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날 아침, 부엌엔 평소와 다름없는 향이 감돌았다.
“하루야…” 낮고, 조심스러운 부름이었다.
하루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네, 선생님?”
그의 대답엔 여전히 ‘존칭’이 담겨 있었다. 마치, 여전히 자신과 그 사이엔 선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건데?”
“네?” 하루는 눈을 크게 떴다.
라베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동갑이야.”
하루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선생님이시잖아요.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 막 말하면 좀…”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이들 없을 때만 반말로 해.”
하루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묘하게 끈적이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덩어리가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거 알아? ‘르방’이라고 해. 밀가루랑 물로 만들었지만, 안에 수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어. 조금 느리게, 아주 천천히 자라나.”
하루는 조심스레 그 덩어리를 들여다보았다.
“이 르방 덩어리는 며칠 동안 정성 들여 키운 거야. 아이들이 만든 피자 반죽도 이걸로 했어. 너무 빨리 부풀지 않아서 좋더라.”
라베아는 작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난 이 르방이, 지금 우리 오두막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곳… 시간이 필요한 곳.”
하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근데, 이걸 네게 보여준 이유는 따로 있어.”
라베아는 손을 뻗어 르방을 가리켰다.
“여긴 아주 다양한 미생물들이 살아. 각자 성질이 다르지만, 서로 균형을 맞추며 숨을 쉬지.”
하루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혹시… 시온이?”
“맞아.”
라베아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루나 없이 시온의 몸을 유지하려면, 이 르방처럼 섬세한 균형이 필요해.”
잠시 숨이 고였다가,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혹시, 에스반 교수님을 찾아줄 수 있어? 예전에… ‘색소’를 함께 연구했던 분이야.”
라베아는 말없이 르방 뚜껑을 덮었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는 유리병 속의 공기마저 조용히 가라앉히는 듯했다.
“이젠 마법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 찾고 싶어.”
하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찾아볼게 그 교수님… 분명 어딘가에 계실 거야.”
그리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부엌 안에는 말없이 피어나는 신뢰가 있었다. 마녀와 순례자가 아닌, 같은 목표를 향해 걷는 동료의 눈빛. 그리고 그 순간, 아주 길고 느린 새로운 여정이 막 숨을 쉬기 시작했다.
⁕
해가 길게 늘어진 오후. 햇살은 언덕 너머로 느릿하게 기울고 있었고, 풀숲 속 작은 벌레들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바로 그때, 이리안이었다.
하루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피자 한 조각을 꺼내려는 순간, 바람처럼 가벼운, 고양이 특유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만 먹을 거야?”
하루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풀빛 너머, 빛이 가볍게 뒤틀리더니 고양이의 실루엣이 서서히 길어졌다. 곧 어린 시절 친구를 닮은,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햇살 속에 번졌다.
“먹는 건 정말 귀신같이 알아보네.”
하루는 피식 웃으며 손에 든 피자 조각을 살짝 흔들었다.
“그래, 알았어. 줄게.”
둘은 나란히 언덕길을 걸었다. 먼 곳에서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번져오고, 바람은 천천히 둘 사이를 스쳤다.
툭.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앗, 죄송합니다…”
하루는 놀라 돌아섰다. 한 청년이 서류 가방을 껴안은 채 허둥지둥 서 있었다. 셔츠에서 삐져나온 실험노트, 팔목에 희미하게 남은 라텍스 자국. 누가 봐도 실험실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 아니에요. 제가 딴생각을 하다가…”
하루가 웃으며 말했다.
청년은 갑자기 킁킁거리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당황스럽게도, 청년은 코를 가까이 들이댔다.
“…이 냄새…효모?”
그 순간 하루의 귓가에 공기의 결이 바뀌는 소리가 스쳤다. 본능적으로 물었다.
“혹시… 이걸 아세요?”
청년은 잠시 멈칫했다. 마치 들켜선 안 될 비밀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에르반 교수님 제자로 미생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연처럼 흘러온 이 만남. 그러나 하루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하지만 지금 라베아의 이름을 꺼내면 괜히 그림자만 드리우겠지. 차라리 연구생으로 들어가, 천천히 길을 찾는 게 낫겠다.’
직감했다. 조용히 이어지는 만남들이 결국 하나의 필연이 될 거라는 것을.
이리안은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
“읏… 켁, 크흣…”
그녀의 눈가엔 살짝 당황한 기색이 어렸고, 입꼬리는 어색한 웃음처럼 떨렸다. 하루는 놀라서 다가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
이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때, 청년이 말했다.
“실례지만… 우유를 드릴까요?"
하루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연구에 필요한 재료일 텐데, 이렇게 쉽게 건넬 수 있을까 싶어 하루는 망설이며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실험에 쓰셔야 할 텐데…”
청년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괜찮습니다. 혹시 몰라서 넉넉히 챙겼어요. 그리고… 전 유당불내증이라 마시진 못해요.”
