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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재혁 Apr 20. 2019

[여행 에세이] 파리 북역 라이브

위로와 희망의 찬가

 IMF 터지기 직전이었던 1997년 여름. 당시의 대학생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배낭여행을 다녀온 애와 아닌 애.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유럽으로 배낭여행 가던 시절이었다. 대낮의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 보면 몇 걸음에 한 번씩은 한국말이 들려올 정도였으니.

 바로 그해, 의대 본과에 진입하자마자 3월을 채 못 넘기고 교실을 뛰쳐나왔던 나는 눈칫밥 신세였다. 피 같은 등록금을 날리고 휴학계를 낸 후,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멀쩡하게 잘 다니던 의대를 뛰쳐나와 험한 세상을 기웃거리던 아들이 야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또 걱정스러우셨겠지.

 버거킹 알바를 3일 만에 때려치운 후 방구석에서 칩거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고교 시절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그는 육군사관생도였다.


 “독일 육사에 유학 가있는 친구한테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안 갈래?”


 내 결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난생처음 여권이란 걸 만들고, 알바로 모아놓은 돈에다 부모님과 누나들이 보태준 돈을 합쳐 항공표를 사고 환전을 했다.

 친구로부터 여행 제안을 받은 지 1주일 만에, 우린 그렇게 떠났다. 아무런 사전조사도 없이 급조된 배낭여행이었다. ‘남들도 다 가는 배낭여행, 이제 나도 간다!’는 자긍심에 한껏 부풀었던, 기대와 설렘 가득한 출발이었다.


 친구의 친구가 있는 하노버에서의 이틀 동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숙소는 독일 육군사관학교 기숙사였고, 식사와 관광 안내도 모조리 친구의 친구가 도맡았다. 이동은 택시로 했고, 끼니마다 근사한 식당에서 거한 식사를 했고, 밤에는 독일 사관생도들의 유흥 문화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린 일반적인 배낭여행객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호사를 친구의 친구 덕에 누린 셈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둘만의 여행을 위해 하노버를 떠난 직후부터, 친구와 나는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초고속열차인 이체(ICE)를 타고 베를린부터 가보기로 했는데, 상스시 궁전이 궁금했던 나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포츠담부터 들르자고 했다.

 구동독 지역이었던 포츠담의 스산한 거리를 걸으며 친구가 말했다. 자신은 평소에 훈련과 행군을 많이 해서 그런지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상스시 궁전’에 도착해서도, 그는 가는 곳마다 앉을 곳만 찾았다. 애초부터 궁전 구경 따위엔 아예 관심도 없었던 그였다.


 “Would you take a picture of us?”


 나는 가는 곳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맡기며 이렇게 부탁했는데, 그는 사진 찍히는 것마저 귀찮아했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궁전을 직접 눈에 담는 기쁨에 한껏 들떠있던 내 눈에는 동행자의 그런 소극적 태도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럴 거면 따로 다녀!”


 급기야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배낭 하나에 같이 쌌던 짐들 중에서 내 것들만 골라 보조가방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내 짐을 다 빼내서 가벼워진 배낭을 그의 앞에 털썩 던져놓고선, 혼자서 포츠담 역으로 걸어와 버렸다. 멀찌감치 뒤에서 따라온 그가 연신 사과를 했지만, 괜한 오기가 발동한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막 떠나려던 베를린행 기차에 혼자 올라타버렸다.

 내가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거름이었다. 나는 역 주변 가게에서 배낭부터 하나 샀다. 천으로 된 보조가방을 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짐을 옮겨 담은 배낭을 품에 안고 역전에 서있으려니, 나는 꼭 벼랑 끝에 선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베를린이란 낯선 도시에 홀로 뚝 떨어졌으니, 당장 숙소 잡는 일부터 막막했을 수밖에. 그땐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하노버로 돌아갔다. 독일 육군사관학교 정문 보초소를 통해 친구의 친구인 ‘카뎃 김’을 불러내어 숙소까지 함께 들어갔다. 친구는 이미 잠든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침대에 누운 채 내가 들어가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도 몹시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친구의 친구가 등교를 한 후에야, 우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멋쩍은 듯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눈물의 화해를 했다.


 “내 경비까지도 너한테 좀 보태줄 테니, 그냥 너 혼자 다녀라. 나는 쉬고 싶어서 온 것이니까 그냥 여기 남아서 편안하게 쉬고 있을게.”


 결국 친구는 하노버에 남기로 하고 나 혼자서만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혼자 떠난 여행의 첫 도착지였던 뮌헨. 시청사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나는 그 무리 안의 사람들 중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이 지금 뭘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정오가 되면 시계탑의 인형이 춤을 춘대요.”

 “아, 그렇군요. 제가 시간을 잘 맞춰서 왔네요.”

 “그런데,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안면 있는 얼굴이었다. 차츰 밝아지는 의식의 저쪽 편에서 의대 축제 때 동아리 주점에서 술자리를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비포 선 라이즈’ 류의 로맨스로 연결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내 의대 동기의 여자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때가 딱 의대 기말시험기간이었다. 그녀는 한창 시험지옥에 갇혀있는 남자 친구를 두고 혼자 유럽 여행을 온 것이었다. 나는 당시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아직 기말시험도 끝나지 않은 7월 초순에 교실이 아닌 유럽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속해있는 호텔 패키지 그룹과 함께 호프 브로이로 갔다. 그때 흑맥주라는 걸 난생처음 마셔봤는데, 단 한 잔으로도 나는 제법 거나하게 취했다. 악단에게 팁을 주면 한국 노래를 연주해준다는 말에, 우리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두 곡을 신청했다. 준비된 한국 노래는 ‘아리랑’과 ‘서울의 찬가’였다. 우리는 그날 밤 마치 만주 벌판에 모인 독립투사들이라도 된 듯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아리랑’을 목 놓아 불렀고, ‘서울의 찬가’에 맞춰서는 춤까지 추었다.


