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 같은 시국에 해외에 일하러 왔습니다
나는 2월 23일 비행기로 중국에 입국하였다.
사실 입국 전후로 굉장히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2월 초만 해도,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전국에 20명 내외였고, 중국은 정확한 통계수치는 모르지만 확산되고 있는 추세였다. 한국에 있는 많은 분들은 중국에 입국해야 하는 나를 걱정해주셨고, 나와 함께 합격한 여러 선생님들 중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합격 취소 의사를 밝히기도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난 코로나를 그저 지나가는 유행성 전염병 정도로만 생각했고, '곧 사그라들긴 하겠지만 타이밍이 참 좋지 않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곧 여름이 오면, 날이 더워지면 전염성이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17일이었던 입국 날짜를 조금 미뤄 23일에 입국하였다.
중국에 도착해보니 오히려 조금 무서웠다.
학교 측에서 예약했던 호텔이 외국인 입국객을 받지 않아, 호텔을 구하는 데만 애썼다고 했으며, 중국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식당도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으며, 마트, 편의점을 들어가려면 중국에 온 지 14일이 넘었다는 확인증을 보여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많았다. 입국 전후로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가 아주 급격하게 늘어 가장 어려웠던 점은 집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집을 구해야 이민가방에 압축까지 해서 테트리스 하듯 켜켜이 쌓아온 내 많은 짐들도 좀 풀고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쉽게 집을 볼 수 조차 없었다. 많은 아파트들이 아파트 주민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게 각 단지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내가 한국에서 한번 실물로 보려고 점찍어둔 아파트 단지들 대부분 한국인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베테랑 중개인이 어렵사리 진입이 가능하다고 알아낸 아파트들 중에는 집주인이 한국인이라면 집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속으로는 '지금 어디 때문에 세계가 이 난리인데, 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군.'이라곤 생각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어떻게든 답은 찾아냈다.
비록 선택지가 아주 많이 줄어 아쉽긴 했지만, 진입이 가능한 아파트 단지 중 한국인에게 집을 보여주겠다는 집주인을 고르고 골라 몇 개를 볼 수 있었고, 중국 입국 5일 만에 압축팩에 고이 모셔온 구스 이불을 펼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짐을 챙겨 올 때는, 간단한 생필품 및 소가구는 가서 사야겠다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던 생각으로 왔는데, 생필품을 살 이케아나 가까운 마트들이 영업을 하지 않아서 아주 힘들게 하나씩 사모았다. 택시가 아파트 단지 진입을 못해서 단지 입구부터 아파트 동 앞까지 낑낑대며 왔던 것이 벌써 추억이 되었다.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던 추억이라 하지만, 다시 하라면 절대 하지 못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행이게도 집을 구한 이후에, 강력한 격리 제도가 생기고 시행되어 나는 호텔이 아닌 집에서 5일 정도를 보내며 긴장의 연속이었던 심신도 달래고, 정착하기 위한 물건들도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조금씩 집다운 집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으로, 그렇게 선택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고른 집이 지금은 아주 안락한 집이 되어 나와 함께하고 있다.
흔히들 '라떼는 말이야' 하며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 꼰대라고 하지만, 이제 와서 남아있는 동기 선생님들끼리는 웃으며 이야기한다. 우리야 말로 '라떼는 말이야, 우리는 코로나 때 중국으로 넘어와서 집 구하는 게 미션임파서블이 따로 없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