그 말에 이리안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가방 속에서 우유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의 우유는 부드러운 하얀 결을 띠며, 빛을 받을 때마다 표면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막 짜낸 듯 뽀얗고, 표면에는 마치 달빛을 녹여 넣은 듯 은은한 기운이 감돌았다. 병목에는 얇고 투명한 유리마개가 정성스레 덮여 있어, 열기 전부터 미묘한 떨림이 전해졌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오히려 기쁩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울림 속에는 알 수 없는 깊이가 스며 있었다.
이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컵에 우유를 따랐다. 흰 액체가 컵 안을 천천히 채워가는 동안, 공기 중에는 부드럽지만 낯선 향이 퍼졌다. 그녀는 천천히 컵을 들어, 첫 모금을 삼켰다. 순간, 목을 타고 내려가는 온기와 함께 눈앞에 희미한 빛무리가 번졌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향이 꽤 깊습니다.”
하루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인연이라면, 이름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청년은 잠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이반’이라고 합니다. 그럼, 저희 연구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 순간, 이리안이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연구실? 혹시 거기 가면 우유 말고 치즈도 나오나요?”
그녀의 말에 세 사람 모두, 잠시나마 긴장이 풀린 듯 웃음을 터뜨렸다.
⁕
좁고 긴 복도를 따라, 하루는 이반의 뒤를 걸었다. 벽에 걸린 등불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복도의 공기는 미묘하게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둘 사이엔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다. 이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교수님 성격이… 좀 특별하세요. 냄새 같은 자극을 잘 안 받아들이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말씀도… 건조하시고.”
하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미생물 연구를 하시죠?”
이반은 피식 웃었다.
“아이러니하죠. 향을 다루는 분이, 정작 아무 향도 못 느끼신다는 거.”
발걸음이 멈췄다.
「실험 중 냄새 금지」라는 글귀가 붙은 표지판이 문 옆에 걸려 있었다. 이반은 하루에게 마스크와 장갑을 건네며 말했다.
“이건 꼭 착용하셔야 돼요. 교수님이… 향에 예민하셔서.”
그는 노크도 없이 문을 조용히 열었다.
“자, 들어가시죠.”
실험실 안은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밀봉된 공간이었다. 빛은 희미했고, 모든 기계와 병이 정해진 자리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교수님.”
이반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에스반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게 대답했다.
“실험 중이다.”
눈빛은 공허했고, 입가엔 그림자 같은 무표정만이 자리했다. 마치 오래전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의 표정에는 깊은 피로와 공백이 스며 있었다.
하루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우고 싶습니다.”
그 순간, 에스반의 손이 멈췄다. 책장을 넘기던 움직임, 펜을 쥔 손끝까지 조용히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루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는 평가와 불신,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냉기가 얽혀 있었다.
“…그렇다면 실험 보조부터 시작하지.”
하루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네…?”
그 한 마디에 담긴 어색함과 긴장은, 이제 막 시작될 무언가의 낯설고 무거운 공기를 더 짙게 만들고 있었다.
“숫자와 균형부터 익혀야 할 거야.”
이반은 뒤에서 속삭였다.
“괜찮으시겠어요? 교수님, 사람 자체를 싫어하세요.”
하루는 짧게 웃었다.
머릿속을 스쳐간 건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늘 성적표의 숫자로만 평가받던 교실, 알바 자리에서 손님보다 ‘시간당 효율’로만 재단되던 순간들. 사람의 표정은 가려지고, 남는 건 오직 수치뿐이던 날들.
그때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익숙해요.”
조용한 실험실. 에스반 교수는 다시 실험에 몰두했고, 하루는 처음으로 ‘숫자’와 ‘향’ 사이의 간극 속으로 들어섰다. 그건 단지 실험의 시작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발효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
여름 바람조차 막혀 있는 듯한, 완벽히 밀폐된 공간. 하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수님, 식사로 치료할 수 있을까요?”
에스반은 병을 들고 잠시 시선을 멈춘 뒤, 짧게 대답했다.
“우유는… 단백질만 해도 카제인과 유청 단백질로 나뉘지. 미생물에 따라 쉽게 변형돼.”
하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한 우유와 발효 유제품은… 종이 한 장 차이군요.”
에스반은 병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균이 접근하면, 우유는 스스로 형태를 분해한다. 냄새는 강해지고, 유당은 당분으로 쪼개지지.”
손가락이 유리병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유당불내증은… 락타아제 결핍이다. 우유 속 이당류인 유당을 포도당과 갈락토오스로 분해하는 효소. 그게 없으면, 유당은 소장에서 흡수되지 못하고 대장까지 내려간다.”
그는 시선을 병 안의 하얀 액체에 고정한 채, 낮게 이어갔다.
“그곳에서 미생물들이 유당을 먹고 가스를 만든다. 그게… 배앓이, 복통, 소화 불량으로 나타나는 거지.”
그 순간, 하루의 머릿속에 하나의 번개가 스쳤다.
‘단백질을 분해 못하는 아이. 하지만… 미생물은 우리 대신 그것을 분해할 수 있다.’
필요한 건 ‘마법’이 아니었다. 바로, 미생물의 손길이었다.
