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알게 된 분이 물었다. “정희 씨는 집에서 종일 뭐 해?” 진짜 그게 궁금했는지 아니면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서 잠깐 머뭇대다 그냥 떠오른 대로 답했다. “저... 테레비 봐요.” 농담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분은 까르르 웃었고 순식간에 나온 내 대답에 나는 좀 놀랐다. 아, 진짜 엄청나게 보는구나, TV를 이렇게 오래, 많이 본 적이 있었나? 며칠 뒤 딸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요즘 책 많이 안 읽지...?” 새벽별 보고 나가서 저녁별 보고 들어오는 네가 뭘 아냐며 빠져나가려는데 “예전엔 엄마 조용해서 보면 책 읽고 있던데 요즘은 통 못 보겠어서” 라며 쐐기를 박는다.
이게 다 '굿닥터' 때문이다. 넷플 추천 영상에 하도 뜨길래 1화나 한 번 보자며 시작할 때 나는 몰랐다. 영상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니까 대충 보다가 미련 없이 패스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거 너무 재밌지 않은가. 앉은자리에서 3개의 에피소드를 봤다. 정신을 차리고 남은 회차를 찾아보니 어이쿠... 넷플에 올라온 시즌 6까지 모두 116화... go와 stop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릴 새도 없이 본능은 4화를 누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드라마가 생기면 사정없이 빠지는 내 성향대로 결국 116화를 모두 봤고 요즘은 대사하나 토씨하나 놓칠까 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직성대로 시즌 1부터 복습 중이다.
다시 보니 더 재밌는 ‘굿닥터’. 자폐증을 가진 천재의사, 숀을 연기한 프레디 하이모어 는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무공해 소년 ‘찰리’라고... 잘 컸네, 잘 컸어. 어쩐지 정이 가더라. 모든 배우의 연기가 빠짐없이 정말 정말 좋았지만 특히 눈에 띈 배우는 숀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준 닥터 글래스먼 역의 리처드 쉬프. 초급영어 수준의 내가 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힘을 쫙 뺀 목소리, 자연스러운 몸짓과 표정을 보다 보면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사람인지 그냥 알게 된다. 그와 숀이 나누는 대화마다 뭉클... 특히 기억에 남는 대사는 “닥터 글래스먼과 나는 가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아기에게 당신은 할아버지예요.”
숀의 첫사랑 ‘리아’ 역을 맡은 페이지 스파라의 사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 ‘클레어’ 역의 안토니아 토마스가 그 투명하고 깊은 눈으로 또르르 눈물을 흘릴 땐 슬프기보다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토리는 또 어떤가. 다양한 인종과 성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의 고뇌,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가치판단의 기준을 흔드는 질문이 쉴 새 없이 펼쳐지고 외과의사들의 긴박한 선택이 이어져 다음화를 저절로 누르게 된다. 2013년 우리나라에서 방영된 ‘굿닥터’를 원작으로 한다는 자막이 매 화마다 나온 점도 흐뭇하고 닥터 오드리, 닥터 멜렌데즈, 닥터 레즈닉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의 성격과 처한 상황이 저마다 달라서 드라마를 통해 여러 인생을 풍부하게 만나는 것도 이 드라마의 큰 매력.
암튼 요즘 너무 빠져있는 ‘굿닥터’. 시즌 7이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나의 열띤 마음을 식히기 위해 잠깐 쉬어가는 타임도 나쁘지 않다. 넷플에 시즌 7 열릴 때까지 매일 한 편씩 아껴봐야지. 이건 영어공부다...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