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벽에 새겨진 마음

by 현상이지



식사가 끝난 뒤, 아이들이 그릇을 정리하러 부엌 쪽으로 옮겨간 사이, 라베아는 천천히 탁자에 앉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하루가 다가와 그녀 옆에 살짝 앉았다.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전… 언젠가 선생님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라베아는 고개를 돌려 하루를 바라봤다.

“나도 몰랐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왜 떠났어요?”


조심스러운 질문. 그러나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게… 내가 아이들을 아프게 했다는 걸 알았거든. 너무 두려웠어.”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이렇게 덧붙였다.

“음식을 먹는 건,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만큼, 감정도 같이 씹어야 하니까요. 근데 이제… 먹을 준비가 된 것 같아요.”


라베아는 손을 모아 탁자 아래에 두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입가에는 아주 작고 분명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나도 이제, 다시 만들 준비가 된 것 같아.”


하루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식은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가 쪽에서 시온이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섞이지 못한 채, 마치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사람처럼. 그 눈빛을 알아챈 라베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주변을 정리했다. 하루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하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을 보탰다.

“그래, 시온아. 우리 같이 잠깐 걸을까?”


시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은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작은 정원 가장자리, 수풀 사이에 놓인 벤치 위로 둘은 나란히 앉았다.


어느 쪽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서로의 망설임을 존중해주는 조용한 여백이었다.


잠시 후, 조용히 옆에서 입을 뗀 건 하루였다.

“시온아…”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처럼 낮고 부드러웠다.

“너 쓰러졌을 때. 토마토 소스만 신경 쓰다가, 빵에도 단백질이 있다는 걸 잊어버렸어...”


그는 손에 쥔 작은 돌멩이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미안해. 정말, 진심으로.”


그 말에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듯 손을 맞잡고 있던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게, 천천히 말했다.

“…근데, 나도 아무 말 안 했어요.”


하루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시온은 말없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작게 웃었다.

“그날, 저도 알고 있었어요. 빵에 단백질이 있다는 거. 근데 그냥… 선생님이 만들어 준 거라서 그냥, 먹고 싶었어요.”


시온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 눈엔 후회나 원망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솔직한 마음만이 들어 있었다.

“식탁에서… 다 같이 웃고 있었잖아요. 토마토 냄새도 좋았고 선생님이 그려준 햇살 모양도 예뻤어요.”

“…햇살 모양?”


하루는 놀라듯 되물었다. 시온은 조금 웃으며 말했다.

“토마토 소스 가운데 선생님이 숟가락으로 동그랗게 퍼주셨잖아요. 그거, 햇살처럼 보여서… 그냥 다 같이 있는 게 좋았어요.”


하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볍게 저은 숟가락 자국이, 누군가에겐 햇살로 남아 있었다니.


가슴 안쪽이 조금 저릿했다. 실수였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누군가에게는 그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야 알아버렸다.

“…그랬구나.”


그 말은 어떤 위로보다도 더 무거웠고, 어떤 칭찬보다도 더 따뜻했다. 하루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시온아.”


벤치 위, 둘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어지고 있었다. 그날의 해는 천천히 저물었지만, 둘 사이엔 조용한 햇살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햇살은 두 사람의 마음속에 아주 오래도록 따뜻하게 머물렀다.


그때 시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생님.”


하루가 고개를 돌리자, 시온은 조금 망설이다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선생님 별명 하나 지었어요.”


뜻밖의 말에 하루는 눈을 깜빡였다.

“응? 내 별명?”


시온은 마치 조금 창피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가 작게 웃었다.

“‘꿈이’요.”

“꿈이?”

“네… 꿈이 선생님.”


그 말은 마치 아이가 그림 그릴 때 가장 좋아하는 색을 맨 마지막에 남겨놓듯 조금 유치하지만 소중한 방식이었다.


하루는 순간 멈칫했다.


언제나 당장 먹일 식재료를 걱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다음 끼니를 준비하느라 머릿속은 냉장고 사정, 칼질 순서, 조리 시간, 식단 균형 같은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 ‘꿈’이라는 단어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낯설고, 어쩐지 가슴을 간질이는 말이었다.


하루는 작게 웃었다.

“조금… 유치하잖아.”


