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길

스티븐 킹의 『미저리』와 글쓰기에 관하여.

by platypus
로브 라이너 감독의 영화 <미저리>

자아실현을 위한 일들이 세상에 많지만, 글쓰기만큼 지독하고 집요하게 자기 안의 진실을 찾아 헤매야 하는 분야는 드물다. 쉽게 가는 길과 요행은 당연히 없다. 살면서 만난 글쓰기 선생들은 말했다. 요행에 기댄 글은 반드시 티가 난다. 그런 글은 상상력이 빈약하고 뻔한 수사가 난무하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안의 진실을 찾아가는 정직한 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맞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어떻게 그럴싸해 보이는 말에 기대지 않으면서 우리 안의 진실을 찾아갈 것인가? 어떻게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뒤돌아서서 왔던 길들을 모두 지워버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글 쓰다 부딪친 벽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 애초에 시작은 잘 할 수 있을까?


크든 작든, 글쓰기가 직업인 숙련된 작가든, 혹은 아직 제대로 된 책 한 권, 심지어 짧은 글 한 편 써본 적 없는 사람이든, 방금 제시한 문제들 ─혹은 글쓰기와 관련된 훨씬 다양한 문제들─은 항상 글 쓰는 책상에 한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마치 러시아 미트료카 인형처럼. 쓰기로 작정한 이상 이 문제들을 치워버릴 수는 없다. 쓰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이 징글맞은, 벗겨도 벗겨도 줄어들 뿐 사라지지 않는 인형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길에 들어서면, 이들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 문제들, 이 러시아 인형들과 우리의 관계는 특별하다. 이들은 말이 없고, 움직이지도 않고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글 쓰는 동안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들의 역할이라는 건 이렇다. 우리가 대충 얼버무리려거나, 진실이 아닌 데 기대거나 그럴싸한 말들을 꾸며내려고 할 때, 그리고 우리 글이 고양된 정신의 어딘가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려고 애쓸 때, 서술이 마땅히 찾아가야할 진실이 아닐 때, 그럴 때 이 애증의 인형은 공정하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극적인 방식으로? 아니다. 그게 거기 있다는 사실, 그뿐이다.


그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을까?


질문이, 찜찜함이 계속 남는다. 그게 거기 있었고 우리가 그 존재를 의식했을 뿐이다. 진지한 작가, 혹은 진지한 작가가 되려는 창작 지망생들에게는 그들이 뭐라 부르던 이와 비슷한 경험이 존재한다. 그들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또한 알고 있다.


나는 러시아 인형으로 표현했지만, 많은 작가들이 이것─무엇이라 부르던 그들을 괴롭히는 것─의 정체를 그들의 방식으로 묘사하곤 한다. 스티븐 킹은 그의 인상적인 소설 『미저리 Misery』에서 잔인하고, 끔찍하리만치 섬뜩한 한 인물을 창조해내 글쓰기 과정의 괴로움에 대해 설명한다. 애니 윌크스라는 이 인물이 내뿜는 광기는 너무 소름끼친 나머지, 이후에 사람들은 관계에서 광적인 집착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이 소설 『미저리』를 들먹이곤 한다. 사람들이 “미저리” 라고 부르는 것은 소설 속 애니 윌크스의 소름 돋는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소설 제목이 애니 윌크스를 대변하는 격이 된 것이다.

스티븐 킹, 『미저리』, 조재형 옮김, 황금가지, 2004.

이야기는 이렇다. 폴 셸던이라는 작가가 등장한다. 그는 인기 소설 '미저리 시리즈'의 작가이고 그의 미저리 시리즈는 그에게 상당한 부와 명성을 안겨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가 창조한 주인공 미저리 체스틴을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단정한 여성 주인공이고 모든 순진한 독자들은 좋아하지만, 폴에게 미저리는 쓰면 쓸수록 그 자신을 인기 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에만 머물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존재였다.


새로 출간되는 『미저리의 아이』라는 소설에서 폴은 미저리가 아이를 낳다 죽어버리는 결말을 써내고는 저 역겨운 미저리와 작별을 고한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시작, 진짜 작가 폴 셸던의 시작을 알리게 될, 미저리가 없는 새로운 소설까지 공들여 탈고한다. 완전한 승리감과 술에 흠뻑 취한 채로 폴은 새로운 작품의 원고를 품에 안고 뉴욕을 향해 차를 몰다 인적이 드문 숲길에서 끔찍한 전복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의 자동차가 박살나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애니 윌크스이고, 애니 윌크스는 그가 인기 작가 폴 셸던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왜냐하면 그녀는 폴의 소설 미저리 시리즈의 “넘버 원” 팬이었기 때문이다.


