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드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이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를 조명한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지나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기술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내가 하는 업무를 AI가 더 잘하게 될까 봐 두렵다. 앞으로 나는 뭐 해 먹고살지? 이 시대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 읽었던 CS 루이스의 ‘영광의 무게’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챕터 ‘전시의 학문’ 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장에서 루이스는 ‘전쟁이라는 불안한 시대에 학문을 계속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도 전시상황만큼 불안하고 무력하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루이스의 답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읽어봤다.
전쟁은 우리의 관심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한한 대상인 전쟁은 인간 영혼의 관심을 통째로, 계속해서 사로잡기에는 본질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p42
전쟁, 질병, 교통사고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피한다. 예를 들어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손을 재빨리 떼는 행동이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이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진 않을까 온 관심을 여기에 쏟는다면 아마 분명 정상적인 삶을 살진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은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떤 걸 붙잡고 살아야 할까?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활동들, 심지어 가장 비천한 활동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면 그분이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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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체를 가진 동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는 유물론에 반대한다. 분명히,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그래서 흔히 귀신이라고 말하는 존재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어떤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처럼 문명화된 지금은 ‘신’이라는 존재가 터무니없게 느껴져 버리게 된 시대이지만, 분명한 건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더 크고 높은 무언가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거다. 나 자신만 봐도 그렇다. 이건 무신론자들도 동의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불안한 상황일수록 인간은 보다 더 확실한 걸 붙잡고 싶어 한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과연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는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는 그 답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어떨까?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인간을 왜 만들었는가?
성경에서는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 창 1:27
하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아서 인간의 모든 불안함과 두려움, 초조함, 절박함, 과거의 상처 모든 걸 다 치료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 4:13-14
그렇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성경에서는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고전 10:31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왜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이 지점에서 성경과 다른 종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씻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각종 고행이 있고, 과거에는 면죄부 같은 제도도 있었다.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인간에게 죄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죄를 인간 스스로 씻어낼 수 없음을 알았다. 죄의 문제에서는 인간을 철저히 무능력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선한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은 왜 죄를 짓게 되었을까? 여기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선악과 사건이 등장한다. 이 사건으로 인간 안에 죄의 본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신은 본질적으로 선한 신이다. 그분의 깨끗함은 인간의 죄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은 인간과 함께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고, 그것이 인간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신은 그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직접 나섰다.
왜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을까?
인간은 자신의 죄를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선 죄가 없는 무결한 완전한 존재만이 대신 죗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인간은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신은 결국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 그리고 그 죄 값을 대신 치렀고, 인간은 다시 그 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임을 알고, 직접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각종 고행을 통해 자신의 죄를 씻어야 한다는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타 종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성경은 신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를 강조한다.
신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신의 모든 행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아마 여기까지 읽었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 ‘사랑’의 신이 도대체 왜 선악과라는 걸 놔둬서, 이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게끔 놔두셨나? 는 질문이다.
‘사랑’의 속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발성’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었다.
항상 눈에 보이는 선악과는 인간을 시험하는 ‘테스트’가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신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허락된 선택의 공간이었다. 유혹이 전혀 없는 상태에선 이 선택의 자발성이 결여 돼버린다. 즉 유혹이 왔을 때 속수무책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신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뜻에 인간이 ‘자발적’으로 따라주길 바랐다. 늘 눈앞에 유혹이 있지만, 매 순간 신의 말을 기억하고, 그 뜻에 자발적으로 따르겠다고 다짐함으로 인간은 더욱 신과 가까운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인관계를 생각해 보면 더 와닿는다. 많은 이성을 만날 수 있음에도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와 깊은 관계를 맺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 결혼 후에도 다른 매력적인 이성들이 많이 있지만, 그때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와의 결혼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선택하는 것이 그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지식과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되, 그 욕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p46
나 역시 글을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욕구의 본질을 곱씹게 된다. 책을 읽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지금과 같은 글쓰기를 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게 과연 다 무슨 소용일까?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되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사하고 나 자신에게도 어떤 도움이 되는가? 나는 이 글을 왜 쓰고 있는가? 하고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왜 쓰는지 몰라도, 분명한 게 하나 있다. 무언가가 자꾸 나를 글을 쓰도록 잡아끈다는 것이다. 이게 뭘까? 하고 알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 그리고 루이스가 말했듯, 이 욕구는 나를 만드신 분이 주신 거다. 나는 그에 응답하는 자세로 궁금증 그 자체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평시든 전시든, 미덕을 실천하고 행복을 누릴 시간을 미래로 미루지 마십시오.
