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동생과 함께 간 겨울 여행
어느새 50이 넘은 엄마,
이제 20대 후반인 나,
아직 10대인 동생
충청도 시골에 사는 3명의 모녀가 겨울 여행을 떠났다.
뜬금없이 부산이 가고 싶단 중2 동생의 겨울방학에 맞춰 부랴부랴 떠난 2박 3일의 여행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부지런히 이어졌다.
12살 어린 동생. 항상 이 녀석의 말 한마디가 문제다. 겨우 중학생인 동생이 갑자기 꺼낸 '부산이 가고 싶어'라는 말에 부랴부랴 기차표와 호텔을 예약했다. 아빠는 집에 남겨두고 여자 셋이서 동생의 방학에 맞춰 떠난 2박 3일의 여행이었다.
촌사람이 여행을 가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부산까지 한 번에 가는 기차가 없어서 집 근처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천안아산역에서 부산행 srt를 타야 했다. 오전 안에 부산에 도착하기 위해 동생은 방학인데도 늦잠을 포기해야 했다. 기차를 자주 타서 기차만 봐선 여행 기분이 나지 않지만 srt는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익숙해도 처음 타는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면 새로운 기분이 들듯 기차를 보고 여행의 시작을 느꼈다. ‘처음’이란 단어가 붙으면 사소한 것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srt의 빠른 속도가 지루해질 때쯤 창밖에 부산이 찾아왔다. 상행, 하행 겨우 2개의 승강장만 있는 시골 기차역에서 플랫폼이 몇 개인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부산역까지 왔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 덕에 컨디션도 좋다. 부산역의 풍경을 눈에 담자마자 해운대 근처에 잡은 호텔로 갔다. 짐을 내려두고 미리 예약한 식당으로 갔다. 매일 식탁에 그릇을 내려놓는 사람이었던 엄마는 누군가 정성스럽게 차리는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나의 여행이 기차역에서 시작했다면 엄마의 여행은 낯선 식탁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보다, 호텔에 체크인했을 때보다 모르는 식탁에 누군가 정성스럽게 차리는 음식을 보는 순간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지 않았을까? 처음 먹는 음식이 자극하는 오감을 타고 우리는 모두 부산에 무사히 도착했다.
처음 간 식당의 새로운 맛을 새기고 바로 해운대해수욕장으로 갔다. 역시 부산에 왔으니 제일 먼저 바다가 보고 싶었다. 겨울이라 파라솔은 없지만 내 무게가 담겨 푹푹 꺼지는 모래와 비둘기 대신 모여 있는 갈매기가 바다의 증거였다. 아직 치우지 않은 크리스마스 장식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 개와 산책 중인 사람들이 모여 해운대 풍경이 가득 찼다. 동생이 신발에 모래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투덜거릴 때쯤 바다를 나와 다시 버스에 올랐다.
부산 여행을 오면 누구나 가는 비프광장에서 씨앗호떡을 먹고 다른 지역에 가면 가야 할 것 같은 시장도 들렀다. 자갈치시장부터 깡통시장까지 부지런히 걷고 비빔당면에 부산어묵까지 일단 부산을 상징하는 먹거리 볼거리를 모두 섭렵했다. 점심을 먹은 뒤로 3번의 간식시간을 더 가졌더니 시간은 저녁 시간인데 배가 불렀다. 예정엔 없었지만 근처에 있는 보수동 헌책방거리를 구경했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선 낮은 키를 가진 책방들이 대형서점과 사뭇 다른 정취를 풍긴다. 오래된 것에선 안 좋은 냄새가 나기 쉬운데 헌책의 냄새는 불쾌하지 않았다. 냄새 자체가 좋아서라기 보단 독서하는 사람들의 좋은 기운이 담겨서 그럴 것이다.
헌책방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이어 느끼기 위해 동백섬으로 향했다. 어둠이 찾아온 동백섬은 낮에 해운대에서 바라봤을 때와는 또 다른 정취가 풍긴다. 이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은 야깅을 하고 관광객들은 낮에 산 유명 빵집 쇼핑백을 들고 야경을 즐기고 있다. 나무에 듬성듬성 핀 꽃은 밤의 어둠이 칠해져 조금 더 오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린 해운대 해변에서 버스킹 하는 사람들과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산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여행에서 서두르는 법이 없는 나지만 오늘 아침은 조금 급하게 움직였다. 대마도로 가는 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무리한 일정이지만 대마도 당일 여행을 하기로 했다. 부산은 여러 번 방문한 도시고 겨울이다 보니 야외에서 많이 움직이긴 좀 어려워서 이벤트 느낌으로 넣어 본 일정이다. 호텔 조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 아침을 먹고 택시를 잡아 부산항으로 향했다.
