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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쌍둥이

2016년 제16회 한미수필문학상 장려상

by 곽재혁

“쌍둥이란다.”


전화기 너머로 뜻밖의 소식을 전해온 그는, 불과 두 달 전의 술자리에서 심각한 이혼 고민을 털어놓던 그 친구가 맞았다. 고향 친구 몇이 모인 추석 전날 밤, 우리는 꾸밈새 없이 막 담은 광어회 접시를 앞에 둔 채 사랑을 잃어버린 부부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의 넋두리 속에서 꼭 뱉어 버려야 할 생선가시처럼 묘사되었던 부인이 어느 날 선명한 두 줄이 생긴 임신진단키트를 그에게 보여줬고, 그들의 첫째와 둘째 딸을 받았던 단골 산부인과 의사는 그들에게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될 두 개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산부인과 가기 전 까지만 해도 지울 작정이었다. 근데 막상 쌍둥이 심장 소리를 듣고 나니 판단이 잘 안 선다. 지울까? 그냥 낳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나는 의사다.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불법이고.”

“너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친구잖아.”

“친구라고 해서 내 대답이 달라질 것 없다. 낳아야지.”


잦은 다툼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가던, 친구의 결혼생활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몰려올 고난의 해일이 내 눈에도 보일 것 같았지만, 내 대답은 방호벽처럼 단호했다.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나는 마치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듯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을 되뇌며, 내가 탄생을 지지한 쌍둥이가 위기의 부부에게 부디 행운을 가져다주길 빌었다.


해가 바뀌고 설 연휴에 대구 내려가서 다시 만난 그는 나를 향한 책임 전가의 칼날을 감추지 않았다.


“네놈 말 듣고 안 지운 거니까 네가 책임져라. 쌍둥이까지 넷 키울 생각하면 골 빠개진다.”


뱃속의 쌍둥이가 커갈수록 그를 억누르는 부담감도 커져갔겠지만, 체념과 포용이 쌍둥이처럼 자리 잡은 듯한 친구의 얼굴은 외려 전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




의사 된 자로서 의학 서적이 아닌 인터넷으로 의학지식을 얻는 행위를 부끄러이 여기는 편인 나는 환자가 끊어진 틈을 타 검색창에 ‘주산기 심근증’이라고 쳐본다.


‘주산기 심근(병)증은 출산 전후에 발생하는, 드물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임신합병증이다. 좌심실의 확장으로 수축 기능이 약화되면서 심부전을 일으킨다. 원인 불명이며, 고령 임산부, 임신성 고혈압, 다태아 산모, 비만 등이 고위험 인자로 알려져 있다.’


나에게 이 은밀한 인터넷 검색 행위를 하게 만든 장본인은 쌍둥이를 출산한 고령의 임산부라 고위험 인자 두 개를 가진 셈이었지만, 설혹 더 많이 가졌었다 하더라도 피해 갈 확률이 더 높았을 이 합병증이 왜 하필 내 친구의 부인에게 찾아온 것일까?


마른장마가 이어지던 7월 중순, 쌍둥이를 출산한 후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산모는 점점 심해지는 호흡곤란을 호소하였다. 급기야는 앉아서 몸을 앞으로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 힘든 지경에 이르자 당직 의사는 그녀를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하였다. D 의료원 도착 당시 쌍둥이 엄마는 이미 심부전 상태였다. 인공호흡기로 호흡 유지가 되지 않아 에크모(ECMO, 체외막 산소 화장치)까지 달았지만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고, 결국 그녀는 헬기를 통해 심장이식 수술이 가능한 서울의 S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친구야 이게 무슨 일이고? 나는 정말 무섭다. 아기 낳으면서 죽는다는 것 말로만 들었지 우리 집사람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


중환자실에는 보호자가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친구는 S병원 인근 모텔에 숙소를 잡았다고 했다.

퇴근 후 숙소 근처로 가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툭, 툭’ 꼭 내게 시비를 거는 듯한 빗방울이 달리는 차창에 들러붙기 시작한다. 생업도 내팽개친 채, 좌심실 수축 기능이 삼십 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아내를 데리고 서울로 날아온 친구에게 나는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내 말 듣고 안 지운 거라고 했던 친구 말이 진담이었다면, 이 엄청난 재앙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내가 져야 하는 것인가?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서 자동 모드로 설정된 윈도 브러시는 더 경망스럽게 왔다 갔다 하며 내 시야를 교란한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 문득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의대 본과 3학년 말, 나는 산부인과에서 첫 병원 실습을 시작했다. 날 것 그대로의 열정이 펄떡거렸던 그 천둥벌거숭이는 마치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 위풍당당했지만, 병원 안에서 학생이 하는 일이라고는 지켜보기와 허드레일 뿐이었다.

산부인과 수술실 앞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던 내게 마침내 미션이 주어졌다. 그것은 바로 수술 대기실로 가서 다음 수술 환자가 누워있는 이동침대를 찾아 끌고 오는 일이었다. 내가 데려올 환자는 제왕절개수술을 받을 산모가 분명했는데, 이름표를 확인하여 찾아낸 해당 침대에는 몸집이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여인이 누워 있었다. 신원 대조를 위해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마주 했을 때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코는 낮고, 입은 벌어져 있는 그 얼굴은 바로 다운증후군의 특징적 외모였다. 수술실까지 침대를 밀고 오는 동안 지켜본 그녀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고통을 이해 없이 그대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처럼 텅 빈 표정이었다.

수술실 앞에 도착하여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녀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학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나는 내가 데려온 이 특별한 산모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나는 이불속에서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찾아 꼭 잡아 주었다.


“○○씨, 힘내세요.”


