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인간폐지 (저자: C.S. 루이스)' 의 일부를 발췌해, 정리한 기록입니다.
[Chapter 02. 도]
요즘 같은 시대에 ‘옳고 그름’ 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하게 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취향과 내 생각의 흐름에 맞춰 내 인생을 설계할 것인가? 아니면 나보다 더 높은 어떤 차원이 있는가? 결국 우리는 ‘그렇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본 글은 20 세기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C.S 루이스의 저서 중 ‘인간폐지’ 의 두번째 챕터의 글을 읽고 나름 정리해본 글이다. 이 책은 가치 상대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한 저서이다.
먼저 첫번째 챕터 (01. 가슴없는 사람) 는 객관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가치회의론자들의 글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챕터다. 이들은 인간의 감정과 가치판단을 단순히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루이스는 인간이 무언가를 보고 감탄한다면, 그건 그 대상이 마땅히 그만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상이기 때문이지, 일시적인 인간의 감정적 격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이스는 가치체계를 파괴하려는 이들의 선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적성을 지닌 ‘선전’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음을 말했다.
위 챕터에서 인간이라면 모두가 받아들일 가치 - 살인을 하면 안된다,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 등-가 존재함을 설명했다면, 본 챕터에서는 옛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찾고자 할때, 과연 찾을 수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이다.
루이스가 말한 가치란 무엇인가?
위 질문에 대해 루이스는 ‘전통적 가치’를 모두 말살한 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 -도- 의 기원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도’와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덕(ex. 약자를 도와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을 부정한채, 새로운 가치체계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실 모두 ‘도’에서 파생된 것이며, 실상은 ‘도’에서 일부만 취한 형태-그래서 광기만 남은-라고 말한다.
가치혁신자 =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적인 가치 말고 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볼래
‘진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가치’ 와 ‘감정’은 모두 끊어내야 ‘진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가치 혁신자’ 라고 지칭)
1) 가치혁신자의 첫번째 주장 : ‘이성적’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
오직 ‘이성’의 견지에서 그 행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긍지나 명예, 사랑등에 호소하지 않고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대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에 대해 가치혁신자는 말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비이성적인 감상에 불과한 것으로써,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철저한 이성적인 합의하에 ‘공동체가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들의 헛점을 곧바로 집어낸다. ‘대의를 위해 죽는것이 공동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 속에서는 결코 누가 희생할 것인지를 정할 순 없다. 즉 “그래, 공동체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건 알겠어. 소수의 죽음이 다수를 살릴 수 있다면 말야. 하지만 그게 왜 꼭 나여야 해?” 이성적 합의로 끌어낸 명제에선 그 어떤 실질적인 실천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명제에서 어떤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사회는 보존되어야 한다라는 매개가 없다면 말입니다.
p44
즉, 루이스는 ‘소수의 희생으로 공동체가 유익해질 수 있다’ 에서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 행동을 곧바로 이끌어 낼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반드시 ‘사회는 보존되어야 한다’ 라는 가치체계가 필요하고, 이 가치체계가 있어야만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가치 혁신자의 두번째 주장 : ‘본능’에서 찾을 수 있다.
가치혁신자의 두번째 주장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적 충동’ 에서 도덕판단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본능’에 기초한 윤리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예시로, ‘성’ 이 있다. 가치혁신자가 말하듯이 자신의 본능적 충동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본능에 대해 가치혁신자는 두가지 자세를 보인다.
첫번째는 우리는 본능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라면, 본능이란 필연적이라는 것인데, 별도로 우리에게 권고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고 루이스는 되묻는다.
두번째로 본능에 순종하는 건 행복과 만족감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인간은 모두 죽음 앞에 서 있음을 상기시킨다. 루이스가 예시로 들고 있는 ‘종족 보존’ 본능 또한 죽음 앞에서는 결코 만족될 수 없다. 종족이 보존되는 건 죽음 이후의 후대 세대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위의 두가지 관점을 총합하여,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본능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묻는다 ‘왜 우리는 본능에 순종해야 하는가?’
본능에 순종하게 만드는 또 다른 권위적인 본능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루이스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도 알다시피 본능은 서로 균등한 위치에 있음으로서,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의 본능-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다른 모든 본능들을 희생하고서라도 그 본능에 순종해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추가적으로 루이스는 과연 ‘종족보존’ 본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우리 모두는 자녀와 손자를 키우고, 사랑하고 애정을 준다. 하지만 대부분 거기까지 그 본능적 충동은 끝난다. 언제 올지 모를 먼 미래의 후손들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건 본능이 아니다. 이는 선택과 반성의 영역이다.
3) 결론 : ‘도’를 대신할 수 있다 주장했던 모든 것은 사실 ‘도’에서 파생된 것이다.
도덕률, 전통적 도덕, 실천이성의 제 1원칙, 가장 평범한 진리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 그것은, 여러 가능한 가치 체계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가치 판단들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p57
인간이라면 모두가 받아들이는 진리- 공자, 예수, 스토아학파, 존로크- 는 전제이다.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이성적, 생물학적 가치로 여기는 것들을 변호하기 위해 ‘도’를 공격하는 가치혁신자들의 관점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새로운 가치들,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주장되는 것들은 모두 ‘도’ 자체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전체 맥락으로부터 제멋대로 찢겨져 나가서는 격리되어 광기에 빠진 것이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도’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기 타당성을 오로지 ‘도’를 통해 얻습니다.
p57
루이스는 ‘도’의 발전에 대해 유기적 변경과 외과적 변경이라는 두 흐름을 설명한다.
