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는 외우는 색, 자연은 계절의 색

by 현상이지



라베아는 홀로 부엌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엔 하루가 남겨둔 마지막 토마토 조각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과육을 스치자, 서늘한 물기가 손끝으로 번졌다. 가볍게 눌린 껍질이 숨을 내쉬듯 갈라지며, 투명한 즙방울이 맺혔다. 그 감촉 앞에서 그녀의 손이 잠시 멈췄다.


마치 오래전, 반죽을 빚던 시절의 돌처럼 단단한 무게와 겨울 새벽의 냉기가 겹쳐 스며드는 듯했다.

조각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안에는 단순한 빨강이 아니었다.


한때 그녀가 멀리 밀어낸 것이 잔잔한 빛처럼 고여 있었다. 입술 가까이 토마토를 가져가자,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입 안에 번진 즙은 크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닫혀 있던 감각의 문을 누군가 노크하듯 부드럽게 두드렸다. 아무도 보지 않는 부엌 한가운데서, 라베아는 처음으로 오래 잊었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건 ‘느끼는’ 얼굴이었다.


어릴 적, 마법을 가르쳐준 스승이 생각났다.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했다.


스승은 언제나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마법은, 누군가가 먹고 웃을 때 완성되는 거란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사과 껍질을 얇게 깎아 설탕과 계피를 살짝 뿌리고, 빵 반죽 속에 붉은 사과 조각을 감춰 굽곤 했다.


라베아는 오븐 앞에 앉아 물었다.

“왜 꼭 사과예요? 딸기가 더 달잖아요.”


스승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달기만 한 건 금방 질리지. 사과는… 한 번 더 씹게 하거든.”


그 순간, 그녀는 이유를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생애 처음으로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상한 확신이 스며든 순간이었다. 그 시절의 색은 진짜였고, 사과 단면 속 붉음은 감정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현재의 라베아.


찬장 앞에 서서, 사과를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작게 속삭였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 목소리는 부드러운 먼지처럼 공기 속에 스며들다 곧 사라졌다.

“느끼지 않으면, 다치지 않아. 흉내 내면… 무너지지 않아.”


그 믿음이 그녀를 ‘색소의 오두막’ 속에 가두었다. 그 선택은 오랫동안, 부엌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지배했다. 그러나 지금 작은 붉은 토마토 한 조각이 그 오래된 색을 서서히 벗겨내고 있었다.


마치 봉인을 풀어내는 첫 빛처럼. 그 순간, 토마토에서 은근히 퍼져 나온 향이 부엌의 공기를 조용히 흔들었다.



사라진 마녀의 오두막은, 이상하리만치 숨죽은 기운에 잠겨 있었다. 언제나 새벽이면 가장 먼저 주방에 불을 밝히고, 작은 주전자 속 물을 데우던 라베아의 그림자가 없었다. 사라진 공간은, 마치 음식이 아니라 ‘온기’를 기다리는 그릇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 중 가장 먼저 그 기척의 변화를 알아챈 건 시온이었다. 부엌 입구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폈다.

“선생님… 오늘은 불을 안 켜셨어요.”


뒤이어 들어온 아이들도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겼다. 불은 꺼져 있었고, 냄비 속은 비어 있었다. 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닐까?”

“말도 없이 떠나시진 않으실 텐데…”


속삭임이 주방 안에 서서히 번져 가던 그때, 하루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부엌 한쪽, 언제나 라베아만이 열 수 있던 작은 찬장 앞에 멈춰 섰다.


이상하게도 굳게 잠겨 있던 그 문이, 지금은 마치 안쪽에서 누군가 살짝 밀어낸 듯 틈새를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그 틈에서 희미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토마토와도, 사과와도 다른 오래 묻혀 있던 계절의 냄새였다.


문을 천천히 밀자, 오래 잠겨 있던 공간에서 살짝 가라앉은 먼지와 함께 붉은빛이 번졌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 쪽지가 놓여 있었다.


종이의 가장자리엔 토마토 껍질처럼 바랜 빛이 맴돌았고,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미세한 온기가 새어 나왔다.


하루는 그 종이를 조심스레 펼쳤다. 짧고 단정한 필체. 마치 마법진의 한 줄처럼 또렷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의 색을 찾아보려 해. 그동안… 아이들을 부탁해. —라베아”


하루가 고개를 들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루에게 꽂혔다. 걱정과 의문, 그리고 알 수 없는 작은 기대가 그 눈동자 속에서 얽혀 있었다.

