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진님, 아진님과의 대화 후 많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저희는 한 때 비슷한 길을 가는 동료였고, 서로 의지가 돼 주던 사이였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잠시 당혹스러웠습니다만, 생각해 보니 결국 모두가 한낱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고뇌가 있고 그 고통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하는 일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아진님의 고민 또한 인간의 고민이고, 청년의 고민이니 우리 모두의 고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의 전환 후에 아진님의 이야기를 돌이켜보니 아진님의 아픔과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많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참 많이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아진님을 떠올리니 가슴이 참 미워집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진님께 한 때의 친우로서, 한 사람의 성직자로서, 아진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하는 답변들이 이성적이고 날카로워 아진님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 말을 너무 곡해해서 듣지 마시고, 사랑이 담긴 말이라 생각해 주시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아진님,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물으셨죠? 전 단 한 번도 수녀님들을 사모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진님의 질문이 한 편으로 불편하고, 불쾌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 생각했기에 이해도 잘 되지 않았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어서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마음을 열고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니 보이는 것들이 있더군요.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모든 게 믿음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거죠. 아마 아진님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믿음으로 세계는 구성됩니다. 아진님의 세계가 아진님의 믿음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죠. 아진님에게 사랑이란 전부이지만 없는 것이고, 영원불멸한 것이지만, 찰나로 사라진 가식입니다. 그런 모순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진님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진님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걸 아셔야 합니다. 믿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진님에게 사랑이란 변함없이 아픔 뿐일 겁니다.
이제는 스스로 질문하실 때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성 간의 사랑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사랑입니다. 하나의 시선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면 모순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부디, 이성 간의 사랑에 매어있는 마음을 놓으시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해결책이 있을 겁니다. 부디 아진님의 고통과 번뇌가 하느님의 품 안에 해결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아멘.]
한동안 왜 그의 메시지를 읽지 않고 방치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배려보다 다른 길을 가게 된, 이란 말이 가슴에 걸려왔다. 신도처럼 대해달라 했던 건 자신이었지만 막상 그 대우를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메시지가 마냥 아니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가 얼마나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답변을 줬는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애썼고, 답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마음이 느껴져 씁쓸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신부의 말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스스로를 확인하니, 혐오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러면서 누구에게 탓을 하고, 누구에게 지적을 했던가. 누구보다 성스러운 척 연기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대의를 가장하여 자신을 포장하던 모습이 사라져 갔다. 포장이 벗겨지고 나니 남은 게 없었다. 아집으로 똘똘 뭉친 자신만이 남았다. 이제 막 시작한 탱고에서 조차 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자신. 김수호 신부의 메시지를 보고 나니, 스승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얻고 싶었다. 한 치 앞도 모를 망망대해를 조각배 하나로 지나면서 무얼 그렇게 확신했던 걸까.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우스웠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제게 남아있나요?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질문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말 전 그녀를 사랑했던 걸까요? 또다시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는 반쪽짜리 달이 비웃음처럼 걸려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함을 열었다. 고정해 놓은 스승님의 메시지가 제일 상단에 떠있었다. 메시지를 눌러 답장을 썼다. 메시지를 다 입력한 후 보내기 버튼을 앞에 두고 고민했다. 눈을 감고 모르겠다, 하며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베개 맡에 던지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평소보다 긴 새벽이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