유기적 변경이란 참된 도덕적 진전이 있는 것으로써, 동일한 원리의 확장을 말한다. 예시로 유교의 도덕에서 기독교의 도덕으로 옮겨가는 것이 그 예시다. 반면 외과적 변경이란 모든 전통적인 도덕은 단순히 오류로 치부하고,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이 앉아버리는 사람들로써, 니체와 같은 인물을 말한다.
‘도’를 수정할 수 있는 권위는 그 ‘도’의 정신을 이해하는 내부자만이 가능하며, 외부자들은그저 적대적이기만 할뿐, 비판적일 순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를 비판할 근거는 ‘도’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바로 정리해보자면
일단 책이 참 어렵다. 관련된 이론들을 내가 더 깊이 알았더라면, 이해의 폭이 훨씬 깊었을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일단 지금의 내 수준에서, 이해한 바를 정리해보겠다.
가치혁신자는 두가지 큰 무기를 가지고 ‘진짜’가치를 찾으려고 애썼다. ‘사실적 관찰’ 혹은 ‘본능에 대한 호소’가 전통적 가치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요즘 말로 풀어보면 이성과 과학으로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와 심리학적 사실에서부터 찾으려는 시도가 아닐까?
“나는 철저히 관찰된 증거만을 믿겠다” 라는 생각은 ‘나는 쉽게 무언가를 믿지 않아. 나는 철저하게 관찰된 것만 믿겠어’ 라는 태도이다. 참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이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질문은 아마 ‘신이 있어? 그럼 나한테 증명해봐. 그럼 내가 믿어볼게’ 일 것이다.
관찰된 것만 믿겠다 라는 태도는 참 중요하다. 거짓이 팽배한 세상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이성적으로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 증거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이는 과학을 신봉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이 가지는 권위는 어마어마하다. 과학은 이전 세대에게 감추어졌던 미지의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인간은 감탄한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을 제시할 수 없다. 즉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과학이 할 수 없다.
어느 과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과학자 스스로도 어떤 분야를 연구할지 선택하는 기준을 과학 내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모든 선택행위에는 ‘가치판단’이 들어간다. 어느 가치를 우선하느냐- 외재적 가치든, 내재적 가치든-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본능’에서 도덕기준을 찾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약자를 보호하려고 하는 이유는 ‘이타적 본능’이 발동한 것이지, 약자를 도우라는 어떤 외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가지 본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어떨까. 여름철 물놀이를 하다가 나와 내 친구가 물에 빠졌다. 이때, 스스로 살고자 하는 본능과, 친구를 살려야 한다는 이타적 본능 중 어떤걸 따를것인가? 이 두가지 본능은 동일한 위치에 있고,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때, 어떤 본능을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게 되는데 이 말은 곧 본능은 그 자체로 도덕기준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여러가지 본능 중 무엇을 선택할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외부적인 기준이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우리와 이 이야기는 무슨 상관일까?
흔히들 이 시대는 가치 상대주의 라고 한다.
상대주의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사상. 반의어는 절대주의.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은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긴다.
출처: 나무위키
그러니까 이런거다.
“너는 너가 생각할 때, 따르고 싶은 진리를 따라. 나는 내가 따르고 싶은 진리를 따를게. 서로가 믿는 진리에 대해 존중해주자고. 너의 진리를 나에게 강요하지 말란 이야기야. 알겠지?”
하지만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자기모순이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라는 주장 자체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실상,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흘러오니 질문이 하나 생겼다.
왜 가치혁신자들과 같은 이들은 이토록 ‘전통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들의 이러한 시도를 뒷받침 해주는 명분이 무엇일까? 무엇이 ‘전통적인 가치’를 거부할 만한 명분을 제공해주는 거지? 그러다 떠오른 단어. 그건 ‘자유’였다. 말하자면 이런 주장 아닐까. “전통적인 것은 폐기되어야 마땅해. 난 내가 스스로 내가 따를 가치를 탐색해 볼거야. 그게 깨어있는 지식인의 자세이고 마땅히 그럴 수 있어. 그리고 그 무엇도 나를 판단할 수 없어. 나는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니까.”
자유는 참으로 매력적인 단어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곳, 시간 모두 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모든 직장인들이 꿈꾸는 자유가 이런 종류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들은 알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는 일정한 루틴이라는 틀이 없다면 무질서 그 자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싱글이 연애할 때보다 더 자유롭지만, 우린 모두 사랑하는 관계안에서 자발적으로 나를 묶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만족감을 느낀다는 걸 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부정적 자유로, 무언가로부터의 자유이고 두번째는 긍정적 자유로, 무언가를 향한 자유이다. 현대 사회는 부정적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 무언가를 향한 긍정적인 자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스스로 그 사랑에 나를 묶는 것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자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무한한 자유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달콤한 속삭임과는 달리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엄청난 혼란과 외로움이었다. 이렇듯, 올바른 가치관에 나를 묶는 것이 나를 진정한 자유로 이끄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올바른 가치관이란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사실에 일단 나를 묶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모든 선택의 바탕에는 어떤 가치체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판단의 바탕이 무엇인지, 그 뿌리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루이스는 이 시대야말로 ‘도’를 잃은 시대라 말하며, 도를 회복하지 않으면 인간 자체도 해체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번쯤 깊이 고민해볼만한 주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