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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dfpark Dec 19. 2022

아빠는 19살까지 여자였다

분홍 종이의 비밀


요즘 들어 부모님은 종종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신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옆집 소를 몰아 뒷산 풀을 뜯게 하고 옆집 부부에게 밥을 얻어먹었다거나 일곱 식구가 한 이불을 덮고 잤다던, 검정 고무신에서나 볼 법한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간혹 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믿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중 가장 나를 경악하게 만든, 아버지를 19살까지 여자로 살게 만든 그때 그 시절의 행정 실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대구의 모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세의 어린 아버지는 체력장에서 어이없는 일을 겪게 된다. 체력장 원서를 받았는데 다른 학우들의 평범한 흰 종이와 다르게 아버지의 원서만 분홍색 종이었던 것. 그 당시 분홍색 원서는 여학생들 전용이었고 (심지어 아버지는 남자 고등학교)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는 19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주민등록 정보를 확인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여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주민등록상 여성으로 등록돼있었다.



여기까지 듣고도 내 귀를 의심해서 여러 번을 되물어본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실제로 아버지는 주민등록상 여자였고 그걸 19년 만에 처음 알았다고 한다. 시골에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쭉. 놀랍게도 그전까지는 그걸 굳이 확인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남자 고등학교에는 어떻게 입학이 된 건지 의문이 생겼지만, 이미 출생 후 등록부터 그렇게 허술한 행정 시스템이니 어련할까. 납득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결국 19살이 되어서야 자신의 원래 성별을 되찾기 위해 신원 법원에서 재판까지 받았고 다행히 원래 국가가 인정한(?) 남성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나와 30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아버지는 온갖 행정 실수의 산 증인이시다. 64년도에 태어났지만 출생 신고를 늦게 해 주민등록상 65년생인 데다가 자신의 진짜 혈액형도 군대에서 아셨다고 한다. AB형인데 O형으로 알고 사셨다고.



이 기가 막힌 이야기의 근원은 아버지의 출생 신고가 이루어진 65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드디어 미뤄왔던 장남의 출생 신고를 하는 날, 면사무소로 향한 건 조부모님이 아니라 마을 이장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이름뿐 아니라 그 무렵 태어난 여러 아이들의 명단도 함께. 장날이 아니면 먼 읍내까지 나갈 일이 없고 글도 잘 읽을 줄 모르는 마을 주민들을 대신해 이장이 출생 신고를 올리는 건 60년대에 흔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이것은 호별 비료 신청 대장이고, 요놈은 반별로 소금 나눠줄 명단이고, 아이고, 이번에 새로 출생신고해야 할 애기들도 여러 명이로구먼. 아, 참 그저께 쥐약 투약한 결과도 보고를 해야 하는디 4반에서는 왜 잡은 마릿수 보고를 안 한 것이여….”


출처 :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이장 ① - 출생 신고, 사연도 많았더라 - 한국농정신문




문제는 이장이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비료도 신청하고, 소금도 신청하고, 출생 신고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김 씨네 아이가 이름이 뭐랬더라, 박 씨네 아이가 딸이었던가 하고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영 엉뚱한 이름으로 출생 신고가 되고, 누군가는 딸로 둔갑해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출생 신고를 부모가 직접 하는 게 당연한 지금의 우리에게 60년대의 대리 출생 신고 문화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미래에는 아이를 낳자마자 비대면으로 출생 신고를 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때 가면 20XX년 생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출생 신고를 직접 가서 했다고요?"







+60년대 대리 출생신고 문화를 잘 보여주는 한국농정신문 기사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아버지처럼 성별이 잘못 신고된 사례는 드문 듯하다...)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8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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