“선생님… 가신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두고 어디 간 거예요?”


작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떨궜고, 누군가는 괜히 장난감 상자를 열었다 닫았다.


그 작은 동작마다 불안이 손끝에 내려앉았다.

“…모르겠어.”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아이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오늘 밥은 누가 해요…?”


하루는 잠시 웃었다. 작고, 그러나 흔들림 없는 웃음이었다.

“오늘은… 내가 해볼게.”


하루는 식탁 위의 토마토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껍질 사이로 번져가는 붉은 결, 어쩌면 그 색은 라베아가 남긴 마지막 주문일지도 몰랐다.



빨강 하나만 남은 날, 오두막 부엌은 마치 오래된 그림 속처럼 고요했다. 찬장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치즈도, 채소도, 파프리카도 전부 사라지고, 남아 있는 건 하얀 밀가루 반죽과 라베아가 남긴 마지막 몇 개의 토마토뿐이었다.


하루는 아이들 앞에 서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오늘은 피자를 만들 거야. 하지만 색은 단 하나뿐이야. 이 빨강 하나로… 우리만의 피자를 만들어보자.”


아이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치 작은 비밀을 공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에는 둥글게 빚은 반죽들이 눈처럼 하얀 빛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말랑하고 창백한 도우, 아직 어떤 색도 머금지 않은 상태.

하루가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덧입히지 않은 마음. 하지만 이제 우리가, 거기에 하나의 색을 입혀줄 거야.”


하루는 토마토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햇빛을 머금어 익은 토마토들이, 마치 속삭이듯 붉은빛을 품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바닥 위에 토마토를 하나씩 올려주었다. 말캉한 감촉, 살짝 미끄러지는 껍질, 씨앗이 ‘톡’ 하고 터지는 순간의 작고 반짝이는 소리.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색소는 예쁘지만, 마음을 담을 수는 없어.”


하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색소는 외우는 색이고, 자연은… 계절이 빚는 색이니까.”


아이들은 토마토를 손으로 으깨고, 따뜻한 즙을 모아 작은 냄비에 부었다. 천천히 저을 때, 부엌 안에는 달콤하면서도 살짝 시큼한 향이 마법처럼 번져나갔다.


작은 손들이 하얀 반죽 위에 붉은 소스를 펴기 시작했다. 붓 대신 숟가락을 쥔 아이들이 조심스레 원을 그리며 색을 입혀 나갔다.

“선생님, 오늘의 빨강은… 사랑이에요?”


시온의 물음에 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빨강은 ‘따뜻함’이야. 태양 아래에서 익은 토마토가 품은 온기.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기분이 담긴 색.”


아이들은 그 말을 가만히 마음속에 두고, 각자의 손끝으로 조용히 피자를 완성해 갔다. 올릴 재료는 없었지만, 모양은 조금씩 달랐다. 표현은 말이 아닌 손끝의 움직임에 담겨 있었다.


피자는 오븐 속으로 들어갔다.

‘틱’—온도를 맞추는 작은 소리.


열이 번져가며, 붉은 소스가 도우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븐 유리창 너머에서 반죽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붉은 빛이 가장자리까지 번져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색이 불빛 속에서 깨어나 다시 한 번 세상에 숨을 불어넣는 듯했다.


오븐에서 막 꺼낸 피자 조각을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나눠 들었다. 가장자리는 노릇하게 빛났고, 손수 으깬 토마토 소스는 붉은 물결처럼 반죽 위에 번져 있었다.


단순한 재료였지만, 그 위엔 태양 아래서 익은 색과 손끝에서 태어난 모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눈빛 속엔, 처음 맛보는 계절을 앞에 둔 듯한 설렘이 스쳤다.


하루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먹어, 뜨거우니까.”


하루의 목소리는 피자 위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가볍게 번졌다.


시온도 작은 손으로 피자 한 조각을 들고 있었다. 토마토 향이 미묘하게 그의 코끝을 스쳤고, 붉은 소스 위에서 작은 빛이 깜빡이는 듯했다. 태양빛을 머금은 토마토와 손수 만든 붉은 소스가, 마음 한구석을 묘하게 풀어놓은 듯했다.


