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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작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고파요.”
고개를 돌리자, 흐릿한 나무 그늘 아래 웅크린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흙먼지 묻은 외투를 입은 작은 몸, 앙상한 손, 피곤하게 빛나는 눈동자. 하루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낮게 물었다.
“혹시… 먹을 거 필요하니?”
그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조차 멈춰 있던 세계에, 불쑥 낯선 기척이 스며들었다. 꽃들 사이로 치맛자락이 스치고, 검은 머리칼이 달빛처럼 흔들렸다. 붉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가 걸어 나왔다.
“입에 들어가는 건, 그 아이에겐 독이 될 수 있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러나 아이 쪽으로 내민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에 쌓인 흙먼지를 살짝 털어내고, 옷깃에 걸린 작은 꽃잎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저 아이의 몸은, 단백질을 적으로 여겨.”
하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백질이… 적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잠깐 떨렸지만, 곧 단단해졌다.
“이 아이는, 맛 하나에도 목숨을 걸어야 해. 달콤하든 쓰든, 한 번 잘못 들이면 돌아오지 못하거든.”
하루가 조심스레 물었다.
“… 당신은 누구죠?”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를 스쳤다.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라베아.”
잠시 뜸을 들인 뒤, 낮고 부드럽게 그러나 어딘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마을에선… 나를 ‘마녀’라 부르지.”
하루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맛 하나에도 목숨이 흔들리는 아이, 그리고 마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때 라베아가 시온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햇살이 조금 따갑지 않니? 시온”
시온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아이 손을 가볍게 잡아 바람이 부드럽게 스치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가자”
그녀는 등을 돌렸고, 시온은 하루를 한 번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배고픔과, 막 피어오르는 새싹 같은 작은 믿음이 섞여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물결처럼 흔들리더니, 입꼬리에 짧은 그림자 같은 미소가 스쳤다.
“그래서… 넌 정체가 뭐지?”
낮게 깔린 목소리는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하루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단어가 목구멍에서 걸려 나왔다.
“… 저는..”
말끝이 흐려진 순간, 이리안의 형체가 다시 고양이로 변하며 꼬리를 느긋하게 흔들었다. 하루의 머릿속으로 장난기 어린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레시피 순례자~”
하루는 눈을 찡그렸다.
“레시피… 뭐라고”
이리안이 툭 튀듯 대답했다.
“맛을 찾아 방랑하는 전설 덕후 집단!? 판타지 요리에선 이런 거 필수야. 안 그러면 금방 질린다고.”
꼬리가 하루 무릎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루는 황당하면서도 그 말이 은근히 마음에 남았다.
정적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 고요를 가르듯, 라베아가 천천히 하루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순간, 무게를 재는 듯한 그림자가 스쳤다.
“… 레시피 순례자라.”
낮고 짧은 말이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눈빛 속에 희미한 경계가 번졌지만, 곧 입가에 미묘한 곡선이 스쳤다. 그 표정이 의심인지, 흥미인지, 혹은 시험인지 알 수 없었다.
“흥… 너처럼 순한 얼굴을 한 사람일수록, 더 위험한 법이지.”
라베아의 목소리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하루는 그 말의 의미를 다 묻기도 전에, 그녀가 시온의 손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들의 뒷모습을 조용히 따라갔다. 봄빛이 어린 들판을 가로질러, 발밑에서 연둣빛 새싹이 스쳤다. 멀리서 달콤한 향이 스며들더니, 과자로 만든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자, 작은 난로 속 불씨가 봄꽃처럼 은근히 피어나고 있었고, 낡은 커튼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 라베아는 문턱에 흩어진 작은 신발들을 발끝으로 모아 한쪽에 밀어놓고, 안쪽 방을 향해 부드럽게 손짓했다.
안에는 시온까지 합해 다섯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작은 얼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어떤 아이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지만, 종이 위의 글자는 오래전부터 멈춰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장난감 숟가락을 이마에 얹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 숟가락 위로는 미세한 빛가루가 내려앉아 천천히 사라졌다.