그 말에 시온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싫어요?”


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지 않아.”


대답은 짧았지만,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정말로, 전혀 싫지 않았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원래 선생님 별명은 없잖아요. 그래서 지었어요. ‘꿈이 선생님’…!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만들잖아요. 그게 진짜 꿈이 아니면… 뭐예요.”


그 말에 하루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시온은 그저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오래 남을 미소였다. 마치 불씨 하나가 잔잔한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듯, 그 미소는 말 없이 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정원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살짝 눈썹을 모았다.


그 말 한마디가, 마치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잊고 지낸 무언가를 살짝 꺼내어 햇볕 아래 놓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꿈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일까.


하루는 언젠가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맛으로 누군가를 울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를 생각하며 어른이 되어 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건 ‘직업’이 되었고, ‘의무’가 되었고, 결국엔 ‘책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작은 아이가 다시 그 단어를 선물해주고 있었다.


“네 덕분에…”


하루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꿈이라는 걸 다시 생각해봤어.”


그 말은 마치 방 안에 퍼진 따뜻한 빵 굽는 냄새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안겼다.

“난 그냥, 당장 먹고살 생각만 했거든. 아이들 식사 챙기고, 영양 걱정하고, 다음 재료는 어디서 구하나, 그런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루는 시온을 바라봤다. 작은 눈망울 속에 자신을 비추고 있는 맑은 시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꿈’이라는 말… 지금 나한텐 좀 과분한 말인 줄 알았어. 근데 오늘 너랑 얘기하면서 생각났어. 처음 요리를 시작했을 때,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걸 먹으면 말보다 먼저 눈이 변하잖아. 그 순간을 보는 게 좋았거든. 그게, 아마… 내 꿈이었던 것 같아.”


시온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천천히 겹쳐졌고, 멀리서 바람이 정원 울타리를 넘으며 지나갔다.


그날, 하루는 한 아이에게서 꿈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 꿈은 아주 작고, 조금 유치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이 담긴 말은, 언제나 가장 멀리까지 간다.



아침 햇살이 창을 따라 길게 드리웠다. 부엌의 공기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온기가 감돌았다. 그 따뜻함은 요리의 향 때문이 아니었다. 식탁에는 평소처럼 아이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 라베아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없이 수프를 젓고 있던 아이 하나가 무심코 시선을 들었고, 다른 아이도 따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어제와는 달리 그 어떤 장벽도 없었다.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라베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들아.”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이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나, 예전에 진짜 마녀였어.”


식탁 위 공기가 잠시 멈춘 듯 조용해졌다. 아이들 몇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감정을 나쁘다고 여겼어. 혼란스럽고, 위험한 거라고. 그래서… 너희에게 색을 입혔지. 웃는 아이에겐 붉은색으로 화내는 아이에겐 검은색으로 뿌렸어. 그렇게 감정을 외우게 했지. 진짜로 느끼지 않아도 되게.”


그녀는 말을 멈추고, 눈앞에 놓인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게 너희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어. 감정이 없으면 상처도 없을 거라고. 감정을 숨기면 다들 조용해지고, 조용하면 그게 평화인 줄 알았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 사이로 작은 숨소리만 오갔다. 라베아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근데 이제야 알았어. 그건 평화가 아니라, 정적이었어. 삶이 아니라 정지된 시간 같은 거였어. 감정을 가르친 게 아니라… 막아버린 거였더라.”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또렷했다.

“이제 나는 그렇게 믿어. 감정은 숨기는 게 아니야. 감정은 맛처럼 찾아내는 거야. 입안에 머물다 천천히 퍼지는 향처럼.”


아이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표정은 달라졌다.


한 아이는 무릎 위에서 손을 꽉 쥐었다가, 이내 천천히 풀어냈다. 긴장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다른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가에 번진 빛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또 어떤 아이는 라베아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순간 시선을 피하며 작은 숨을 삼켰다. 그러나 귀끝이 붉게 물든 건 감출 수 없었다.


조용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하나하나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너희를 제대로 안아준 적도 없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어..”


라베아는 작게 웃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거든. 그게 나였어. 감정 대신 사과를, 포옹 대신 초콜릿을. 그런 식으로라도, 너희 옆에 있고 싶었던 거야.”


