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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Nov 20. 2023

한국바둑의 황금시대와 일본의 몰락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15

1990년대 후반부터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라는 사천왕이 한국바둑을 이끌면서 한국바둑은 세계를 석권하게 되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바둑의 종주국이라 자부하던 일본에서 볼 때는 형편없는 변방이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한국이었다. 그랬던 한국바둑이 불과 10년도 안 되는 시기에 일본을 훨씬 추월하여 세계바둑의 최정상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조훈현의 뒤를 이어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가 차례로 바둑 올림픽이라는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에 우승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메이저급 국제 바둑대회를 앞 다투어 창설하였는데, 이들 대회는 마치 한국 기사들을 위해 생겨난 듯이 대부분의 대회에서 한국기사들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세계바둑대회에서의 한국기사들의 활약은 비단 사천왕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었다. 사천왕의 뒤를 이어 최철한, 이세돌, 박영훈, 김지석, 목진석 등 열 손가락으로도 다 꼽을 수 없는 정도의 많은 어린 기사들이 세계바둑의 정상급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그 누가 세계대회에 우승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바야흐로 한국바둑의 황금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이들 어린 기사들이 두각을 나탄내기 시작하는 1990년대 후반무렵 국내 바둑계는 이창호가 평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상권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한국 정상이자 세계의 정상에 선 이창호와 대결을 하여야 하였는데, 이들에게는 좀처럼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창호가 국내 거의 전 기전을 석권한 상황에서 이창호와 대국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도전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 도전자가 되는 것이 만만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도전자로 가는 길에는 조훈현이 막아서 있어, 이들은 이창호에게 가기 전에 조훈현에게 막혀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조훈현을 넘어서지 못하는 어린 기사들을 두고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즉 "어린 비둘기 큰 고개를 넘기엔 이르다."라는 말이 한 유행하였다.


그러던 중 한 명 두 명 조훈현을 넘어서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여러명의 어린 기사들이 이창호의 상대로 등장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국 이창호의 벽은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국내에서는 이창호란 큰 벽에 막혔지만, 세계대회에 출전하여서는 심심찮게 우승컵을 들고 오는 것이었다.    
 
중국의 추격도 무서웠다. 녜웨이핑의 퇴조로 잠시 중국바둑이 침체되는 듯했으나, 중국 국내에서 바둑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함에 따라 많은 어린 유망주들이 바둑계로 몰려들었다. 녜웨이핑의 뒤를 이어 중국바둑의 최강자로 등장한 마효춘(馬曉春, 마샤오춘)이 세계 정상급의 실력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창하오(常昊) 등 어린 신진기사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녜웨이핑이 응창기배에서 조훈현에게 패하여 정상의 문턱에서 내려오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두고 보아라. 나는 지금 호랑이를 키우고 있다. 이 호랑이는 곧 세계를 제패할 것이다”

라며 비장한 각오로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 어린 호랑이가 바로 창하오였다. 중국바둑은 어느새 한국, 일본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소호(五小虎), 육소룡(六小龍) 등으로 불리며 새로이 등장하는 어린 기사들은 세계바둑의 정상급에 근접하는 실력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욱일승천하는 한국 바둑의 기세에 세계바둑의 신흥 강자로 등장한 중국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중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라던 녜웨이핑이 응창기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꺾이면서 내리막길을 걸었고, 그를 이을 절대강자가 출현하지 못하였다. 물론 마효춘(馬暁春, 마샤오춘), 창하오 등의 세계 수준의 기사가 나왔지만, 이들은 번번이 결승의 문턱에서 한국 기사들에게 좌절을 맛보았다. 마효춘, 창하오 등은 실력면에서 이미 일본의 최정상급 수준을 넘어서 버렸으며, 세계 최정상을 차지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한국 기사들에게 그 꿈이 좌절되어 버린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기전이 잇달아 신설되었다. 매년 4-5개의 메이저급 국제기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제 국제바둑대회는 한국기사들의 독무대가 되어버렸다. 2000년대 초에는 국제바둑계에서 아마 앞으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전무후무한 일대사건이 진행되었다. 2000년 8월 조훈현 9단이 후지쯔배 세계바둑대회에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년 8개월간 개최된 23개 세계바둑대회를 한국기사가 모두 싹쓸이 우승해 버린 것이었다. 이 시기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유창혁의 4대 절대강자들은 물론, 신예 젊은 기사들도 세계바둑대회의 우승대열에 가담하였다. 일본은 이미 경쟁상대가 아니었고, 중국이 한국의 우승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특히 일본 바둑의 몰락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의 독주를 중국과 함께 추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1990년대 말이 되면서 중국에게도 현저히 밀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후 일본기사들은 국제대회에서 한국이나 중국 선수들을 만나면 으레 지는 것으로 되었다. 한국의 어린 10대 프로기사들조차 일본의 절대강자라는조치훈, 고바야시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만약 한국의 어린 기사가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조치훈이나 고바야시, 그리고 타케미야, 오다케와 같은 기사들과 대국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들이야 말로 "살아있는 전설"이었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존경하는 하늘과 같은 대기사(大棋士)와 직접 대국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으니, 승부를 떠나 대국기회를 가진 그 자체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평생의 기억으로 소중히 간직하였을 것이다. 

 
1990년대 말에 들어서도 한국의 어린 10대 기사들은 국제대회에서 일본의 최강자 조치훈이나 고바야시, 타케미야를 만나면 역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최강자들이 모인 국제대회에서 한판을 이기기가 힘든데, 대진운(對陣運)이 좋다고 기뻐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한판 거저 주웠다고... 지난날 한국기사들에게 하늘과 같이 비쳐지던 살아있는 전설, 일본의 최강자들은 한국의 어린 기사들에게 이미 호구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아마 속으로는 "전설은 쮜뿔..." 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한때 세계 바둑의 중심지인 일본의 바둑을 석권하여 바둑계의 전설로 불리웠던 일본의 최강자들이 십대의 한국의 어린 초단, 2단 기사들과 마주 앉아 승부를 겨루다가 맥없이 패하고 마는 광경은 어느 국제대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사가 된 것이다. 일본 기사들은 중국기사들에게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국제기전에서 일본기사들은 거의 한국, 중국 기사들의 “밥”이 되었다. 말 그대로 이넘 저넘 아무나 툭툭 건드리는 “홍어 X"이 된 것이다.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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