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을 감아 올려 서로를 하나로 묶는 순간

Enrosque

by 양희범

엔로스케(Enrosque)는 스페인어로 ‘감다, 비틀어 묶다’를 뜻한다. 탱고에서 그것은 리더가 자신의 축을 세우고 몸의 나선을 조여, 아주 작은 회전의 중심이 되는 순간을 가리킨다. 팔로워가 몰리네떼로 원을 그릴 때 리더는 바닥에 깊게 뿌리내린 한 점이 된다. 그 한 점에서 가늘고 단단한 나선이 조용히 올라온다. 힘으로 돌리는 회전이 아니다. 코어와 등, 갈비와 골반의 디소시에이션(상·하체 분리)이 만든 탄력이 발바닥의 접점에 모이고, 앞꿈치 피벗으로 시간을 살짝 감아 올린다.


기술로 풀면 더 또렷해진다. 축 다리는 발볼 위에서 미세하게 회전하고, 자유 다리는 무릎을 곁에 모아 붙이거나 라피스(lápiz)처럼 바닥 위에 연필선을 긋듯 호를 그린다. 무릎은 가깝게, 발은 가볍게, 축은 묵직하게. 골반은 낮게 가라앉고 흉곽은 열린 채로, 가슴은 파트너를 향하지만 아랫도리는 반박자 뒤에서 살짝 비튼다. 이 ‘시간차의 비틀림’이 움직임을 만들고, 그 움직임이 엔로스케의 품격을 만든다. 욕심이 커질수록 중심은 무너진다. 좋은 엔로스케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만 숨결처럼, 박동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엔로스케의 의미는 기술을 넘어선다. 그것은 ‘내가 잠시 멈추어, 너의 공전을 지탱하는 나의 자전’이다. 둘이 하나의 우주를 만든다면 팔로워의 궤도는 리더의 축으로부터 안심을 얻는다. 중심이 단단히 서 있을수록 상대는 가볍게 돌고, 내가 과하게 돌수록 상대는 밀려난다. 엔로스케는 상대를 과시를 위한 도구로 쓰는 기교가 아니라, 상대가 안심하고 펼칠 수 있도록 관계를 매만지는 태도다.


처음 이 동작을 배울 때 나는 힘으로 비틀었다. 골반에 힘을 잔뜩 주고 크게 회전하면 멋있어 보일 거라 믿었다. 그날의 춤은 자주 끊겼다. 팔로워의 몰리네떼가 흔들렸고, 내 어깨엔 불필요한 각이 생겼다.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짧게 말했다. “힘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중심을 세워보세요.”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그다음부터 나는 바닥을 더 누르기 시작했다. 뒤꿈치는 가볍게, 앞꿈치는 무겁게. 허벅지 안쪽으로 선을 모으고, 회전은 무릎이 아니라 코어에서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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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로스케를 할 때는 예외 없이 마음을 챙겨야 한다. 아주 작은 피벗, 거의 보이지 않는 수축. 그 사이에 자유 다리의 라피스가 반원 한 장의 그림자를 바닥에 남길 때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서로의 속도가 일치하는 순간, 회전은 ‘돈다’기보다 ‘흐른다’로 바뀐다. 엔로스케의 난점은 욕심이 아니라 타이밍이다. 팔로워의 이동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감으면 둘의 시간축이 엇나가고, 반대로 파트너가 비틀림을 만들어 주었는데 내가 늦게 감으면 주고받는 나사의 산과 골이 헛돈다. 엔로스케의 핵심은 즉시성이다. 어제의 근육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음악을 믿고, 지금 내 몸에 쌓인 탄력이 지금 풀리도록 허락하는 결단. 그래서 이 동작은 늘 현재형이다.


몸의 언어로 줄이면 세 가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는 ‘축’이다. 축은 찾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다. 발바닥 전체로 바닥을 넓게 느끼고, 엄지발가락 쪽에 미세한 접점을 만든다. 둘째는 ‘분리’다 가슴은 파트너와 이야기하고, 골반은 바닥과 흥정한다. 윗몸과 아랫몸이 서로 다른 문장을 말하는 찰나에 토크가 생긴다. 셋째는 ‘응축’이다. 무릎을 가깝게 모아 에너지를 한 점에 저장해야 라피스가 얇고 길게 나온다. 응축된 에너지가 없으면 회전은 흩어진다.


엔로스케는 단순히 과시를 위한 동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내면에는 깊숙이 배려가 숨어있다. 내가 과하게 나서면 파트너의 중심은 흔들리고, 몰리네떼의 호는 찌그러진다. 내가 미세하게 감기면 그녀는 원을 완성할 수 없다. 중심은 흔들리지 않으되, 에너지를 모아 상대의 히로 진행에 맞춰 호를 완성해야 한다. 그 마음에는 내가 돋보이고자 하는 큰 욕심은 조금 내려 놓아야 한다. 이것이 탱고가 내게 가르쳐 준 ‘내려놓음의 미학’이다.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이 춤을 조용하게 만든다. 내가 조용해질수록 춤은 크게 숨 쉰다. 그때, 춤은 우리의 것이 된다.