하루는 조심스럽게 피자를 한 입 베어 문 시온을 바라봤다.


순간, “시온?” 하루가 작게 불렀다.


시온의 손에서 피자 조각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마치 색이 빠져나가듯, 붉은 소스가 바닥에 번졌다.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의자 위에서 힘없이 흘러내렸다.


“시온!”


하루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작은 어깨는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입술은 눈앞에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방 안의 온기가 빠져나가자, 붉은 색만 남은 피자 조각이 바닥에서 조용히 식어갔다. 아이들도 숟가락을 놓고 불안한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왜… 왜 이러지? 시온, 들려? 괜찮아?”


하루는 시온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하지만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얕은 숨을 토하며, 눈꺼풀만 작은 날갯짓처럼 떨고 있었다.

“선생님… 시온이 아픈 거예요?”


아이들이 주위를 에워싸며 속삭였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하루의 머릿속에 오래된 경고가 번개처럼 스쳤다. 고기만이 아니었다. 하얀 도우 속에도, 시온이 견딜 수 없는 ‘단백질’이 숨어 있었다.


토마토 소스는 안전했지만, 빵의 하얀 속살이 시온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하루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색을 생각했고, 맛을 생각했지만 정작 ‘몸’을 잊고 있었다.

“시온을 조심히 눕혀줘…”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했지만, 손끝은 떨렸다.

“베개랑 물… 그리고 얼음물도 가져와줘.”


붉은 소스가 묻은 시온의 손끝이, 서서히 창백하게 바래갔다. 마치 온 세상의 색이 그 작은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했다. 숨결은 점점 얕아졌고, 피부는 새벽 물가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시온, 나야. 하루야. 들려?”


하루는 시온의 손을 꼭 쥐었다.

“미안해… 그건 생각하지 못했어. 토마토는 괜찮을 거라 믿었는데… 도우 속 하얀 결에, 네 몸이 풀 수 없는 성분이 숨어 있었어. 내가… 잊고 있었어.”


시온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입술이 작게 열리고, 숨이 섞인 소리가 흘렀다.

“…토마토… 여름 같았어요.”


하루는 숨을 삼켰다.

그건 고통 속에서도 놓치지 않은, 한 조각의 계절 같은 말이었다.

“지금은 말하지 마. 곧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나, 라베아 선생님..!”


기억이 칼날처럼 스쳤다. 라베아의 마지막 편지, ‘자연의 색을 찾겠다’는 글씨.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사라진 약병.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하루의 손을 되쥐었다. 마치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작은 신호처럼.


주방은 고요했지만, 식탁 위엔 여전히 토마토 피자의 붉은빛이 남아 있었다. 그 색은 점점 더 깊어져, 마치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대신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그날 저녁, 폐쇄된 부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이제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공간.


한때는 연구와 실험의 불빛이 깃들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마법을 버린 그림자처럼 깊이 잠든 채 잊혀 있었다.


벽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얽히고, 축축한 공기가 숨죽이며 웅크려 있었다.


라베아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작은 낡은 상자가 안겨 있었다. 오래된 시간의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아, 마치 숨을 죽인 껍질처럼.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는 오래전 그녀가 마법으로 빚어낸 빨간 색소가 있었다. 감정이라는 이름을 빌려 조작했던 색. 라베아는 손끝으로 그 병을 들어 올렸다. 그 손길은 용서를 구하는 듯했고, 동시에 죄를 고백하는 듯했다.

“이 색으로 마음을 흉내 냈지. 사랑, 그리고 아이들의 세계를 외운 색으로 덮었어. 느끼는 대신, 암기하게 만들었지.”


그녀의 목소리는 병 속의 색보다도 더 깊고 오래된 그림자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붉은색은 맑지 않았다. 화사하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탁하고 피로하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감정처럼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예뻤지… 한때는. 하지만 감정을 담기엔 너무 비어 있었어. 이건 마법이 아니야…”


그녀는 주저 없이 유리병을 기울였다. 탁한 물빛이 배수구로 흘러내리며, 쇳물처럼 한 줄기 소리를 남겼다. 함께, 오랜 세월 가슴 깊이 눌러두었던 잘못과 회피, 그리고 두려움의 잔향이 조용히 사라져갔다.


상자 안에는 이제 단 하나. 작고 투명한 병.