그러자 아이들 중 누군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는 알아요.”


말을 꺼낸 아이는 어제와 똑같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게, 선생님의 방식이었다는 거요. 진짜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은 항상 느껴졌어요.”


또 다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진짜보다 쉽게 녹아버리는 과자였지만, 그 안에 마음이 들어 있었어요.”

“진짜로 울면, 옆에 항상 계셨잖아요.”


아이들의 말은 조용했지만, 하나하나 라베아의 마음 깊은 곳에 닿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깊은 숨을 내쉬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진짜로 알 수 있었다. 진짜 마녀였던 시간도, 진짜 엄마 같았던 마음도 모두 다 ‘진심’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걸.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은 또다시 과자를 먹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우리 선생님, 진짜 마녀였지만… 엄마 같았어.”


식탁 위에는 더 이상 외운 감정이 아니라, 진짜로 만들어진 맛이 놓여 있었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조금은 짠맛도 섞인 ‘진짜의 맛’. 그걸 함께 나누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처음부터 만들고 싶었던 식사였는지도 몰랐다.


“선생님…”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 한 아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도 이제, 색을 구분할 줄 알게 됐어요. 그런데요… 선생님이 만든 색도, 예뻤어요.”


라베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두 손을 모은 채,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감정의 온기를 꾹 안아주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다.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던 아이들이 처음 발을 디딘 곳은 그녀가 만든, 과자로 지어진 집이었다.


처음엔 다들 속았다. 너무 달콤해서, 너무 따뜻해서, 너무 안전해서.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아이들은 알게 됐다. 그녀는 거짓을 주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진심 하나쯤’은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들이 직접 요리를 해보는 날이었다.


하지만 라베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칼은 위험하다. 그래서 날카로운 도구 대신, 부드러운 끝의 빵칼을 준비해두었다. 아이들은 그 작은 도구들을 받아들고 의기양양하게 손을 걷어붙였다.

“우리는 진짜 요리사야!”

“빵칼도 칼이야, 조심조심!”


작은 아이 하나는 오레오를 부수기 위해 두 손으로 도구를 꼭 쥐었지만, 원하는 모양대로 되지 않자 결국 돌멩이 두 개를 들고 힘껏 내리쳤다.

“석기시대 요리다!”


그 말에 다른 아이들도 웃으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과자 부스러기들이 여기저기 튀었고, 마법으로 꾸며진 부엌 구석구석은 순식간에 작은 전쟁터가 되어갔다.


라베아는 조용히 손끝을 움직였다. 마법이 서서히 퍼지며 아이들의 작업 공간 주변이 그들이 원하는 상상 속 장소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곳은 숲처럼,

어느 곳은 사막처럼,

어느 곳은 은은한 달빛 아래 작은 피크닉처럼.


아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 환경이 유연하게 변해갔다. 그것은 마녀의 마법이었지만, 이제는 감정을 조율하고, 상상력을 감싸주는 따뜻한 보호막이기도 했다.


하지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 이거 어려워요.”

“손에 힘이 안 들어가요…”


각자 발달 수준이 달라 동일한 재료 앞에서도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아이는 작은 반죽 하나도 정성껏 다듬었지만, 어떤 아이는 흥미를 금세 잃고 색종이를 찢듯 빵을 마구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웃는 아이, 삐죽대는 아이, 몰래 손가락에 잼을 묻혀 빠는 아이. 모두 다른 방식으로 “요리 중”이었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들만 담으려 했다. 초코시럽, 젤리, 생크림, 설탕. 그 조합은 반짝이고, 달콤했고, 보기엔 너무 귀여웠다.


하지만 너무 단 음식만 가득한 탓에 정작 많은 아이들이 다 먹지 못했다. 몇몇은 단맛에 얼굴을 찡그렸고, 어떤 아이는 조용히 한 조각만 먹고 내려놓았다. 하루는 식탁을 정리하며 속삭였다.

“선생님, 좋아하는 것만 넣으니까… 다른 애들이 못 먹어요.”


라베아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이제 알아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만 담은 요리는 반짝이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맛의 균형처럼, 감정도 조화가 필요하다는 걸.


그녀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너무 단 건 금방 질리기도 하지. 다음엔, 조금 더 다양한 맛을 넣어보자. 그게 진짜 요리야.”