한 번은 음악이 빠르게 솟구치는 순간, 음악에 취해 본능대로 배려 없이 크게 돌린 적이 있다. 호는 그녀의 진행을 막았고 모두의 축은 흔들렸다. 내 회전이 우리의 춤을 끊어 버린 것이다. 엔로스케는 ‘내 회전’이 아니라 ‘우리의 경로’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 후로는 춤을 출때 먼저 묻는다. “지금, 당신의 궤도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그 질문을 어깨로, 가슴으로, 그리고 발끝으로 묻는다. 그녀의 답이 내 허리에서 감기면, 회전은 서로의 문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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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엔로스케는 내면의 장식이기도 하다. 라피스가 바닥에 얇게 그은 선은 종종 나만 아는 서명처럼 남는다. 관객이 보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 미세한 선 하나에 오늘의 숨이, 오늘의 망설임이, 오늘의 용기가 묻어 있음을. 탱고는 때로 보여주기보다 ‘살아있음’이 앞선다. 살아숨쉬는 나선은, 언젠가 보여질 때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 동작은 마치 삶과 같다. 상대의 주위를 맴도는 동안, 나는 나를 더 단단히 세운다. 내가 견고할수록 상대는 더 넓게 춤춘다. 내가 비틀거리 않고 굳건할수록, 우리의 원은 더 둥글어진다. 흔히 우리가 관계를 직선으로 가르려 하지만, 실제로 사랑은 나선으로 감긴다. 가까워졌다가, 한 뼘 물러났다 다시 가까워지는 리듬. 엔로스케는 그 나선의 문법을 몸에 새긴다. 결국 엔로스케는 ‘살아숨쉬는 관계’의 예술이다. 바닥에 깊이 닿아 작게 감아 올리면, 아브라소는 크게 열린다. 리더가 안으로 돌수록, 팔로워는 바깥에서 꽃처럼 피어난다. 이 균형을 알게 되면, 회전은 장식이 아니라 약속이 된다. 나는 나를 지킬 것이고, 너는 너를 펼칠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서로의 중심 위에서 안전할 것이다.


한편 이런 엔로스케는 마치 명상과도 그 속성이 비슷하다. 명상에서 말하는 앵커(마음의 닻)와 닮아 있다. 거친 생각의 파도가 몰아칠 때 우리는 호흡, 배꼽, 발바닥 같은 한 지점에 닻을 내린다. 닻이 내렸을 때 배는 더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춤에서도 같다. 축이 곧 앵커다. ‘발의 접점’, ‘코어의 미세한 조임’, ‘갈비 사이의 얇은 숨’, 이 세 가지에 닻이 내려가면 파트너의 몰리네떼가 빠르거나 느려도 마음은 쓸려가지 않는다. 앵커가 단단하면 회전은 조급해지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회전은 상대의 시간을 존중한다.


이 앵커는 자존감을 지켜 준다. 자존감은 “나는 존재 그 자체로 괜찮다”는 조용한 중심이고, 자존심은 “나는 보여야만 괜찮다”는 불안한 갑옷이다. 자존심이 앞서면 엔로스케는 커지고 거칠어진다. 크게 보여야 하니까. 자존감이 서면 엔로스케는 작아지되 깊어진다. 작게 감아도 충분히 연결되어 있으니까. 관계에서도 그렇다. 내가 내 중심에 닻을 내릴수록, 우리는 서로를 덜 흔들고 더 오래 감는다. 만약 춤이 시작되기 전 스스로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차 춤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다음을 기억하자.


(1) 호흡 앵커: 4박 들숨–4박 날숨, 갈비 사이에 여백 만들기.

(2) 신체 앵커: 엄지발가락 관절에 미세하게 압을 싣고, 무릎은 서로를 향해 ‘응축’.

(3) 의미 앵커: 속으로 한 문장, “있는 그대로 내 춤을 사랑하자”


세 앵커가 동시에 놓이면, 회전은 ‘나를 증명하는 장면’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시간’으로 바뀐다.

춤은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춤의 방식이 곧 삶이 방식과 연결된다. 대화가 헝클어질 때 우리는 더 크게 말하려 들지만, 사실 필요한 건 작은 피벗 하나다. 한 박자 멈춰 숨을 모으고, 내 말의 각도를 한 치만 낮추는 것. 그 미세한 엔로스케가 둘의 궤도를 다시 둥글게 만든다. 사랑은 직선으로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나선으로 묶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자주 건네 보자.

“나는 여기 선다. 나는 내 춤을 사랑하며 굳건하다. 그리고, 너와 함께 연다.”

그 한 줄의 앵커가 몸에 내려앉는 날, 엔로스케는 기술을 넘어 관계의 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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