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알베르 카뮈
유명한 이방인의 도입부다.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받으며 시작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온 주인공은 여자 친구 마리와 새로운 친구 레옹을 사귀게 된다. 마리, 레옹과 함께 레옹의 친구 별장에 놀러 갔다 우연히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뫼르소는 살인 사건의 죄로 사형을 받는다. 구치소에서 판사, 목사가 제안하는 회계를 거부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화자의 태도가 눈에 띈다. 주인공 뫼르소는 평소 말이 없는 인물이며 추억도 미래도 없이 현재의 순간에 만족하는 즉흥적인고 순진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보통 어머니가 죽었다면 슬프 거나한 감정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첫 문장을 보듯 주인공인 화자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한다. 화자는 소설 전체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휴가를 요청할 때가 그렇다. 직장 상사에게 ‘자신의 탓이 아닙니다.’라며 어머니의 죽음 보단 자신의 입장을 더 신경 쓴다. 장례식에서도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는 대신 당장 자신이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밀크티를 마셔도 되는지를 걱정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바로 다음날에도 그저 수영을 하고 싶어 수영을 하고 평소 관심 있던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한다.
소설은 주인공의 감정이나 생각을 위주로 전개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제기하는 질문에 답만 할 뿐이다. 친구의 부탁에 거절할 이유가 없어 부탁을 들어주고, 연인 마리가 결혼하자는 요청에도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아무 생각 없는 바보일 뿐일까? 아니다. 어떤 의견을 내놓거나 주장을 하지 않고 짤막한 대답만 하던 화자는 소설의 마지막, 목사가 주인공에게 죄를 뉘우치자고 회계를 시도할 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리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이 소설의 핵심은 죽음에 있다. 소설엔 세 가지 죽음이 나온다. 주인공 어머니의 죽음, 뫼르소가 쏴 죽인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주인공 자신의 사형.
소설의 첫 번째 죽음인 어머니의 죽음은 뫼르소를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녹아서 갈라 터진 아스팔트”, “콜타르의 번쩍거리는 살”, “검은 반죽으로 이겨서 만든 것 같은” 과 같은 표현을 보면 어머니의 죽음 후 뫼르소의 시각에서 세상이 낯설게 묘사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할 때도 나타난다. 이것은 어머니의 죽음이 그가 살인을 하게 되는 동기로 작용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죽음은 뫼르소 자신의 죽음인 세 번째 죽음으로 이끄는 장치가 된다. 이렇게 세 죽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소설의 처음 중간 끝을 구성한다.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을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 앞에선 살아있을 적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 된다. 연인 마리가 원하는 결혼, 친구 레옹이 원하는 우정, 목사가 원하는 도덕성 모두 죽음 앞에선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마지막 주인공의 울부짖음에서 독자는 지금까지 그가 소설 전체에서 취했던 태도가 이해가 된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고 말 것이기 때문에 삶은 의미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는 것처럼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처지이며 (감옥에 있는 주인공이 되었든 그를 회계하려는 목사가 되었든 말이다.) 그 커다란 죽음이 있기에 지금 삶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감옥 안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자신의 처지와 사고를 저울질하는 두리뭉실한 사실보단,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운명인 죽음이 더 와 닿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죽음의 맞은편에 서있는 자신의 삶, 그 순간의 삶을 긍정하게 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터지는 이러한 주인공의 확신은 소설 전체에서 주인공을 이방인으로 만들었지만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마지막 문장인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문장은 내가 최근 만났던 어른들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젊어서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잘해야 한다.”, “사람을 얻어라.” 스티브 잡스도 죽기 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 나와 같이 젊을 땐 죽음을 의식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게 미래나 가치관,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만난 어른들의 말씀이나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 했던 말들은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외롭게 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표현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