 “호텔 패키지 팀 중 한 명이 혼자서 폴란드에 가서 침대가 하나 비어요. 거기서 주무셔도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날 밤 아주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홀리데이인’에서 공짜로 하룻밤을 신세 질 수 있었다. 생면부지의 여행객에게 기꺼이 동숙을 허락한 룸메이트 형님에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호텔 패키지 팀과는 프라하 일정까지 함께 했다. 공동으로 빌린 아파트에서 해먹은 밥과 라면, 그리고 김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프라하에서의 1박 2일을 끝낸 후, 나는 호텔 패키지 팀과 헤어져 다시 독일로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야경이 매혹적인 드레스덴에서, 나는 세 명의 훈남 대학생 그룹과 합류한다. 드레스덴 중앙역에 내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게로 그들 쪽에서 먼저 다가와 준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유스 호스텔에 투숙했다. 그들이 나를 팀에 끌어들인 것은 숙박비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일 목적이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여행자였던 나에겐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네덜란드 쪽으로 간다는 그들은 내게 동행을 제안했지만, 나는 파리로 가야 했다. 나는 당시에 5일짜리 유로 패스를 끊어서 갔는데, 이미 4일을 써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의 마지막 3일을 파리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선 신세 질 호텔 패키지 팀도, N분의 1을 할 유스 호스텔 팀도 만나지 못했다. 파리 북역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역 근처 뒷골목의 호텔을 빙자한 모텔에 투숙하기로 했다. 모텔 1박 요금이, 드레스덴의 유스호스텔에서 내가 부담했던 금액의 3배에 달했다.


 파리에서의 3일은 그야말로 꿈속 같은 시간이었다. 체류 마지막 날이었던 7월 14일은 마침 파리 혁명 기념일이어서 에펠탑 주변과 세느 강변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던 그 축제의 장관이 꼭 나를 위한 것인 듯 여기며, 로맨틱한 감상에 빠져있을 때만 해도 참 좋았었는데.

 불꽃놀이가 끝난 후 군중들이 모두 빠지고 난 파리 거리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돌변했다. 무섭게 생긴 사내들이 몰려다니며 여성이나 외국인이 지나가면 그 진로방향으로 폭죽을 던지는가 하면, 아프리카계 남자가 다가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잔뜩 겁에 질린 나는 퐁네프에서 북역까지 걸어가려던 생각을 접고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는 배낭을 들고 탄 동양인 여행객을 봉으로 생각했는지, 딱 봐도 길을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텔 1박 숙박비에 육박하는 요금이 나오고 말았다.

 모텔비로 내려던 돈을 택시비로 몽땅 날려버린 나는 북역 안에서 노숙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정이 되니 역이 문을 닫는다며 나가라고 했다. 끝내 나는 그 안에 있던 몇몇의 노숙인들과 함께 길바닥으로 내몰렸다.

 그런데 북역 앞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무리의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중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그룹도 있었다. 나는 당장 그 무리로 달려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슬쩍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배낭을 벗어서는 그것을 쿠션 삼아 뒤로 기댔다.


 “오, 노숙이 체질인가 봐? 자세가 금세 딱 나오는데?”


 정감 어린 한국말을 들으니 일시에 긴장이 풀리며 이내 노곤한 졸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길 건너 노천카페에서는 어느 이름 모를 여가수가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후회하지 않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한 비브라토에 한껏 멋이 들어간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20년 전 파리 북역 앞에서 노숙하던 그날 밤 자신이 덮고 있던 신문지를 쭉 찢어서는 ‘이게 꽤 따뜻하더라고요’하며 내게 건네주던 그 훈훈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금쯤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퐁피두센터 앞에서 만나 샹젤리제 거리까지 같이 가서 스테이크를 함께 썰었던 그 홍대 미대 여학생 셋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호프 브로이에서 어깨동무하고 아리랑을 함께 불렀던 그 무리들은? 어둠이 내린 프라하 카를교 위에서 디비디비 딥 게임을 함께 했던 그 친구들은? 드레스덴의 밤거리를 같이 누볐던 그 훈남 청년들은?

 저마다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서로 옷깃을 스쳤던 그 청춘들은, 지금 이 도시의 빌딩 숲 어딘가에서 각자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겠지. 그때 하나씩 메고 있던 여행용 배낭보다 훨씬 더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어깨에 짊어진 채….


 살다가 괴로울 때, 근심과 불안의 안개가 내 앞길을 자욱하게 덮어버릴 땐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자. 눈을 감은 내 귓가에는 파리 북역 앞 노천카페에서 흘러나오던 ‘Non, Je Ne Regrette Rien’ 라이브 음향이 들려올 것이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가벼웠던 그 시절, 내 순수했던 영혼에 아로새겨진 위로와 희망의 찬가.

 현재에 대한 걱정도 미래를 향한 불안도 없던 그 천둥벌거숭이 시절의 패기를 떠올리며, 지금을 살아내고 미래를 받아들일 용기와 희망을 되찾자.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290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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