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나’를 비워 팔로워를 초대하는 사람이다

Leader

by 양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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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에서 리더의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춤의 첫걸음을 여는 것,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것, 상대가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 모든 책임은 리더의 몫이다. 먼저 노래를 듣고, 그 노래 안에서 어떤 길을 함께 걸을 것인지 상상해야 한다. 밀롱가의 한가운데에서 리더는 늘 먼저 손을 내민다.

손 대신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그 순간, 리더는 자신을 열고, 침묵 속에서 용기를 꺼내야 한다. 까베세오는 말보다 조용한 대화지만, 그만큼 떨리는 요청이다. 그 눈빛이 닿았을 때, 돌아오는 작은 고개짓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아무 말 없이 고개가 돌아가 버릴 수도 있다. 탱고에서 리더는 늘 먼저 움직이고, 먼저 거절당한다.

그리고 그 거절은, 때로는 생각보다 깊이 찌른다. 하지만 리더란 그런 것. 시작의 책임을 지는 사람, 침묵을 감수하는 사람, 그리고 매번 그 자리에 다시 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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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그런 밤이 있었다. 밀롱가의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고, 음악은 어느덧 두 번째 딴다를 넘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눈빛을 던지고, 조용히 걷고 있었다. 나도 용기를 냈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까베세오를 시도했다. 눈빛이 닿았고, 나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은 말보다 빠르고, 더 확실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거두었지만, 속으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괜찮다고, 원래 이런 일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속은 금방 구겨진 종이처럼 뒤틀렸다. 괜히 주변 시선이 더 의식됐고, 괜히 혼자서 앉아 있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아직 내가 부족한가... 내가 불편했나... 아니, 그냥 내가 싫었던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웃고 떠드는 론다의 바깥에서 나만 혼자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내 안에서 그 짧은 까베세오는 작은 굴욕이자 큰 배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리더의 몫이었다. 리더는 시작할 권리를 갖는 만큼, 거절당할 용기도 지녀야 한다. 까베세오는 말이 없는 언어다. 그 침묵 속에는 그날, 그 사람, 그 기분, 그 리듬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부정의 대답조차, 탱고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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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시작한 이후, 리더로서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건 ‘기다리는 일’이었다. 스텝을 외우는 것도, 리딩의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진짜 어려운 건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었다. 어느 날, 분위기가 유독 고요하고 따뜻했던 밤이었다. 반도네온 소리가 유리잔 속 물처럼 잔잔히 흘러나왔고, 사람들의 아브라소마저 조용해 보이던 그 딴다. 나는 그날 처음 만난 팔로워와 론다에 섰다. 인사 대신 조용한 눈인사만 주고받고, 천천히 첫 걸음을 뗐다. 그런데 그녀의 발이 아주 느리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다. 내가 생각한 박자보다 훨씬 늦었고, 리딩이 흐트러질까봐 망설여졌다. 그러나 나는 멈췄다. 몸은 멈췄지만, 귀는 그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녀의 숨결, 작은 무게 이동, 다리의 긴장감.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말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우리는, 마치 땅을 천천히 눌러가듯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게 끌지도 않고, 서로의 리듬을 따라가는 춤. 한 걸음 한 걸음이 대화처럼 이어졌고, 그 딴다의 마지막 곡이 흐를 땐 마치 한 편의 느린 시를 함께 읊는 기분이었다.

춤이 끝난 후,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리더란 앞서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걷기 위해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이끄는 게 아니라, 그녀가 함께 오고 싶어질 만큼 따뜻한 길을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진짜 ‘같이 춘 춤’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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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는 단순히 리드와 팔로우라는 역할의 구분에서 멈추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리더가 춤을 이끌고, 팔로워가 따라가는 구조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감정의 교환이 흐르고 있다. 리더는 춤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지만, 결코 무대를 독점하는 독주자가 아니다. 혼자만의 리듬으로 밀어붙이는 순간, 그 춤은 대화가 아닌 독백이 된다. 진짜 리더는 발끝보다 귀를 먼저 쓴다. 상대의 호흡을 듣고, 그녀의 무게 이동을 느끼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을 읽는다. 그리고 그 흐름에 맞춰 길을 조율한다.

때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상대가 준비될 때까지, 감정이 따라올 때까지, 조급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리더의 책임이며, 동시에 품격이다. 이끌겠다는 의지가 아닌, 함께하겠다는 마음에서 길은 열린다. 리더란 결국, 모든 걸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는 사람이다. 상대가 머물고 싶은 아브라소를 만드는 사람. 그래서 진짜 춤은 리더의 테크닉이 아니라, 리더의 인내에서 시작된다.

탱고에는 이런 말이 있다.

"A good leader is not the one who moves well, but the one who makes others want to move with them."

(좋은 리더란 잘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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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결국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 사람이 리더라면, 그 길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의 태도다. 탱고는 그렇게, 기술이 아닌 마음으로 완성되는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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