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 레이먼드 카버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소고

by platypus
레이먼드 카버 전기.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는 그가 쓴 한 에세이에서 그 자신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태어난 두 아이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재빨리 완성할 수 있는 시와 단편을 써내야 했던 시절을 술회한다.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연 소설가, ‘아메리칸 체호프’(카버는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체호프를 동경해왔다.) 등 카버가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임을 드러내는 수식어는 그가 단편소설 쓰기를 통해 이룩한 예술적 성취를 증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를 통해 재능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것을 시작으로 편집자와 소설가의 치열한 대립 관계의 예시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을 거쳐, ‘미니멀리스트’라는 칭호를 완전히 넘어서고, 소설을 통해 예술적 인식의 지평을 그야말로 거대한 건축물처럼 확장시켜 보고자 했던 카버 문학의 정수 격이라 할 수 있는 『대성당 Cathedral』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단편들은 각각이 놀라운 예술 작품일 뿐 아니라 연대기적으로도 한 인간의 생과 글쓰기의 관계를 톺아보기 충분히 훌륭한 자료들이다.


그런데 카버는 자신을 그야말로 밑바닥까지 추락시켰던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후─카버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결과적으로 술을 끊게 되고 나서는 자신을 ‘회복된 알코올 의존자’라고 부르기도 한다─인생의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고 병으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장편소설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고 끝내는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두에 기술한, 카버가 단편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생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재미있는 점이다.


카버는 에세이 「정열」(『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수록)에서 단편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경위에 대해 말한다. 1960년 중반의 어느 날, 그는 빨래방에 혼자 있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간에 쫓기고 있었으며, 가족의 빨래를 가득 실은 카트를 앞에 두고 홀로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건조기가 한 대 멈추자 그곳으로 갔는데, 건조기를 사용하던 빨래 주인이 와서는 옷이 충분히 마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동전을 넣고 건조기를 한 번 더 돌렸다고 한다. 그 순간 카버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무력감이 찾아왔고, 그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와 두 아이의 존재가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절망적으로 다가왔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에 지속적인 집중을 하기 힘든 모진 육아의 시기를 보냈다고 말한다. 물론 카버는 “오직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성숙한 기쁨과 만족(레이먼드 카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Call if you need me』, 최용준 옮김, 문학동네, 2015, p.187.)”을 아이들을 키우며 느꼈다고도 말하지만, 그 시기, 여느 작가라면 다 자신의 재능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한 발자국씩 천천히 나아가야만 하는 시기에 겪었던 전쟁 같은 육아 경험은 그가 단편소설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카버의 단편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인상적으로 감상한 작품을 꼭 하나 꼽자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대성당』 수록)이라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작품 외적으로도 흥미로운데, 이는 소설이 소위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설집 『대성당』에 실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은, 그 이전에 출간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수록된 「목욕」이라는 작품에 카버가 살을 덧대고 고쳐 다시 세상에 선보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이 전에 썼던 작품을 퇴고하고 수정하여 다시 선보이는 일은 비교적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카버의 작품 또한 전후 사정을 빼면 일견 흥미로운 발견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쓰였던 작품 「목욕」이 고든 리시라는 편집자에 의해 공격적인 편집이 가해졌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논의 주제이다.


고든 리시와 카버와의 관계는 고든 리시가 『에스콰이어』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어, 해당 잡지에 카버의 작품이 실리고 리시가 카버 작품의 본격 편집 작업을 맡는 것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와 두 번째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두 권 모두 리시가 편집에 관여했으며, 특히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리시에 의해 단편들이 많게는 70% 가까이 편집─삭제─이 가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앞선 두 권의 소설집으로 카버는 ‘미니멀리스트’라 불리게 되고 그의 인지도는 급격히 높아진다. 고든 리시가 편집자로서 매력적인 눈과 스타일리시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확실히, 리시의 편집이 가해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대부분의 단편은,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 일종의 서브텍스트적인 요소가 충격과 울림을 주는, 기이한 에너지로 가득한 소설집이다. 그러나 리시는 카버의 작품에 세련미를 더하긴 했지만, 작가와 작품을 다루는 데는 인간미나 깊이가 결여되어 있었다. 작가가 직조해낸 글은 일종의 생살과도 같이 표현되곤 한다. 그만큼 작가는 그 자신의 혼과 정수를 일정 정도 작품에 담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에서 리시가 카버의 작품을 거침없이 잘라낸 것은 카버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전에는 카버가 작품을 고치는 대가로 인기를 얻었으니, 카버의 편집자가 카버의 인기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카버 자신에게─혹은 모든 진지한 작가에게─각각의 단편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조금 더 숙고해보면, 이 일화는 일견 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자기 작품이 난도질을 당한 채로 세상에 선보였을 때 느꼈을 비참함과 패배감 또한 오랫동안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버는 결과적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을 통해 탁월하게 그가 추구한 깊이가 옳음을 증명해낸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스타일리시한 작품도 그 나름의 매력은 있겠지만, 카버 본인이 잘려나갔던 생살을 정성스레 붙여 새로 완성한 작품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생명력과 온기와 위로가 담겨 있다. 카버의 이러한 작업─잘려나갔던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 했던─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확고한 눈과 놀라운 의지가 결합된 쾌거다. 카버는 드디어 온전히 자신이 이룩한 영광을 성취했고, 그것이 카버의 단편이 현재까지도 그토록 깊은 울림으로 많은 사람에게 다가올 수 있는 이유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손성경 역, 문학동네, 2004.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정영문 역, 문학동네, 2005.

『대성당』, 김연수 역, 문학동네, 2014.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최용준 역, 문학동네, 2015.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22.


시집

『우리 모두』, 고영범 역, 문학동네, 2022.


레이먼드 카버 전기

캐롤 스클레니카,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 고영범 역, 강,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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