장기계획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매 순간 “주께 하듯” 일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건 가장 기분 좋게 잘해 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현재만이 온갖 의무를 행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p51
인간이 살고 있는 시대가 전시상황일지라도 학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폭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학문이나 연구하고 있다고?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루이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늘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전시상황은 원래 있던 상황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상태로써, 전시상황이 일어나지 않은 시대도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 모든 어려움이 안정적이게 된 다음에야 문화적 활동들 - 학문, 미술, 음악 등- 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껏 인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평화로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고, 어렵고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늘 문화적 활동들을 추구했다. 그 결과 우리는 과거의 눈부신 업적- 문학, 과학, 미술, 음악-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의 행보를 개인의 행보로 축소시켜 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맨 처음 이 글을 읽은 이유였던, 불안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에 대한 답의 힌트를 이 대목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치솟는 집값, AI 와의 일자리 전쟁, 오르지 않는 연봉, 해마다 치솟는 물가상승률.
어느 지표를 봐도 희망적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언제는 살기 좋은 시대였는가? 하고 물어보면 답하기 어렵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어느 시대나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시대다. 지금의 시대도 그렇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폭탄이 쏟아지고 있다.
루이스는 전시상황에서의 어려움을 크게 3가지로 소개한다.
첫 번째 어려움은 ‘흥분’이다. 맡은 일이 있음에도 전쟁생각이나 집중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최선의 방어책은, 전쟁이라는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 뿐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로운 시대는 결코 오지 않으며,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 어려움은 ‘좌절’이다. 아무리 해도 난 초보자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맡기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매 순간을 ‘주께 하듯’ 일한다면 무슨 일이든 가장 기분 좋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덕을 실천할 순간을 미래로 미루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세 번째 어려움은 ‘두려움’이다. 아무래도 전시상황이다 보니,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루이스는 전시상황이든 평시상황이든 인간은 죽는 건 똑같다고 한다. 40년 뒤에 병으로 죽든, 내일 기관총을 맞고 죽든 죽는 건 똑같다는 거다. 일찍 죽든, 고통스럽게 죽든 그것이 두렵다기 보단, ‘죽음’ 자체를 떠올리는 것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시에도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루이스가 말한 3가지 어려움은 사실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다. 첫 번째 적 -AI라는 신기술이 새로운 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과거부터 있어왔고, AI 기술이 더 독해졌(?)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이며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두 번째 적- 좌절은 우리 모두가 다 겪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하나를 익히기도 어려운데, 신기술은 끊임없이 도입된다. 또는 학문적으로 공부를 한다고 해도, 공부하고 익혀야 할 게 너무나 많다. 나의 한평생을 다 바쳐도 절대 이 모든 걸 익히지 못할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걸 공부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든다. 이럴 때에도 루이스는 장기계획은 ‘주께 맡기라’고 조언하고 최선을 다하되,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라고 한다. 세 번째 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상대적으로 생각을 덜한 주제인 듯하다. 하지만 스티브잡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 스티브잡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임을 기억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참 흔들리는 시대다. 흔들릴수록 더 확실한 걸 붙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그것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며,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그 답을 나를 만드신 분 안에서 찾았다.
우리 모두 이 거대한 질문 앞에 다시 서야 할 때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큰 진리를 붙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