식탁 위엔 아직도 부서진 오레오 조각과 사라지지 않은 젤리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아이들이 조금씩 감정과 취향을 알아가는 흔적이기도 했다.


“우리 땅을 만들어보면 어때요!”

누군가가 먼저 외쳤다.

“초콜릿으로 땅 만들고, 그 위에 나무랑 벌레랑…!”


작은 손이 흥분한 듯 쿠키를 으깨며 흩뿌렸다. 하지만 재료가 쌓이고 녹아내릴수록, 그건 점점 흙도 아니고 진흙탕처럼 되어갔다. 라베아는 천천히 아이들 곁으로 다가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흙을 조금만 덜어볼까?”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덧붙였다.

“넓은 땅에 감정을 다 쏟아버리면, 가끔은 그 안에 빠져버릴 수도 있거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절구와 숟가락을 들고 바삭한 과자와 크래커를 천천히 으깨기 시작했다.

“바삭하게 부숴서, 진짜 흙처럼 만들자!”


딱딱한 소리, 사르르 무너지는 감촉.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듯, 아이들의 마음도 천천히 정돈되어 갔다. 누군가는 속상했던 일을 생각하며, 누군가는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며 작은 손으로 재료를 눌렀다.


그때, 라베아가 조심스럽게 작은 마법 브러시를 아이들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마법 잉크로 만들어진, ‘감정의 이름을 쓰는 붓’이었다. 그리고 색으로도 번져갔다.


그 중 한 아이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아무 꽃도 피지 않은 빈 컵을 들고 조심스럽게 라베아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감정이 없으면, 꽃도 안 피는 거예요?”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라베아는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따뜻하게 웃었다.

“아니야, 피지 않은 건, 아직 뿌리가 내리는 중이라는 뜻이야.”


그녀는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정은 급할 필요 없어. 조금 늦게 피어도 괜찮아. 그건… 네 마음이 스스로 준비 중이라는 거니까.”


아이의 눈동자가 조용히 반짝였다. 빈 컵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 아주 천천히, 자라기 시작한 듯했다.


다음 날, 부엌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를 띠었다. 밀가루와 물, 소금, 그리고 효모가 차례로 꺼내져 아이들 앞에 놓였다. 하루는 잠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반응을 지켜봤다.


아이들은 서로의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어른은 간섭 금지예요!”

“진짜로,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면 안 돼요!”


그 말에 라베아와 하루, 이리안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라베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표정엔 예전처럼 굳어 있던 두려움도, 감정을 억누르던 차가운 경직도 없었다. 대신, 부드럽게 풀린 눈빛이 아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요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일단 빨간색은 있어야 해! 토마토 넣자!”

“노란색은 치즈 무조건 있어야 해!”


그러나 곧, 의견 충돌이 일었다.


아이 하나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버섯은 싫어. 냄새가 이상해.”

“양파도 안 돼. 맵고, 울컥해.”


아이들은 각자 자기 입맛과 기분을 강하게 주장했다. 누구는 새콤한 걸 좋아했고, 누구는 고소한 맛만 찾았다.


그때, 라베아가 조용히 다가왔다.


아이들 뒤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마음도, 요리도 좋아하는 것만 담으면 때로는 조화롭지 않을 수 있어.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야, 더 풍성해지기도 해. 조금은 싫어도… 누군가를 위해 넣어보는 것도 괜찮단다.”


그 말에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버섯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럼, 네가 싫어하는 것도 다음엔 조금만 넣자.”

“응. 나도 네가 싫어하는 거 조금만 먹어볼게.”


둘은 함께 버섯을 아주 얇게 썰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티격태격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의 칼질을 살펴주고 있었다. 이윽고 피자는 오븐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화덕 안에서 재료들은 서로의 향을 천천히 섞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익어가는 피자의 냄새를 맡으며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함께 나눠 먹었다. 모두가 자신이 싫어했던 맛도 한입쯤은 참고 삼켜보았다.


달지 않은 감정도, 매운 감정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본 것이다.

“그래서, 여름은 무슨 색일까?”


아이 하나가 피자를 씹으며 물었다.