방 안 공기 속에는 희미한 향이 맴돌았다. 꽃향기와도, 나무 냄새와도 닮았지만, 어쩐지 무게감 있는 냄새. 그 향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아이들의 웃음을 붙잡고, 그들이 깨어나려 할 때마다 조용히 다시 눌러놓는 듯했다. 창밖으론 봄빛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이 방 안만큼은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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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은 아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책을 누가 먼저 읽을지, 과자를 두 번 먹은 게 누구인지, 정말 사소하고 가벼운 다툼이었다. 라베아는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해골 등갈비’를 굽기 시작했다. 희미한 불빛이 출렁이듯 흔들리는 주방, 검은 연기가 서서히 문틈 사이로 스며 나왔다.
기름은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빨간색으로 일렁였고, 고기에서는 익숙한 듯하다가도 먼지가 섞인 듯 묵직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싸우면 다쳐. 그러니 오늘은 이걸 먹자...”
조용히 오븐 문을 열자, 살점이 사라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등갈비가 붉은 기운을 머금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말라붙은 짐승의 뼈, 혹은 숨을 죽이며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그림자 같았다.
아이들은 조용히 줄을 섰다. 누구도 웃지 않았고, 목소리조차 빛을 잃었다. 앞사람의 손만 바라본 채, 하나씩 등갈비를 받아 들었다. 고기는 따뜻했지만, 맛이 없었다. 향도, 감촉도, 온기마저도 없었다. 그것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삼켜야만 하는 조용한 형벌이었다.
라베아는 문턱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작은 어깨가 굽어 있고, 씹는 턱의 움직임은 기계처럼 느렸다. 눈동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손끝조차 힘이 빠져 있었다. 거기엔 분노도, 울음도, 환희도 없었다. 마치 모든 색이 씻겨 내려간 흑백의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라베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 이렇게 해야 다치지 않아. 그래, 이게 아이들을 지키는 길이야.’
그녀 스스로도 그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불씨가 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낮고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분노가 없어지니깐… 얼마나 행복해?”
그녀의 손끝은 익숙하게 움직였지만, 시선은 멀리 떠 있었다.
“시온, 네 몸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어. 쌓이면… 독이 되어 너를 잠재울 거야.”
시온은 잠시 숨을 고르고, 아주 작게 물었다.
“웃는 건 아껴야 한다고 한 것도… 다 그거 때문이에요?”
순간, 부엌의 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라베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생긴 등갈비를 시온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겉으론 똑같아 보였지만, 그 고기엔 푸른빛 액체가 스며 있었다. 루나가 단백질을 지워냈기에 시온은 삼킬 수 있었다.
푸른빛이 뼈마디 사이에 번져들며 잔잔히 일렁였다. 숨을 쉬는 듯한 그 빛이 잠시 라베아의 붉은 눈동자를 스쳤다가 곧 깊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지켜야 해… 설령, 그 아이가 평생 나를 원망한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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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베아는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다, 말없이 숲 속 뒷들로 향했다. 척박한 땅 위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었다. 가지에 매달린 열매들은 빛도 향도 없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따 손바닥 위에 올렸다. 허리춤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병을 꺼냈다. ‘루나’
몇 방울이 사과에 스며들자, 열매는 금세 윤기와 당도를 되찾았다. 모양도, 질감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여전히 색은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손끝으로 사과의 표면을 느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땅속 깊은 곳에서 오랜 잠을 자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 미묘한 떨림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공기 속엔 비 머금은 풀잎의 차가운 향과, 그 위에 살짝 겹쳐진 달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 향을 붙잡듯 낮게 주문을 속삭였다. 붉은빛이 사과 껍질에 천천히 스며들었고, 곧 선홍빛이 퍼져 나가며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완성됐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착색이 아니었다. 라베아가 부여한 것은 ‘색의 마법’. 겉으론 선명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빛은 아이들의 마음에 얇고 투명한 막을 덧씌웠다. 막은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지만, 그 안에서 진짜 감정의 떨림은 서서히 잠들어 갔다. 형태는 화려했고, 색은 완벽했다.
