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 때, 작은 읍내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통학버스를 놓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때 나는 우연히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서점을 며칠 동안 들락거리며 다 읽고 나서도 없는 용돈을 털어서 그 책을 샀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한번 읽은 것을 이해하기에 어려워서 다시 읽으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나는 판타지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의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을 뛰어넘는 부분들을 읽다 보면 흥미가 떨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모모도 그랬습니다. 도대체 내 머리로는 상상이 안 되는 이상한 구절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다른 끌림이 있어서 읽고 또 읽으며 이해하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벌써 30여 년이 지난 2010년 무렵 나는 내 고향집 책장에서 ’ 모모‘를 발견했습니다. 내방에 꽂혀 있던 책 대부분이 버려지는 사이에 유독 남겨진 책 몇 권속에 모모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줄거리를 되짚어 보려고 그 책을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여유롭고 행복한 어느 마을에 회색 옷을 입은 신사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라고 꼬드깁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는 시간을 저축하고 항상 시간에 쫓겨 삽니다. 모모는 동네 사람들이 도둑맞은 시간을 되찾고 다시 예전의 여유롭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어찌 보면 흔한 판타지 소설 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다시 읽은 모모 이야기는 그저 재미로만 읽는 동화는 아니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기는커녕 자신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시간을 쪼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행,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회를 풍자한 내용이었습니다. 도둑맞았던 시간을 돌려받은 사람들이 다시 여유를 찾고 행복해지며 이야기가 끝을 맺지만 어쩌면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책장을 넘기다가 내가 어릴 때 줄 그어놓은 구절 몇 개를 찾았습니다. 재미있는 대목이거나 문장이 좋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대목에서는 옆에 물음표가 여러 번 중복해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던가 봅니다.
<“뒷걸음쳐 봐!” 모모는 그렇게 했다. 몸을 돌려 뒷걸음질을 치니 갑자기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모모가 뒷걸음질을 치는 동안 생각도 뒷걸음쳤고, 숨도 뒷걸음쳤고, 느낌도 뒷걸음쳤다. 한 마디로 모모의 삶이 뒷걸음쳤던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간의 틀 속에서 한치만 어긋나도 일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삽니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앞을 똑바로 보고 힘차게 달려 나가야 하는데 뒤로 돌아서서 거꾸로 달리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모는 시간을 관리하는 호라 박사를 만나러 가는 대목에서 거북이 카시오페아의 권유대로 주저하지 않고 뒤로 돌아 거꾸로 뛰기 시작합니다.
삶이 뒷걸음질 쳐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니 아이러니입니다. 고작 중학생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철학입니다. 아마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작가적 상상력이라고 치부하고 넘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년이 다 된 나는 모모의 작가 미카엘 엔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세상일에는 때로는 뒤로 돌아 천천히 걸어가야 오히려 더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 깨달은 것입니다. 나도 살아오는 동안 의도치 않게 여러 번 몸을 돌려 뒷걸음을 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삶이 송두리째 후퇴하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실은 그게 빠른 길이거나 올바른 길이었습니다. 빠르게 뛰어가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할 때,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제자리걸음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잠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평온해집니다. 마치 마파람과 싸우며 힘겹게 앞으로 나가는 것보다 등을 돌려 뒷걸음으로 가다 보면 잠시나마 걷는 게 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당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큰딸에게 그 책을 권했습니다. 큰딸은 한참 진로에 대한 고민과 경쟁에서 도태될까 두려워하던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책 속 등장인물 중에 모모의 친구 청소부 아저씨의 대사에 밑줄을 그어 주었습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리고는 한참 동안 묵묵히 앞만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리고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는 다시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한번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