“뜨겁고, 반짝이고, 불안하고 설레는 계절이니까…”

“주황색! 아니, 붉은 분홍빛!”

“나는 하늘색. 해질 무렵 느낌!”


아이들의 대답은 모두 달랐다. 하지만 그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정의 결이었다.


“선생님, 이 피자 색은 왜 사람마다 다르게 보여요?”

질문이 쏟아졌다.


라베아는 천천히 피자 한 조각을 잘라, 아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그건 너의 마음 때문이야. 지금 네 기분이 어떤 색인지, 이 피자가 알려주는 거야.”


아이의 눈이 커졌다.

“내 마음이… 피자에 들어간 거예요?”

“그렇지. 맛은 기분을 닮고, 색은 감정을 데려오니까.”


그 순간, 라베아의 눈이 깊어졌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순간 입 안에는 각자의 색이 퍼지고 있었다. 붉은 토마토 속의 따뜻함, 노란 치즈의 포근함, 그리고 버섯의 용기. 그것은 말보다 오래 남을 ‘맛’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아이들 사이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선생님, 치즈가… 다 떨어졌어요.”


순간 모두가 숟가락을 멈췄다. 노란색이 없는 피자라니. 아이들의 표정이 슬그머니 어두워졌다.


하지만 라베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조용히 찬장을 열더니, 깊숙한 서랍에서 반쯤 남은 초콜릿 블록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걸로 만들어볼까?”

“초콜릿이요? 치즈 대신요?”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라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단맛만 나는 초콜릿이 아니라, 조금 쌉싸름하고 진한 감정을 담은 초콜릿. 그리고 이 색소를 조금만 더하면… 아주 특별한 ‘치즈’가 될 거야.”


그녀가 꺼낸 건 ‘노란 식용색소’였다.


아이들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한 아이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근데… 선생님, 식용색소는 나쁜 거라며요…”


라베아는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예전처럼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속마음을 꺼내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맞아. 예전엔 그랬지. 이 색소는 감정을 덧칠하고, 마음을 흐리게 하는 데 쓰였어. 하지만 재료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란다. ”


그 말에 아이들은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베아는 녹인 초콜릿에 노란 식용색소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조금씩 섞어가며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이건 지용성 색소야. 기름이나 지방에 잘 섞이지.”


“왜 지용성이어야 해요?”

아이가 물었다.


라베아는 윙크하듯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초콜릿은 기름과 지방이 많아서, 수용성 색소는 잘 섞이지 않고 분리돼. 그럼 색이 뿌옇게 흐려지고 맛도 이상해져.”

“아 그래서 지용성!”


아이 중 하나가 손뼉을 쳤다.

“기름엔 기름이 맞아야 하는구나.”


라베아는 웃으며 작은 판 젤라틴도 꺼냈다. 투명한 젤라틴 조각을 따뜻한 물에 풀어 녹인 뒤, 노랗게 물든 초콜릿에 천천히 섞었다. 조금씩 농도가 변하며, 묽던 초콜릿이 치즈처럼 끈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예요?”


아이들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내밀었다.

“응고라는 거야. 젤라틴이 식으면 고체처럼 굳어지거든. 이렇게 하면 초콜릿이 단단해지고, 치즈처럼 자르기도 좋아져.”


점점 꾸덕해져 가는 노란 초콜릿 덩어리는 이상하게도 정말 ‘치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와 함께 퍼지는 은은한 카카오 향, 그리고 그 속에 섞인 노란빛은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고 따뜻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마지막 마법이야.”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어, 초콜릿 치즈 위에 손바닥을 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에서 아주 낮고 따뜻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조용한 진동이 퍼졌고, 치즈 위에 스르륵 마법이 번졌다. 그리고 그건 진짜로 치즈가 되었다. 모든 것이 초콜릿과 색소, 그리고 마법으로 이루어진 ‘치즈’였다.


아이들은 놀라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진짜다! 진짜 치즈가 됐어!”

“근데 초콜릿 맛도 나!”


라베아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만든 피자 위에 올려도 좋아. 달콤한 기쁨이랑, 조금 씁쓸했던 순간까지도 함께.”


아이들은 피자 한 조각마다 조금씩 치즈를 얹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다음엔… 이 치즈 얹자!”

