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바로 보는 용기에 관하여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녀석이다. 한데 지금은 마치 아이의 영혼이 다른 영역으로 훅 빨리듯 넘어가 있는 것처럼 고요한 모습이다. 어린 영혼이 빨려 들어가 노니는 그곳은 아마도 달콤한 안식과 평화가 지배하는 꿈의 세상이 아닌가 싶다.
“빨리 안 자면 키 안 커!”
“얼른 잠들지 않으면 무서운 아저씨가 잡아간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온갖 말로 회유와 협박을 해대던 나였지만, 어느새 세상 평온히 잠든 천사의 얼굴 앞에선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심금이 출렁인다. 이 사랑스러운 천사의 영혼이 넘어가 있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모아 그곳으로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된다.
우리 아이는 좋은 경험만 했으면 싶고 예쁜 것만 보고 듣게 하고 싶은 부모 마음과는 별개로 아이는 어느새 이 세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신만의 삶을 헤쳐나가고 있다. 그 세상은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이 맞고, 내가 지나온 삶의 길과도 닮아있을 것이다. 때로는 나를 좌절시켰던 경험, 그리고 소외감, 질투심, 혹은 열등감 같은 부정적 감정의 파도가 어린 딸아이의 여린 감수성을 덮쳐올 때도 있으리라.
마음 같아선 그 모든 나쁜 것들로부터 내 아이를 지켜주는 슈퍼히어로 같은 아빠이고 싶지만, 현실의 나는 나 자신을 지키기도 버거운 소시민일 뿐이다. 내가 경험해서 익히 알고 있거나 여전히 내가 헤어나오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내 아이가 빠져있는 걸 목격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서툰 아빠라는 말이다.
“S가 이건 유니콘이 아니래.”
울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 말을 내게 전하던 다섯 살배기 딸, 채연이가 손짓과 눈짓으로 가리킨 건 자신의 하늘색 패딩 점퍼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하늘색 바탕 위에 그려진 분홍색 말 문양이었다. 이번 겨울의 초입에 자신의 최애 고모가 사준 그 패딩 점퍼를, 녀석은 유니콘 점퍼라고 불러왔다. 그날 처음으로 유치원에 그 옷을 입고가선 친구들에게 ‘고모가 사준 유니콘 점퍼’라고 자랑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평소에도 얄미운 언행을 곧잘 일삼곤 했던 S가 그 문양을 보고 유니콘이 아니라고 했다니.
“왜 아니래?”
채연이의 얼굴에 떠올랐던 울분을 고스란히 내 목소리에 옮겨 담아,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이건 뿔이 없어서 유니콘이 아니래.”
채연이의 말을 듣고 나서 그 분홍색 말 문양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니, 정말 그 말에는 뿔이 없고 날개만 달려있었다. 자신과 모종의 라이벌 관계에 있는 S로부터 불편한 소리를 듣고 속상해하는 채연이의 심정은 충분히 공감했지만, 그래도 진실은 똑바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발끈했던 감정을 누그러뜨린 후 이렇게 응수했다.
“그래, S 말대로 이건 정말 유니콘이 아니네. 유니콘이라는 이름 자체가 뿔이 하나라는 뜻이니까, 뿔이 없는 이건 유니콘이 아닌 게 맞아. 뿔이 없이 날개만 달린 말은 유니콘이 아니라, 페가수스야.”
그런 내 대답을 들은 채연이의 얼굴에는 아까보다 한층 더 격상된 레벨의 분노가 휘몰아쳤다.
“아니야, 유니콘 맞아! 미스 제니퍼도 유니콘 맞다고 했단 말이야!”
나를 향해 격분을 토해내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만 녀석은 홱 토라져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채연이의 격앙된 반응에 적잖이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냥 적당히 편들어주지 그랬어? 안 그래도 자기가 말한 그대로 S가 얘기해서 엄청 속상했다는데… 제니퍼 선생님은 그래도 채연이 편을 들어주셨대. 유니콘은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에, 채연이가 그게 유니콘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유니콘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잖아. 그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는데…”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채연이는 분명 아빠로부터도 지지를 얻고 싶어서 그 울분의 에피소드를 내게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지는커녕, 얄미운 라이벌 친구에게 들었던 말을 아빠 입을 통해 고대로 다시 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속이 더 상했을까? 아빠는 분명 자기편일 거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을 터인데….
그 순간, 나는 복잡한 상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친구로부터 얄미운 저격을 받고 무안해하는 채연이를 슬기롭고 훈훈한 방식으로 감싸준 제니퍼 선생님에게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사를 느꼈다. 캐나다 출신의 원어민인 미스 제니퍼의 말은 당연히 영어였겠지만,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 자기편이었어야 할 아빠에게서 나온 냉정한 한국말보다 훨씬 더 따스한 온도로 녀석의 다친 마음을 감싸주었으리라. 그토록 현명하고 따뜻한 선생님이 채연이를 돌봐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24시간 채연이를 지켜보지 못하는 부모로서 매우 든든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이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 어떤 식으로 아이를 위로하고 감싸야하는지를 유아 교육을 전공한 캐나다인 교사로부터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친구로부터 입바른 소리를 듣고 자존심 상해하는 아이를 따뜻한 말로 위로하며 마냥 감싸기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걸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아이가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적지 않을 것이며, 그럴 때마다 자기편을 들어주는 미스 제니퍼 같은 존재가 채연이 곁에 없는 경우가 더 많을 텐데 말이다. 외려 당장 듣기에는 불편하거나 괴롭더라도, 진실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를 불어넣어 줘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가로막는다.
잠든 아이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고민한다. 내가 경험해온 이 세상의 고뇌와 번민이 채연이에게 찾아들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아직 모른다. 채연이보다 40여 년을 더 산 인생의 선배로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지혜가 내게 있기를, 그리하여 녀석이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있기만을 기도하는, 여전히 부족한 아빠일 뿐이다. 지나온 그 순간에 왜 좀 더 제대로 잘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다가올 그 순간엔 좀 더 나은 나로서 아이 곁에 서 있을 수 있기를 다짐하는 못난 아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한다. 내가 세상에 있건 없건, 채연이가 자신의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이유에 나라는 존재도 포함될 수 있기를… 그리고 기필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 앞에 다짐한다. 채연이가 훌쩍 더 커버리기 전에 우선은 나부터, 주어진 운명과 소명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며 순간순간을 놓침 없이 헤쳐가는 진정한 어른이 되리라고.
[에세이문학 2021.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