그 안에서 푸른빛이 숨을 쉬듯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루나…”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손에 들었다. 빛이 닿자, 액체 표면이 미세한 파문을 그리며 흔들렸다.

“너만은… 버릴 수가 없었어.”


그건 중독이자 억제였다. 단 한 방울로도 아이들의 미각을 지우고, 심장을 잠재우며, 웃음을 봉인하던 푸른 마법. 마치 깊은 바다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끝없는 고요를 품은 물처럼.


라베아는 손끝으로 찬장의 문을 밀었다. 오래된 나무가 낮게 삐걱이며 열렸다. 마치 오랜 세월 숨을 참아온 생명체처럼 고요히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꺼내 나무 위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우유였는데.”


그러나 그 안은 더 이상 액체가 아니었다.


시간이 그 안의 모든 숨결을 응고시켜 놓고 있었다. 표면은 창백하고 촉촉하며, 은은한 향이 서서히 부엌을 채워 나갔다.

“치즈가 됐네…”


그녀는 나직하게 웃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알아서 굳혀줬어.”


겉은 묵직하고 짙은 향으로 세월을 품었고, 중심은 단단히 굳어 흔들림이 없었으며, 속살은 부드럽고 여전히 숨을 쉬듯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치즈 위를 천천히 따라갔다. 마치 시간과 맛이 서로 속삭이며 만들어낸 작은 마법의 지형도를 바라보는 듯.

“시간의 무게를 버텨낸 마음… 상처를 입고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감정.”


가장 바깥에는 진한 노란빛과 묵직한 향을 품은 껍질이 감싸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이야기가 농축돼 있어. 한입에 전할 수 없고… 오래 씹어야 드러나는 진짜 마음이지.”


작은 병 ‘루나’를 한 방울씩 천천히 떨어뜨렸다. 푸른 액체는 이내 사라졌지만, 표면에는 은은한 빛결이 감돌았다. 숨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을 억제하는 게 아니야… 진짜 마법은, 말없이 스며드는 맛 속에 있어.”


그리고,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 다시 한 번 읊조렸다.

“입안에서 조용히 녹아들 때… 그때 비로소 진짜가 돼.”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 처음으로 빚어낸…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진심이었다.

“숨기지 않았어…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고… 그저 느끼게 하고 싶었어.”


목소리는 점점 느려졌고, 가슴속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서서히 흔들렸다. 그 돌은 아직도 물처럼 녹지 않았고, 그 무게는 한 단어로 응고되었다.

“…그 아이들… 날 용서해줄까…”


그 말은 입안에서 쓴맛처럼 맴돌았다.

‘너희를 가두었지. 너희를 느끼지 못하게 했지…’


그때였다. 부엌 한쪽에서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 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 털에 달빛이 스며, 마치 부엌 안의 또 다른 마법처럼 반짝였다.


라베아는 시선을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는 꼬리를 한 번 휘두르더니, 가벼운 점프로 부엌 위에 올라와 치즈 그릇을 슬쩍 들여다봤다.

“손— 아니, 발 대지 마.”


라베아의 차분한 경고에 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물러났다.


잠시 후, 다시 발이 슬금슬금 치즈 가장자리에 닿으려 하자, 이번엔 라베아가 냉큼 그릇을 치웠다. 부엌에는 치즈 향과 함께, 오랜만에 작지만 가벼운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쾅!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낡은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곳은 원래 식재료 폐기장을 가리키는 문이었다. 창고와 쓰레기장이 함께 붙어 있었고, ‘부엌 뒤편’이라 불렸지만 사실상 잊힌 공간이었다.


라베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먼지 낀 문 사이로 이리안이 고양이 모습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하루, 여기야. 부엌 뒤편에 있어.”


어쩐지 장난기 한 줄이 묻어 있었다.


곧이어 헐레벌떡 달려온 하루가 문 앞에 섰다. 뺨은 달아올라 있었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선생님…!”


하루의 목소리는 떨렸고,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라베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하루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시온이 쓰러졌습니다… 갑자기 숨을 못 쉬어요. 얼굴도 창백하고…”


라베아의 손끝에서 그릇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뭐라고?”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자책과 슬픔으로 가라앉아 있던 얼굴이 단숨에 긴장으로 굳어졌다.

“어디서, 언제부터 그랬는데?”


