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내가 스스로 탐색해서 내가 무엇을 따를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다니! 완벽하게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길을 잃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에도, 어떤 걸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간관계 속에서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에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에도, 그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건지, 꺼낸다면, 꺼낸 뒤에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시대의 흐름은 나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내가 스스로 결정하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틀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미디어 매체에서는 똑같은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그 틀을 내가 처음부터 설계하라고, 또는 조금이라도 매력적인 설계처럼 보이는 걸 그대로 내 것으로 가져오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 혼란을 억누르고 사는게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직면해보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



무슨 책인가?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신실함과는 거리가 멀고 때로는 내가 정말 신앙을 가진 사람인가? 싶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어릴때부터 교회를 다니다보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정말 기독교가 진리일까? 기독교가 정말 하나밖에 없는 진리라면, 알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는 이 부분에 대해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20세기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C.S 루이스의 저서 중 "인간폐지" 이다. 내가 혼란스러웠던 이유 중 하나였던 가치 상대주의에 대해 루이스가 정면으로 반박한 책이다. 본 글은 이 책의 첫번째 챕터 (01. 가슴없는 사람) 을 읽고 정리한 글이다.






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특정한 대상에 대한 감정적 서술(예 : 와 정말 멋진 폭포네! 이 폭포를 보니까 장엄함이 느껴져!)은 단순히 개인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체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Q. 저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가치술어는 단순 감정상태의 묘사가 아니다 - 콜리지의 폭포 이야기

"저것은 장엄하다" 라고 말할 때, 언뜻 보기에는 폭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실제로는 폭포에 대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은 내 생각 속에는 ‘장엄하다’ 는 단어와 연관된 느낌이 있다. 즉 지금 나는 장엄한 느낌을 느낀다 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p12


위 내용은 ‘언어의 통제’ (이하 녹색책)라는 초등학교 고학년생을 대상으로 씌여진 문학책의 일부다. 여기서 말하는 폭포는 영국의 시인 콜리지가 폭포를 보고 장엄하다라고 이야기한 부분을 녹색책에서 재인용한 부분이다. 녹색책의 저자는 콜리지가 폭포를 보고 ‘장엄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저 개인의 느낌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루이스는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무언가를 보고 ‘장엄하다’ 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을 보고 정말 감탄하는 것이다. 즉 그 대상이 장엄할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녹색책의 저자들은 ‘장엄한 대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장엄하다’라는 표현을 그저 화자의 ‘단순 감정’으로 환원시켰다. 즉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킨 대상(폭포)을 제거하고, 그건 그냥 화자 개인이 느낀 ‘느낌’으로 여긴다. 이런 시각은 ‘장엄함’ ‘기쁨’ ‘즐거움’ 이라는 감정 너머 무언가가 존재할 가능성을 아예 제거한다. 즉 단순히 화자의 개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지, 거기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그렇게 서술된 건 아니라는 메세지를 포함하고 있다. 루이스는 이에 강하게 반대한다.



2) 가치술어를 가진 문장이 가진 전제 = 장엄함을 불러일으킬 대상이 존재한다

폭포를 장엄하다고 말한 사람은 단순히 폭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상이 그런 감정을 일으킬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p25

루이스는 자연이라는 존재가 인간으로부터 정당하고 합당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만약 이러한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폭포는 장엄하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건 개인의 단순한 느낌을 진술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저 폭포를 봐도 아무 느낌이 없어’ 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즉 객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대화는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무릇 좋은 교육이란 어떤 감정은 더 세워주고, 어떤 감정은 무너뜨리는 것임에는 그들도 기꺼이 동의할 것입니다.
p24