첫 방문인 부산항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수속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초초하게 도착한 보람 없이 오래 배를 기다려야 했다.
배에서 잠시 자다 깨보니 핸드폰도 주민등록증도 무용지물이 되는 해외에 와있다. 어디까지나 부산여행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수속을 밟아도 해외에 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작은 항구를 벗어나 한국과 달리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과 길가에 늘어선 일본 본 섬에서 봤던 집과 건물을 보자 그제야 타국에 와있음이 실감 났다. 지나가는 길에 본 동네 놀이터, 모르는 음료수가 들어 있는 자판기, 애니메이션에 나올듯한 자동차를 보며 산책을 했다. 평일이라 관광객도 없는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온통 낯선 것들이었다. 일본식 건축물이라 키가 작은 집 사이를 사람 한 명 못 보고 우리 셋만 걸어가고 있으니 작은 모형 마을이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 간 식당에선 평일이라 주문할 수 없는 메뉴들이 많았다. 아쉽지만 튀김과 우동으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대마도 여행의 목적이라는 대마도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갔다. 사실 최대 규모란 단어를 붙이기엔 작은 건물이지만 일본 식재료와 간식거리를 살 수 있어서 대마도 당일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다. 빈 캐리어를 들고 와서 보따리장수 수준으로 장을 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마트에 들어오니 확실히 일본이다. 미소 같은 일본 식탁의 필수품부터 일본어가 여기저기 쓰여있는 과자들이 쌓여있다. 우리는 환전을 따로 하지 않고 예전 일본 여행에서 쓰다 남은 만 엔도 안 되는 현금만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전투적인 쇼핑은 하지 않았다. 각자 기념품 삼아 간식거리 몇 개만 사는 정도로 장보기를 마쳤다. 그렇게 쇼핑몰을 한 바퀴 둘러보고 1층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얼마 안 되는 남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이라기엔 크게 본 것 없는 하루였지만 별다른 준비 없이도 해외에 있는 기분을 느껴보는 건 꽤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잘 정렬된 상점가와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두 장 찍으니 어느새 다시 항구로 갈 시간이다. 몇 시간 안 되는 허무한 해외 체류가 끝났다. 부산에 돌아와 용두산 공원의 부산타워로 향했고, 저 멀리에서 부산의 야경 속에 섞여 보일지도 모를 대마도를 바라보며 하루의 아쉬움을 달랬다. 간질간질 아쉬움이 남는 둘째 날이 지났다.
돌아오는 날이란 무얼 해도 아쉬운 법이다. 짧은 여행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미련 없이 떠나라고 비가 내렸다. 소나기도 아닌 부슬부슬 내려서 꽤 음산한 날이 만들어졌다. 하늘이 맑은 날과 비 오는 날 중 어느 쪽으로 할지 약 올리는 것 같았다. 부산역에 짐을 맡겨두고 밀면을 한 그릇 먹으려 하니 그치는긋 하던 비가 다시 온다. 쏟아지는 비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비가 관광에 좋을 리 없다. 추위도 더 많이 느껴진다. 다행히 밀면을 다 비울쯤 비는 조금 줄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질지도 몰라서 고민했지만 마지막 시간을 날릴 순 없어서 부산역 앞 초량이바구길로 향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168계단을 올라 마지막으로 부산 시내 전경을 눈에 담았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부산시내가 168번 새로운 높이로 보였다. 계단 한 칸만 달라져도 바라보는 풍경은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 옆으로 가야만 세상이 달라지는 줄 알았는데 같은 장소에서 위아래로 조금만 움직여도 많은 것이 다르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 초량 이바구길과 이어지는 차이나타운까지 둘러보니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다. 부산역 앞 횡단보도에서 엄마의 "구경 잘 했네."라는 말이 슬레이트가 되어 여행이 막을 내렸다.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고 생각했다.
‘아, 집에 빨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