하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 속엔 공포가 뚜렷하게 일렁였다.


라베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경고가 번개처럼 스쳤다.

‘시온…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발끝이 부엌의 그림자를 가르자, 바닥 위에 얽혀 있던 어두운 기운이 찢겨 나갔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걸음에는 더 이상 주저가 없었다.

“하루, 앞장서.”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마치 오래전 봉인에서 풀린 주문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요리... 네가 했니?”


하루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그런데 재료가 부족해서… 그냥 빵에 토마토 소스만 얹어서 구웠어요. 그 안에… 단백질이 있는 줄은…”


목소리는 죄책감에 젖어 떨렸고, 말끝은 무겁게 바닥에 떨어졌다.


라베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은 분노도, 질책도 아니었다. 마치 오래전 자신이 만든 잘못이 또다시 그림자처럼 돌아온 것을 알아본 듯한, 깊은 파문의 떨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굴 탓할 시간도, 후회할 틈도 없었다.

“됐어. 지금은 시온부터 봐야 해.”


두 사람은 함께 어둠을 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달빛이 길 위에 발걸음이 쓸듯 지나갔다. 부엌의 문이 덜컥 닫히자, 마치 오래된 주방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첫 번째 맛이 지금, 더 절실한 순간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두막 안은 깊은 저녁.


그 빛 속에,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작고 또렷한 빛이 일렁였다.

“선생님…”


시온의 목소리는 작고 조금 떨렸지만, 안에 담긴 의지는 선명했다.

“이거… 조금만 먹어도 돼요?”


라베아는 순간, 숨이 멈춘 듯 말을 잃었다. 시온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위엔 얇은 담요가 조심스레 내려앉아 있었다.

“당연하지, 시온아.”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눈과 눈이 같은 높이에서 마주 닿았다. 그녀는 고백했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시온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믿어볼게요…선생님이 처음으로 만든, 진짜 마법이니까요.”


그 말에, 라베아는 손을 떨며 치즈 조각을 조심스럽게 잘랐다. 표면에 희미하게 번진 푸른빛. 이제 그것은 억제의 잔재가 아니라, 감정을 품은 무늬였다.


그녀는 조각을 시온의 손에 올려주었다. 한 입 먹는 순간, 입 안에서 치즈가 부드럽게 녹으며 묘한 단맛과 미세한 짠맛, 그리고 아주 은은하게 맴도는 풍미가 퍼졌다.

“…마치… 햇빛이 입안에서 녹는 것 같아요.”


시온은 눈을 감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오래 굳어 있던 얼음을 깨는 소리처럼 분명했다. 라베아의 어깨가 조용히 떨렸다.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지만, 그 자리엔 분명 감정이 있었다.


하루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레시피 순례자라더니… 이제야 뭔가 순례 시작 같은 느낌이네.”


그 말에 아이들 사이에서 킥, 하고 작은 웃음이 흘렀다. 무거웠던 공기가 살짝 풀린 바로 그 순간—


“흐음~”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리안이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와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았다. 입가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나도 한 입만 주면 안 돼? 아니, ‘진짜 마법’이라면서~ 나 빼고 먹으면 서운하잖아.”


라베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리안을 바라봤다.

“너, 아까 부엌에서 몰래 먹으려다 내가 잡은 거… 기억 안 나?”

“그건… 치즈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만…”


이리안은 고개를 긁적이며 슬쩍 웃었다. 그 웃음 속엔 고양이 같은 장난기와, 미묘하게 감춰둔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시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라베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숨 끝엔 알 수 없는 부드러운 온기가 묻어났다.

“알았어. 하지만 이번엔 아주 작은 조각만. 그리고… 네가 설거지해.”

“네~”


이리안은 치즈 조각을 받아 들고,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치즈의 표면에서는 은은한 노란빛이 흘렀고, 그 안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향이 살짝 피어올랐다.


천천히 한입 베어 물었다.


순간, 부엌의 공기가 달라졌다. 치즈가 녹으며 퍼지는 부드러운 단맛, 아주 미세한 짠맛, 그리고 깊은 곳에서 깜박이는 푸른빛의 기운이 공기 속에 섞였다.