겉보기엔 평온했으나, 그 마법이 스며든 뒤로 아이들의 눈동자는 점점 빛을 잃었다. 웃음은 자취를 감추고, 목소리는 줄었으며, 무언가를 ‘맛본다’는 행위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다.
하루는 그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겉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빛을 매끈하게 반사하는 껍질, 물결처럼 부드러운 곡선, 기계가 찍어낸 듯 일정한 크기와 무게. 누가 보아도 ‘좋은 사과’였다.
그러나 그 완벽함 속에는 살아 있는 무언가의 숨결이 빠져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고, 차갑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공허했다.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다. 껍질이 얇게 부서지는 소리가 속삭이듯 번졌고, 과육은 부드럽게 씹혔다. 식감은 있었고, 모양은 정답에 가까웠다.
하지만 맛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혀끝에 닿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맛을 담기 위해 색을 입힌 것이 아니라, 그저 색을 흉내 내기 위해 빚어낸 모양일 뿐이었다. 눈길은 사로잡지만, 마음에는 단 한 줄기도 스며들지 않는 것.
하루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색이랑 똑같아. 사과에 써선 안 되는, 색소…”
그 순간, 한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색소들이 먹는 이의 표정과 움직임을 은근히 흐리게 만들던 때. 그 잔향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 열매는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그 빛은 인형의 눈동자처럼 기묘하게 뒤틀려 번뜩였다. 마치 스스로 숨을 쉬며 바라보는 것 같았다.
라베아는 아이들에게 종종 비밀을 흘리듯 속삭였다.
“저건 너무 기쁘거나, 너무 크게 웃을 때 자라는 열매란다.”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에 덧붙였다.
“많이 웃으면 위험해져. 그러니… 기쁨은 조심해야 해.”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주문처럼 아이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웃음은 조금만, 기쁨은 아주 살짝만. 그것이 이 집에서 어겨서는 안 되는 첫 번째 규칙이 되었다.
사과 하나를 똑, 따서 아이 앞에 내밀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네 속에 숨어 있던 화가 몽글몽글 사라지는 마법이란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라베아는 과육을 건네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씹으면 씹을수록, 화가 서서히 풀리거든.”
그 말에 아이들은 서로를 흘끔거리며 무서워하면서도 어쩐지 킥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아이가 조심스레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육이 눌리며, 마치 껍질 속에서 아주 작은 울음이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가 흘렀다.
곧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눈동자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그 변화는 놀람도, 짜증도 아니었다. 마치 빛이 스러진 숲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슬픔.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혀끝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마음 깊은 곳의 빈자리를 살짝 건드린 듯 공허함이 피어올라, 안개처럼 얼굴을 서서히 감싸 내려갔다.
라베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빨간 눈동자가 잔잔하게 반짝였고, 그 빛 속엔 연민도, 미소도, 계산도 뒤섞여 있었다.
마치 잘 자란 꽃잎을 확인하는 원예가처럼, 그녀는 속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 그래, 바로 이렇게.”
하루는 아이를 바라보다, 시선을 천천히 다른 아이들에게로 옮겼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럴듯한 색이나 모양이 아니라, 이 멈춰 있는 세계의 마법을 깨우는, 진짜 ‘맛’. 오직 그것만이 이들의 시간과 마음을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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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하나둘 방으로 흩어지고, 부엌에는 잠깐의 고요가 내려앉았다. 하루는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에 남겨진 사과를 바라봤다.
완벽하게 빛나지만, 온기가 사라진 껍질. 그 안에는 살아 있는 맛이 없었다.
‘정말 자연의 맛이란 게… 남아 있긴 한 걸까?’
창문 너머로 바람이 스쳤다. 은근한 흙내와 풀잎 향이 미묘하게 코끝에 닿았다. 하루는 그 향을 따라 오두막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에는, 라베아가 한때 손수 가꿨지만 ‘쓸모없다’며 거둬들이지 않은 작고 야생적인 텃밭이 있었다. 덩굴은 제멋대로 뻗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묵은 잎과 마른풀들이 엉켜 있었다.
