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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현 Sep 23. 2024

큰딸 시아에게 들려주고 싶은 와인 이야기 10

피하고 싶은 그러나 만나게 되는

와인을 즐기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상황을 마주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야.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서 혼자 즐기는 상황을 더 좋아할 수도 있지만 ‘나 말고 다른 이들은 어떨까?’하는 호기심을 아예 떨쳐낼 수는 없지.


타인과 함께하는 상황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마주할 수 있는데, 유료 시음회 또는 와인 수입사가 홍보 목적으로 주최하는 무료 시음회 혹은 제대로 된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을 즐길 수 있는 와인 디너가 있어. 보다 적극적으로는 와인 동호회 형태의 정기적인 와인 애호가 모임도 있어.




혹시 snob (스놉)이라는 영어 단어 알고 있니? 아빠의 수준에 맞게 조악하게 번역해보면 ‘자신이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이라고 믿고, 고상한 취향만을 좋아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과 취향을 무시하는 사람 또는 그런 성향’이야. 다른 명사 뒤에 붙어서 ‘wine snob’, ‘classical music snob’과 같이 쓸 수 있어.


와인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아빠는 와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상황을 자주 만나는데, 얼마나 값지고 멋진 경험인지 몰라. 내가 그렇듯이 타인도 나의 취향을 궁금해하고 존중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하지만 이런 멋진 경험은 언제든지 쉽게 금이 갈수 있는 불안 요소를 안고 있는데, 바로 ‘스놉’ 때문이야.


스놉이 두렵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이유는 그 파괴력 때문이야. 딱 한 명이면 충분해. 이제까지의 즐겁고 자유롭고 솔직한 모임의 공기가 흩어져버리는데 까지는. 겉보기로 스놉을 사전에 구분하는 방법은 없어. 스놉에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구분이 없거든.
스놉은 자신의 와인 취향이 ‘고급’이라고 믿으며, 그 ‘고급스러움’을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주로 이런 식이야.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한 병에 수백만원이 넘는 와인을 자주 마신다’, ‘이런 고급 와인들을 빈티지 (와인을 만드는 포도를 수확한 연도) 별로 마셔봤다’, ‘어느 회장님 댁에 초대를 받아서 세상에 몇 병 남지 않은 귀하디 귀한 와인을 마셨다’ 등 주로 자신의 도장 깨기 식 ‘무용담’이야. 물론 이런 류의 무용담은 본인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을 거야. 자신의 와인 취향을 스스로 재확인하는 ‘자기 인증’ 역할도 할 것이고.




문제는 여럿이 함께 하는 와인 모임에서 스놉은 주로 자신의 무용담을 펼치느라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는 거야. 지금, 여기의 와인들은 덜 고급스러운지 마시다가도 곧 자신의 고급스러운 세계로 빠져들어. 이들은 또 와인 병 안에 든 것 (와인 자체를 마시는 경험) 보다는 그 주변의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여, 자신이 마신 와인의 맛이 어떠했는지, 어떤 경험과 자극을 느꼈는지는 말하지 않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스놉은 자리는 차지하지만 지금, 여기에 속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은 어이가 없고 맥이 풀려. 분위기는 일순간에 싸해지고. 최악의 경우, ‘스놉스러움’은 전염된다.


아빠는 시아가 스놉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면 좋겠다. 하지만 스놉이란 존재가 그렇다, 피하고 싶지만 만나게 되는. 스놉을 어쩔 도리 없이 만나버린 상황에서 (가령 와인 모임에서) 아빠의 대응 팁은 ‘둘러가지 말고 핵심으로 직진’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와인을 마시는 감각 경험에 집중하는 거야. 나의 느낌을 얘기하고 상대방은 어떠했는지 물어보는 거지. 스놉이라 생각했던 상대방과 교감과 대화가 이어지면 그 스놉은 시아 덕분에 ‘구원’ 된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시간 낭비 말고 자연스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 되.




중요한 게 한 가지 더 있어. 스놉에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고 했지. 우리가 스놉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거든. 그래서 준비한 ‘스놉 테스트’. 꼰대 테스트 비슷한 건데, 내 주변에 누가 와인 스놉인지, 언제 어느 자리에서 그 와인 스놉을 만났었는지 떠올려 보는 거야. 한 명, 두 명, 없어??? 주변에 아무도 떠오르지 않으면 바로 내가 누군가의 두렵고 피하고 싶은 스놉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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