“응. 복잡할 땐 단맛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맛은 그날의 이야기처럼 오래도록 입안에 남았다. 아주 달콤한 하루였다. 오두막의 외벽에는 손바닥만 한 꿀단지와 짧은 나무 펜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단지 안엔 점성이 높고 은은한 향이 감도는 꿀잼 같은 잉크가 들어 있었고, 그 잉크는 시간이 지나도 마르지 않아 언제든 다시 덧칠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레시피 벽’이라 부르며 자신만의 장난과 마음을 매일매일 새겨 넣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다음엔 재료를 더 넣어봐야지”

“내 동생은 싫어했지만 난 고소했어. 그래서 반반 요리 만들기.”


벽면엔 요리 재료만 적힌 게 아니었다. 그날 있었던 싸움의 이유, 친구에게 건넨 사과, 잘 말하지 못한 감정이 엉켜 있는 문장들도 조심스럽게 ‘마음의 색깔’을 표현했다.


밤이 되면, 오두막 전체를 감싸는 투명한 보호막으로 바뀌었다. 그 보호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마음이 담긴 레시피, 잉크가 쌓일수록 오두막은 외부로부터의 거짓, 공격적인 마법, 무감각하게 만드는 모든 위협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 보호막은 단단함이 아니라, ‘진심’이 만든 온기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벽과 벽을 잇는 ‘생크림 시멘트’가 있었다. 한때, 이 생크림은 라베아가 만든 가장 끔찍한 도구였다. 희고 부드러운 겉모습과 달리 웃음을 잃게 만드는 마력이 숨겨져 있었다.


라베아는 아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아, 그 따뜻한 속내를 크림 안에 섞어 넣었다. 이제 이 생크림 시멘트는 울타리가 되었고, 끈이 되었고, 손잡이가 되었다. 아이들 사이의 감정을, 흘러가는 순간마다 적당히 붙들어주고, 서로를 놓치지 않도록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아이들이 만든 ‘레시피 벽’은, 단순한 벽이 아니었다. 그 위에는 아이들마다 다른 한 빛깔이 담겨 있었다.


어떤 건 새벽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어떤 건 잘 익은 토마토 껍질 같은 붉음을 품고 있었으며, 또 어떤 건 바람에 스치는 잎새의 초록빛처럼 싱그러웠다.


그 빛깔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코끝에는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과, 잎채소 위에 맺힌 이슬의 맑은 향이 섞여 번졌다. 혀끝에 닿으면 먼저 은은한 짠맛이 스며들고, 이어 부드러운 단맛이 따라와 입안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렇게 모인 한 빛깔 한 빛깔은, 집의 구조를 바꾸고, 공기의 결을 바꾸며, 서로를 지켜주는 진짜 마법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오두막은 거짓의 맛으로 지어진 집이 아니었다. 과자로 덮어 숨겼던 외로움도, 단맛 뒤에 감췄던 두려움도 사라지고, 아이들의 빛깔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하나의 집이 되었다.


예전엔 이 오두막을 무서워했다. ‘아이들을 유혹해 가두는 마녀의 집’이라 불렸고,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조용한 폭력.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자와 크림으로 지어진 환상은 모두 사라졌고, 남은 건 나무와 돌, 그리고 아이들의 숨결이었다. 오두막은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그저 삶이 있는 집.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죄책감을 모두 털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다시 쌓아 올린 지금의 이 집은 무너뜨리기 위해 만든 게 아닌, 살아가기 위해 만든 ‘마법’의 결과물이었다.


서툰 글씨로 덧칠된 나무 간판. 그 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숲속 오두막’


바로 아래, 아이들의 작고 동그란 손도장들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 색깔은 제각각이었지만, 서로 어깨를 기대듯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햇살이 스칠 때마다 손바닥 자국이 반짝이며 숲속에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남긴 ‘여기 있다’는 증거였다.


이 집은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가두는 집도, 달콤한 거짓으로 꾸민 집도 아니었다.


손도장으로 물든 벽은 웃음을 담은 기록이 되었고, 함께 붙잡은 약속이 되었으며,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표식이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집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집. 그것이 이제, 아이들과 라베아가 만든 숲속 오두막이었다.

이전 03화색소는 외우는 색, 자연은 계절의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