그 향이 식탁 위에 내려앉자, 부엌은 다시 따뜻해졌다. 마법은, 그렇게 웃음과 함께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라베아의 숨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이들은… 거짓보다 진실을 좋아하더라.”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사탕을 굴리며 ‘행복해요’라고 말하던 맑은 목소리들이 조용히 깨어났다. 초콜릿을 입에 물고 웃던 작은 입술들이, 마치 오래전 흩어진 별빛처럼 하나씩 마음속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두막을 둘러보며, 남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 중 그 누구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로 돌아온 걸까. 아니면 그저 잠시 머물다 사라질 바람일까.


라베아는 문가에 서서, 비워진 식탁과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달빛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그 빛을 등에 지고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 걸렸지.”


그 목소리는 마치 무너진 다리를 다시 놓는 듯,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히 건넸다. 예전보다 낮았고,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꾹 눌러 꺼내는 음성이었다.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조용히 한곳으로 모였다.


하얀 천으로 덮인 접시.

“이건… 처음으로 내가 만든 치즈야.”


그녀는 천천히, 접시 위에는 노란빛과 흰빛이 겹겹이 스민 치즈가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잔잔하게 흔들렸고, 한 손은 자신도 모르게 소매 끝을 움켜쥐고 있었다.

“애들아… 나, 너희를 속였어. 가르치는 척하면서… 사실은 느끼지 못하게 막았어.”


말이 끝나자, 공기 속에서 부드러운 정적이 가라앉았다. 아이들 사이로 무형의 파문이 퍼져나갔다.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베아가 요리에 색을 입히며 감정을 통제하려 했다는 걸. 그것이 진짜 맛이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이들의 곁에 있으려 했던 마음만큼은 가짜가 아니었다는 걸.


붉은색 색소도, 번쩍이는 장식도 없는 오직 우유가 오랜 시간을 견디며 스스로 응고해낸 정직한 치즈, 가볍게 익힌 토마토 한 조각, 그리고 새벽의 이슬처럼 숨을 쉬는 갓 딴 잎채소. 라베아는 손끝으로 접시를 살짝 돌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은… 진짜 색으로 먹자.”


라베아의 말이 끝나자, 부엌 안은 깊은 정적에 잠겼다. 아이들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미묘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그 떨림은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기대,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이 얽혀 있었다.


라베아는 떨리는 손으로 치즈를 조금 잘라 접시에 올려두었다. 아주 단순한 한 조각.


그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하얀 천 조각을 놓칠 뻔했다. 입술은 미소를 그리려 했지만 곧 금세 굳어졌다.


아이들 앞에 내밀자, 눈길은 아이들을 향했지만 시선이 자꾸만 접시 가장자리로 흘러내렸다. 숨을 내쉬는 호흡마저 들킬까 두려운 듯 얕고 짧았다.


그것은 그동안의 거짓된 색과는 달랐다. 시간과 감정이 켜켜이 응고된, 오직 진짜 맛의 조각이었다.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동안, 라베아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혹시라도 그 작은 손길이 자신을 거부할까, 마음속에서 오래 눌러둔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한 아이가 치즈 조각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맛이 공기와 어울려 퍼졌다. 거짓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이 전해주는 맛이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오래 씹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마치 세상에서 처음 무언가를 본 듯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아이는 치즈를 삼키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려 했지만, 입꼬리가 떨리더니 곧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지만, 그 표정은 오래 굳어 있던 무언가가 풀려나오는 듯 보였다.


구석에 앉은 작은 아이는 치즈 조각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는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다 이내 멈췄다. 그 작은 떨림은, 오래 묶여 있던 마음이 비밀스럽게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손을 뻗었다. 작은 조각들이 입안에서 녹으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라베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어깨는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알았다. 이건 화려한 마법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덮는 주문도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그리고 진심이 만들어낸 조용한 기적이었다.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거짓으로 가르치지 않겠다고. 그리고 아이들의 곁에 서 있겠다고.


아이들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부엌은 달라져 있었다. 불은 켜지지 않았지만, 따뜻한 공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온기 속에서, 오두막은 더 이상 색만 입힌 집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다시 맛을 느낄 수 있는, 진짜 오두막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식사에 손을 댔다. 이전처럼 우르르 달려들지 않았다.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마저 조용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아는 눈빛으로,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오래 씹고, 조심스럽게 삼켰다.


그건 처음으로 모두가 감정을 알고 먹는 식사였다. ‘먹는다는 것’이 다시 살아가는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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