놀란 강아지처럼 움찔하던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텅 빈 얼굴에 수줍고 해맑은 웃음이 채워진다. 아픈 것도 잊은 천사 같은 미소에 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나는 왠지 울컥했지만, 수술을 앞둔 환자 앞에서 의사처럼 옷을 입은 사람이 눈물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꾹 눌러 참았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산부인과 레지던트 1년 차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쌤은 꼭 마음 따뜻한 좋은 의사가 될 겁니다. 지금의 이런 따뜻함을 잃지 마세요.”


나에게서 그 선생님에게로 인계된 침대가 수술실 안으로 빨리듯 들어간 후 그대로 닫혀버렸던 시간의 문이 스르륵 다시 열린다.

그녀는 어떻게 임신을 하게 되었던 걸까? 아이 아빠는 누구일까? 같은 다운증후군이었을까? 그녀는 자신과 닮은 다운증후군 아기를 낳았을까? 만약 정상아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엄마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열린 문 사이로 쏟아져 나온 질문들이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처럼 내 의식에 맺혔다 흘러내린다.


‘여러 신체적, 정신적 이상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다운증후군 환자에게 임신과 출산은 그 자체가 험난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날 아기도 다운증후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산모와 보호자는 의사로부터 그런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그 남다른 임산부가 건강하게 임신을 유지하고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의사에게 그보다 더 깊이 개입할 권한은 없다. 아무리 산모가 임신을 감당하기 힘든 몸이고, 태아가 장애를 갖고 태어날 확률이 크다고 해도 그 생명의 존속 여부를 심판하는 일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이혼 위기 속에 생긴 쌍둥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지울까? 그냥 낳을까’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격은 의사인 내게도, 친구인 내게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친구도 이왕 주어진 두 생명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하려고, 낙태를 반대할 것이 분명한 나를 결정에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을까?




친구의 숙소에서 우리 집까지는 30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는데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낯선 길을 헤매고 있었다. 물음표와 느낌표를 머금은 빗물이 모여 형성된 개울은 성찰의 물줄기가 되어 나 자신을 향해 흐른다.

나는 지금 어떤 의사로 살고 있나? 다운증후군 산모에게 해줄 게 없어서 손이라도 잡아주었던 실습학생 때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지금, 나는 그 시절의 간절한 마음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때 나를 격려해주었던 레지던트 선생님이 잃지 말라고 했던 그 따뜻함의 온도를 잘 유지하며 살고 있는가? 스스로 책임의 한계를 정해 놓고 선을 긋는 방어 진료의 갑옷 속에 거북이처럼 숨은 채 타성에 젖어 혹은 시간에 쫓겨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궁 같던 헤맴에서 벗어나 마침내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 천둥벌거숭이 시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그때의 순수한 열정을 다시 찾고 싶어졌다.


“잘 도착했냐?”


길을 헤맨 탓에 도착 안부를 묻는 친구의 전화를 한창 주행 중에 받았다.


“친구야, 고맙다.”


상념의 수증기로 자욱한 내 의식 속에 꼭 들어와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친구는 앞뒤 자른 감사 인사를 툭 던진다.


“무슨 소리냐? 별로 해주는 것도 없는데.”

“의사 친구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그래, 나는 내 친구의 의사 친구다. 10대 시절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친구는 어딘가 안 좋을 때마다 내게 전화를 하곤 했다. 그리고 나를 이름으로 혹은 오빠로 부르는, 내 주변의 수많은 아기 엄마들은 아이가 아플 때면 소아과 의사인 나에게 연락을 해온다. 의사는 가까운 병원에 가도 있는데, 그들은 왜 꼭 멀리 있는 아는 의사를 찾는 걸까? 아마도 그들은 아는 의사로부터 믿을 만한 의학적 조언과 더불어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이리라. 비록 내가 대단한 권능을 가진 의사는 못되더라도, 그들의 고충을 공감하고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도와주는, 그저 따뜻한 사람은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아와 보호자들 역시 그들 나름의 아는 의사로부터 받고 싶을 그것을, 혈연도 지연도 없지만 그들이 믿고 찾아온 의사인 내가 먼저 해주면 되지 않을까?


“희망을 잃으면 다 잃는 거다. 힘내자, 친구야.”


‘기적이란 것도 있으니까.’ 의사 된 자로서 환자나 보호자 앞에서 기적을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기는 편이지만, 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환자에게 크고 작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은밀한 기도 행위는 계속된다.




최후의 보루인 심장이식수술에 앞서 마지막으로 시도해보자고 했던 약물 치료에 정말 기적적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전원 후 하루 만에 에크모를, 그다음 날엔 인공호흡기까지 뗀 쌍둥이 엄마는 S병원으로 옮겨진 후 4주 만에 심장 기능이 60 퍼센트 정도로 회복된 상태에서 퇴원을 했다. 출생한 산부인과 신생아실에 그대로 맡겨져서 한 달 넘게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쌍둥이도 집으로 돌아갔다.


“쌍둥이는 잘 크나?”

“그래 잘 큰다.”

“부부 사이는 좋냐?”

“요즘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한다. 그냥 감사하며 살아야지.”


아직 부인의 상태는 퇴원 당시와 별 차이 없다고 했다. 쌍둥이네 집은 원래 친구의 가계 건물 3층에 있었는데,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든 아내를 위해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쌍둥이 엄마가 잃어버린 40 퍼센트의 심장 기능이 다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어느새 돌아와 그 40 퍼센트의 공백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절름발이 꽃미남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경은 ‘행복은 쌍둥이로 태어난다(Happiness was born a twin).’고 했다. 어쩌면 행복의 쌍둥이 형제는 바로 불행이고, 그 둘은 서로 몸이 붙은 채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샴쌍둥이인지도 모르겠다.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twinloveconcierg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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