애니는 두 다리가 완전히 으깨진 폴을 끄집어내고 그녀의 (인적이 거의 없는)집으로 데려가 정성껏 간호한다. 왜냐하면─당연하겠지만─그녀는 전직 간호사였기 때문이다. 감금의 모든 요소가 완벽하다. 폴 셸던은 자신이 창조한 미저리 체스틴에게 흠뻑 빠진, 정신상태가 극히 위태로운 애니 윌크스의 보호 아래 살아남아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인다. 당연히, 애니는 폴의 새로 출간된 『미저리의 아이』의 결말을 5쪽 남겨놓고 미저리가 죽어버리는 상황에 대해 광적으로 격분한다.



“너…… 너…… 너 이 더러운 새끼!”


“무슨…… 난 도무지…….”


하지만 폴은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했고, 몸통 전체가 푹 가라앉아 죄다 사라져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책갈피가 있던 위치가 떠올랐다. 책의 4분의 3. 책을 다 읽은 게 확실했다.


(중략)


“그녀는 죽으면 안 돼!”


애니 윌크스가 폴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양손은 점차 빠르게 활짝 폈다 쥐기를 반복했다.


“미저리 체스틴은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애니…… 애니, 제발…….”


- 스티븐 킹, 『미저리』, 조재형 옮김, 황금가지, 2004, p. 67 ~ 68.



죽기 직전의 고통을 준 뒤, 애니는 다시 기분을 회복하고 폴에게 휠체어와 타자기, 종이를 선물한다. 폴이 애니를 위해 선물할 『돌아온 미저리』를 위해서.



“너는 이 타자기로 새로운 소설을 쓸 거야! 폴 셸던 최고의 소설! 『돌아온 미저리』!"


- 같은 책. p. 117



이제 폴은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창조물 미저리의 목숨이 하나로 엮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깨닫는다. 애니 윌크스의 끔찍한 보살핌, 고통과 비호 아래 『돌아온 미저리』의 정체는 서서히 수면을 가르며, 폴의 운명과 함께 나아간다.


글쓰기의 고통에 관한 거의 완벽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애니 윌크스가 폴에게 가하는 괴롭힘 중 가장 인상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야기의 ‘공정함’에 관한 부분이다. 폴은 애니를 적당히 만족시킬 수 있기 바라며 저번 책에서 죽었던 미저리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려버린다. 그러나 애니는 그가 미저리를 이런 식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려내는 것은 공정함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그가 시작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폴은 애니에게 정곡을 찔린다. 어떤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죽었던 인물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 없이 얼버무리듯 살아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애니는 폴이 미저리를 죽이도록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저리를 살리기 위해 사기를 치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 같은 책. p. 191.


애니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고, 옳지 않은 이유를 편집자가 때때로 내뱉는 전혀 믿을 수 없는 문학적 궤변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독자로서 변함없이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폴은 그것을 이해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부끄러워함을 알고 놀랐다. 애니가 옳았다. 폴은 사기 치는 글을 썼던 것이다.


- 같은 책. p. 197.



소설 속 애니는 과격하고 폭력적이고 편집증과 정신병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미치광이로 나오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폴 셸던이 바른 길을 가도록 안내하는 길잡이다. 폴과 애니의 관계는 그야말로 특별하다. 그리고 글, 소설이든 뭐든 제대로 된 글은 바로 글 쓰는 사람과 그들의 길잡이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적어도 폴 셸던이 알기로는 그렇고, 나도 여기에 동의하는 바이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어렵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수많은 함정을 피해가며 구덩이에서 쓸 만한 것을 하나씩 파내야 하는 고된 일을 하곤 한다. 가끔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다시 시도하고 반복해야 할 때도 있다. 많은 경우 시작도 전에 겁을 먹고 포기하고 만다. 설사 운이 좋아 우리가 건져낸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느리게 쓰고 있더라도, 그 글 속에는 또다시 길을 잃을 만한 교차로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폴 셸던이 그랬고, 내가 매번 시도하는 글에서 그런 것처럼.


그럼에도 글쓰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는 분명 자기 글에 깊이 매료되는 순간 또한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는 이 문장 바로 뒤에 나올, 내가, 온전히 내 자신이 쓰게 될 멋진 문장이 기다려지는 초조하고 흥분된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글쓰기는 한 손에는 고통의 칼과 또 한 손에는 공정함의 저울을 가진 정의의 여신이고, 그것은 틀리는 일 없이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일이 다반사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다룰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맞는 고통쯤은 상계할 만한 분명한 재미가 그 속에 들어 있음을 나는 안다. 이것이 내가 글쓰기를 놓을까봐 두려워하는 이유이고 동시에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