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부터 다사다난한 도쿄 여행
“진짜 미안한데 나 코로나야…”
11월 2X일 아침 9시, 남자친구와 도쿄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비몽사몽 전화를 받은 내 귓전에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일본 무비자 자유여행이 허가된 지 한 달 정도 됐을 무렵, 나와 남자친구는 도쿄행 비행기를 끊었다. 여행 주목적은 남자친구의 요양. 당시 한 회사의 인턴 평가를 거치고 있던 남자친구의 출근이 종료되는 날짜에 여행 일정을 맞췄다. 도쿄를 여행지로 정한 것도 대도시 여행을 선호하는 남자친구에게 맞춘 선택이었다. (나는 대도시보다 치앙마이 같은 자연 느낌의 여행지에 가고 싶었다.) 인턴 평가로 바쁜 남자친구를 대신해 숙소, 디즈니씨 티켓, 환전, 유심 등을 주도해서 준비했다. 도쿄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씨 중 어디를 갈지 고민했지만, 남자친구가 원하는 디즈니씨로 골라 예약했다. 시간을 흘러 여행 전 주, 남자친구는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 입사 전 남은 것은 도쿄에서 즐겁게 노는 일뿐이었다. 남자친구는 이렇게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라며 무척 들떠했다.
그러나 여행 전날 남자친구와 나에게 가혹한 소식이 들려왔다. 여태껏 슈퍼항체(인 줄 알았던) 남자친구의 몸속에 코로나 균이 공평하게 행차해주신 것이다. 요즘은 누구나 코로나 한 번씩은 걸린다지만, 왜 하필 지금!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허무했다가 화가 났다가 감정이 날뛰었다. 남자친구 맞춤으로 열심히 준비한 (환불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지은 죄도 없이 풀 죽은 남자친구는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는 게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너지려는 멘탈을 붙잡고 고민했다. 혼자라도 가야 하나? 하지만 해외에 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해본 혼행이 세상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죽어도 혼행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 가기로 계획한 여행도 아니고, 모든 걸 2명을 위해 예약해둔 여행을 혼자 다녀온다니. 모두가 즐겁게 여행하는 도쿄에서 매 순간 그의 빈자리를 느끼며 우울해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행 하루 전날, 아무것도 환불받을 수 없는 여행을 포기하고 집에 누워있는다 한들 우울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슬퍼 울더라도 도쿄 이자카야에서 우는 게 좀 더 폼이 날 것 같았다.
문득 며칠 전 내가 도쿄에 간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던, 도쿄에 여러 번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에게 용기를 얻고자 전화를 걸었다. 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친구는 나를 위로해주었고, 도쿄는 안전하고 놀거리가 많기 때문에 혼자 여행을 가도 즐거울 거라고 얘기해줬다. 친구 덕분에 마음을 추스르던 와중, 갑자기 머릿속에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내일 나랑 도쿄 갈래…?”
내가 던진 말이지만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인터넷에 떠도는 ‘내일 나랑 말레이시아 갈래?’ 썰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친구는 INFP인 내가 던진 즉흥 제안을 덥석 받았다. 친구는 ENFP였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친구는 바로 다음날 도쿄행 비행기를 끊었다. 여권과 캐리어를 가지러 고향에 다녀왔고, 3차 접종을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오후에 바로 PCR 검사를 받았다. 저녁에 하는 2-3시간짜리 알바는 바로 재택으로 돌렸다. 남자친구는 (혼행의 지옥에 빠질 뻔한) 나를 구제해줘서 고맙다며 숙소와 티켓, 유심, 환전 등 미리 구매한 모든 것을 친구에게 무료로 양도했다. 여행 하루 전날 내 동행은 남자친구에서 친구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폭풍 같던 하루가 흐른 후 밤, 하루만에 너무 정신없는 일을 겪어서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씩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남자친구를 위한 여행이었는데 갑자기 남자친구가 빠져버리고 나니 이 여행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여행을 100% 즐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거기에 다음날 입국과 숙소 체크인까지의 먼 여정을 생각하니 더 아득해졌다. 처음으로 여행을 다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며 간신히 잠이 들었고, 도쿄 여행 첫날 아침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