루이스는 녹색책의 교육방식 또한 비판한다. 루이스가 비판하는 포인트는 진짜 좋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 교육방식이다. 녹색책의 저자는 서쪽대양이라는 관광지 탐험 유람선의 상업광고글을 싣고는 이 글이 얼마나 형편없는 글인지 설명한다. 그저 나쁜 글이 왜 나쁜 글인지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하지만 이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서쪽대양의 형편없는 홍보글을 본 학생들은 서쪽 대양과 같은 미지에 대한 경외심과 기대까지 모두 과장된 것으로 치부할 위험이 있다. 즉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상을 보고 떠오르는 감정-장엄함,아름다움-은 모두 비이성적이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진정한 문학 교육이란 좋은 글과 형편없는 글을 나란히 게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읽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는 좋은 글과 나쁜 글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교육이 좋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좋은 교육이란 감정을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즉 감정 그 자체를 억압하거나, 이유없이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올바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녹색책의 저자들은 감정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이성과 감정의 건강한 균형을 무너뜨렸다.



3) 가치체계와 사실체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논리적일 경우, 모든 감정을 단순히 비이성적인 것으로, 사람과 실재 대상 사이에 드리운 안개 정도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학생의 정신에서 가능한 한 모든 감정을 제거하려 하거나 아니면 본래의 ‘정의’나 ‘질서’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유로 어떤 감정을 북돋우려 할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그들은 스스로 이성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 망상을, 최면술적인 ‘암시’나 주문 같은 방법을 통해 이들 안에 일으키려 하는 미심쩍은 일을 벌일 것입니다.
p30


루이스는 객관적인 가치를 부정한 이들이 결코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다룰 수 없음을 주장했다. 두가지 잘못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아예 감정을 억압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올바르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감정을 비정상적으로 부풀리는 것이다. 마땅히 가치있다고 여겨져야 할 대상을 제거해버리게 되면, 그 대상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이 양 극단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덕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도 사람을 덕스럽게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성은 훈련된 감정의 도움 없이는 동물적 유기조직에 맞서기에 무력합니다.
p33

덕에 대한 정당화는 이성적인 논리를 뜻한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덕은 그 어떤 행동도 만들어낼 수 없다.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음과 동시에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올바른 감정이며 지성은 훈련된 감정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루이스는 주장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 정리해보자면

루이스는 먼저, 가치술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무엇인가를 가치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진술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경계한다.


즉 감탄할 만한 대상을 보고 자신이 느낀 그 ‘감정’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상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게 무슨말인가? 자연에는 인간이 감탄할 만한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어떤 객관적인 가치체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자연이 감탄받을 만한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고, 이건 그냥 내 느낌일 뿐이야 라고 여긴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

이런 접근은 객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 대한 개인의 감정적 진술로써, 여기에는 그 어떤 논의점도 없다.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게 그르다, 옳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 어떤 기준점도 없는 이것이 녹색책의 저자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또한 루이스는 가치체계를 인정함으로써 이성과 감정은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에 놓일 수 있다고 했다. 객관적인 가치가 없다면 이성과 감정은 그 자체로 판단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치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녹색책의 저자들이 논리적인 경우, 이들은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대할까? 에 대해 루이스는 2가지 방향으로 흐른다고 했다. 감정을 아예 말살시켜버리거나, 아니면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북돋으려 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감정을 북돋을 때 비이성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어떤 선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정의,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방식은 최면과 망상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루이스는 설명했다.



저자의 주장을 지금 상황과 연결해본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비종교인들도 나름 무언가를 믿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도 영향을 미칠만한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아마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아닐까.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힘으로 쌓아올린 업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측정할 수 있고, 데이터를 통해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 많은 산업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업을 구성하고,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이 속에는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믿겠다 ‘라는 전제가 담긴 결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그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조차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그 어떤 모험도 없고, 기대도 없다. 단지 데이터 속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그 안에서 최대의 결과를 바랄 뿐이다. 이는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에만 인간의 사고를 고이게 만듦으로써 그 안에 갇히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는 왜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는 사람은 이성적이고 남성적이며 분별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걸까? 왜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만 믿겠다라는 태도가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앞으로 내가 탐구해 봐야 할 영역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