하지만 그 무질서 속에서 단 하나, 은근히 붉은빛을 머금은 열매가 햇살을 받고 있었다. 토마토였다. 작고 단단한 표면이 손가락 끝에 닿자, 마치 작은 심장이 천천히 뛰는 것 같은 촉감이 전해졌다.
하루는 숨을 고르며 가지째 토마토를 따냈다. 오두막 옆 나무그늘에 앉아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왼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칼끝이 붉은 껍질을 살짝 눌렀다. 아주 작은 ‘툭’ 소리와 함께 얇은 껍질이 갈라졌다. 그 틈 사이로, 햇살을 녹여 만든 듯한 진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여름 한 조각이, 빛과 함께 숨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향은 부드럽고도 선명했다. 비 온 뒤의 흙내, 이른 새벽 풀잎 위 이슬, 그리고 달큰한 볕 냄새가 한꺼번에 번져왔다. 조금 낯선 각도였지만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칼끝이 껍질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찢어지는’ 소리가 아닌 ‘살짝 벗겨지는’ 감촉을 남겼다.
과육 속 투명한 즙이 고이 흘러나왔고, 단면에서는 잔잔한 단내가 피어올랐다. 하루는 손끝으로 즙을 찍어 입에 댔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단맛과 산미가 고르게 어우러진 맛. 눌려 있던 감각이 서서히 풀리며 깨어나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조각을 더 얇게 썰었다. 투명한 물기를 머금은 씨앗들이 가지런히 박혀 있었고, 씹는 순간 작은 파열이 났다.
그건 아주 작지만 분명한 ‘맛’이었다. 과육은 유리처럼 빛났고, 씨앗들은 작은 별무리처럼 반짝이며 붉은 속살 안에 은하수를 그려냈다.
하루는 잠시 칼을 멈추고 그 반짝임에 눈을 빼앗겼다.
“안에… 작은 계절이 숨 쉬고 있어.”
그 순간, 옅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토마토 향을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 향은 마치 누군가의 웃음처럼 가볍게 날아가, 오두막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바로 그때, 등 뒤 공기가 고양이 꼬리로 살짝 툭 건드린 듯 부드럽게 흔들렸다. 빛도 그림자도 없는 틈에서, 고양이가 다시 사람으로 변한 이리안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붉은 열매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 그러나 눈빛 어딘가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하루는 놀라지 않았고, 이리안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가 자른 토마토 조각을 한참 바라보다가, 슬며시 옆에 앉아 손을 뻗었다.
“이거… 먹어도 내가 토마토 요정이 되는 건 아니지?”
장난 섞인 작은 목소리. 하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토마토 요정?..”
이리안은 조심스럽게 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씹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 음, 위험하네.”
하루가 눈을 찡그렸다.
“왜?”
“이건… 계속 생각나잖아.”
그 말은 장난처럼 들렸지만, 오래 묵은 진심이 묻어 있었다. 마치 잊고 있던 계절의 한 조각이 혀끝에 스며든 듯.
그러다 이리안은 씨앗 몇 알을 손끝에 모았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하루 몰래 오두막 옆 흙을 살짝 파고 툭 떨어뜨렸다.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흙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자라라, 작은 붉은 별아… 내가 다시 와서 먹어줄게.”
하루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 먹으려고 심는 거야?”
이리안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세상에 제일 맛있는 건, 내가 기다린 열매거든.”
둘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남은 토마토를 바라보았다. 햇살은 여전히 잎사귀 틈새를 타고 내려와, 붉은 단면 위에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리안은 남은 토마토 조각에서 씨앗 하나를 집어 들더니, 아무 말 없이 손바닥에 올렸다가 오두막 옆 흙 위에 살짝 묻었다.
손끝이 흙을 다독이자, 바람이 스치듯 아주 옅은 붉은빛이 번졌다. 아직 꽃도 잎도 없었지만, 땅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가만히 숨을 쉬는 듯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마치 그 씨앗은, 언젠가 웃음과 함께만 열릴 것처럼.
