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격리된 시대의 풍경

by 이재현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일상에서 마주하지 않는다.

죽음은 집을 떠났고, 마을을 떠났으며, 대화의 자리에서도 사라졌다. 대신 병원과 장례식장, 요양시설이라는 특정 공간에 조용히 격리되었다. 죽음은 더 이상 가족의 품에서 맞이하는 사건이 아니라, 전문가의 손에 맡겨진 관리 대상이 되었다.


과거에는 죽음이 삶 가까이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의 마지막 숨을 함께 지켜보았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의 얼굴을 보며 자랐다.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삶의 일부였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보지 않음으로써 안심하려 한다. 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병원 복도 끝에서, 흰 커튼 뒤에서, 모니터의 숫자가 꺼지는 순간—그 모든 장면은 철저히 일상의 언어에서 삭제된다. 죽음은 ‘안 좋은 이야기’, ‘분위기를 흐리는 주제’, ‘굳이 꺼낼 필요 없는 말’이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 얘긴 하지 말자.”
그 말은 사실 이렇게 들린다.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자.”


이 격리는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죽음은 언어에서, 사유에서, 교육에서까지 밀려났다. 학교에서는 성공을 가르치지만, 끝을 가르치지 않는다. 건강은 이야기하지만, 유한성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 사는 법은 배우지만, 잘 사는 법과 잘 마무리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격리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 없는 불안으로 번져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 끝없는 경쟁,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강박.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가벼워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이 깔려 있다.


우리는 죽음을 멀리함으로써 삶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삶의 깊이를 함께 잃고 있다. 끝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방향을 잃기 쉽다. 유한함을 모르는 시간은 낭비되기 쉽고, 영원할 것처럼 여긴 관계는 소홀해지기 쉽다.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미가 함께 빠져나간다.


죽음이 격리된 시대의 풍경은 겉으로 보기에 안전하고 정돈되어 있다. 하지만 그 질서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삶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무거워졌다. 끝을 잃어버린 삶은 시작의 소중함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정말로 우리는 죽음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삶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

죽음이 다시 삶 가까이 돌아올 때, 비로소 삶도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이 글은 그 잃어버린 거리를 조금씩 되돌려 놓으려는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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