그때였다. 바람이 한순간, 마치 다른 계절로 바뀐 듯 미묘하게 뒤집혔다. 텃밭 가장자리, 나무들 사이에서 이어지던 짧은 발소리가 ‘툭’ 하고 끊겼다.
하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늘진 담장 아래, 라베아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빛과 그림자 사이에 스며든 그림자 같은 존재.
그녀의 붉은 눈은 토마토를 향해 있었다. 감정이라 부를 수 없는 고요한 빛. 그러나 그 깊은 곳엔, 금이 간 수정처럼 아주 미세한 흔들림이 번졌다.
입술은 닫힌 채, 말 한마디 없었다. 질책도, 호기심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침묵. 대신 등 뒤에서 스르르 퍼져오는 기척이 마치 얇은 안개처럼 하루와 이리안을 감쌌다.
그녀의 손끝이 소매를 살짝 움켜쥐는 순간, 토마토 단면 위에 내리던 햇살이 기묘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라베아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리안도, 하루도 그 뒷모습을 붙잡지 않았다. 다만 붉은 토마토의 단면 위로만, 여름의 빛이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그날 저녁, 식탁 위엔 사과 대신 낯선 붉은빛이 놓였다. 조심스럽게 썰린 토마토 조각 몇 개. 그 붉음은 사과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빛이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손을 내밀어 입에 넣는 순간,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히 웃었다.
“맛있어…”
그 한마디가 마치 주문처럼 번졌다. 다른 아이들의 손이 조심스레 따라갔고, 작은 씹는 소리가 방 안에 잎맥처럼 얇게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씹다 말고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뜨거워…” 하고 속삭였다. 사실 뜨겁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온기가 혀끝에서 퍼진 탓이었다.
또 다른 아이는 웃다가,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스스로도 이유를 몰라 눈을 비볐지만, 입가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앉은 작은 아이는 조각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마치 비밀을 감추듯 조용히 씹었다. 하지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작은 숨결에는 오래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 작은 반응들이 이어지며, 미묘한 온기가 공기 속에 피어올랐다. 설명도, 말도 필요 없었다. 그건 오직 ‘맛’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묵직한 공기가 방 안을 눌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바람이 멎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라베아였다.
문득,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토마토 조각 위에 고정됐다. 무언가를 찢어내는 듯한 고요가, 아이들의 작은 손가락 끝까지 얼어붙게 했다.
“안 돼.”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아이들이 움찔하며 손을 거뒀다. 그러나 입 안에 들어간 조각만큼은 삼켜버린 뒤였다. 아주 작은 단맛이, 미세한 붉은빛이,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번지고 있었다.
“라베아 선생님…”
아이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토마토 조각 하나를 들어 올렸다. 빛이 닿는 순간, 붉은 단면은 마치 심장처럼 미세하게 뛰는 듯 보였다.
그녀는 이를 꾹 눌러 쥐며 입술을 떨었다.
“…그 맛은, 위험해.”
하루가 입을 열려했으나, 라베아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그건 웃음도, 눈물도 하지만… 남는 건 곧 상처가 돼.”
아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맛있어요...”
침묵이 이어졌다. 긴장한 공기가 방 안에 매달린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도 아이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라베아는 그 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것들…”
그러나 그 말 끝에는, 오래된 금이 부서지는 듯한 가벼운 떨림이 스며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오두막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아이들은 잠들었고, 하루는 불 꺼진 부엌 한편에 앉아 있었다.
라베아는 창가에 홀로 서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둔 마지막 토마토 조각은 이미 힘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 속에선 여전히 붉은빛이 꺼지지 않았다. 그 빛은 분노도, 슬픔도, 미련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갈증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 나는 아이들을 지켜야 해. 지켜야만 해.”
그러나 그 순간, 아이들의 웃음이 다시 귓가를 두드렸다. 마치 오래 잠겨 있던 감정의 문틈이, 아주 조금이나마 벌어지는 듯했다.
라베아는 그 문틈을 애써 닫듯 손끝을 움켜쥐었다. 붉은 눈빛 속에서, 갈라진 금이 한순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