하루가 곧장 말했다.
“교수님, 혹시… 단백질에 대해 연구해 본 적 있으세요?”
에스반은 잠시 멈췄다. 병 속 액체를 바라보던 시선이, 서서히 하루에게 옮겨갔다.
“…라베아가 그런 말까지 했나? 그건… 쉬운 길이 아니야.”
하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라베아…? 내가 그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는데…’
그 순간,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그림자가 스치듯 지나갔다. 에스반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빛이 어른거렸고, 그 빛은 하루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하루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의문과 불안 속에 잠겨갔다.
에스반은 오래 고개를 떨군 채, 낮게 말했다.
“미생물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 불완전함에서 자라나지.”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병 안에서 꿈틀거리는 미생물의 흔적을, 작은 세계를 해부하듯 분석하고 있었다. 그 말은 차갑지만, 칼날처럼 정확했다. 그 순간 하루는 깨달았다. 이 사람의 언어는 ‘수치’였다. 에스반은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세균 수치와 변화량을 기록한다. 그게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대신, 그 사람의 체온과 맥박만을 측정해 기록하는 것처럼.
⁕
에스반 교수는 세상의 어떤 냄새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수년 전, 그가 직접 배양하던 균주에서 예기치 못한 오염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후각신경을 앗아갔다. 감각은 단 하나뿐이었지만, 빼앗긴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더 이상 ‘맛’을 느끼지 못하는 연구자가 되었고, 이제는 수치와 그래프만이 그의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미세한 차이로 미생물을 짚어내며 점점 더 냉정해졌고, 자신을 ‘측정자’로만 남겨두었다. 이제 음식의 기본 재료는 더 이상 ‘재료’가 아니었다. 그가 만든 것은 ‘재료’의 형태를 흉내 냈지만, 냄새도 맛도 없었다. 오직 분자 배열이 전하는 시각 정보만이 존재했고, 그 어떤 감각도 침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감각 없는 모형이었다.
미생물까지 완전히 분해시키는 절차.
“완전한 멸균 상태야. 감염도, 변질도, 오류도 없다.”
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치 중 단 하나라도 벗어나면, 그것은 곧 “오염”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폐기된다. 그건 곧, 이 세계의 법칙 안에서는 불합격 판정이었다.
한창 논문과 실험에 치이며 버티는 나날이었다. 연구생들에게 하루의 시간은 실험실 책상에서 시작해, 형광등 아래에서 끝났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간은 모니터 속 데이터와 점멸하는 분석 그래프에 갇혀 흘러갔다. 이곳에는 연구생 B와 C도 있었다. 둘은 실험복을 벗지도 못한 채 배지 속 세균 군락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은 서로의 고됨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게 끝나긴 할까?’
그 질문들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실험실 공기 속에 고요히 흩어져 있었다. 지친 몸으로도 끼니는 해결해야 했다. 결국 꺼낸 건 컵라면. 더 빠르고, 더 편하고, 더 싸게.
하루는 컵라면 뚜껑을 보니 문득 옛 생각이 났다.
대학생 시절, 라면을 주제로 기획하고, 실제 현장 영업까지 나가야 하는 프로젝트.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분식집 라면 취급 미션’이었다.
당시 하루는 사람을 직접 만나 말을 꺼내는 일이 몹시 어려웠다. 음식점에서 주문조차 못 해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런 하루에게 분식집을 ‘섭외’ 해야 한다는 미션은 거의 공포였다.
처음에는 전화를 돌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거절이었다. 전화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그때 세운 전략이 있었다. ‘먼저 식사부터 하자.’
무턱대고 부탁하는 것보다는, 먼저 음식을 주문해 식사를 하고 그 뒤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 조금은 부드럽게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들 때마다, 하루의 목덜미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사장님, 저희 이 라면으로 콘텐츠를 진행하고 싶은데요…”
처음엔 단호한 표정이었지만, 식사를 마친 뒤, 사장님은 기획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짧지만 묵직한 한마디를 건넸다.
“뭐, 시도는 해볼 수 있겠네.”
그 순간, 마치 무거운 문이 살짝 열린 듯했다. 작은 허락이었지만, 하루와 팀원들에게는 세상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분식집 문을 나서자마자 가볍게 환호했고, 그 소리는 골목 안에 잔잔히 번졌다.
그날 하루는 처음 알았다. 두려움을 견디고 나면, 그다음엔 말이 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연구실.
컵라면 냄새가 퍼졌다. 실험실 구석, 공기조차 고요하게 정제된 듯한 공간 속. 하얀 실험복을 입은 세 명의 연구생들이 조용히 식사 중이었다.
식사라고 부르기에도 망설여지는 장면이었다. 오직 정해진 분량의 에너지와 영양소, 정밀하게 계산된 수치만이 존재했다. 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끓는 물을 붓고, 타이머를 맞추고, 정해진 온도에서 딱 정해진 시간만큼 기다린다.
그다음 젓가락으로 몇 번 휘저어, 조용히 입으로 가져간다. 표정은 없었고, 말도 없었다. 마치 실험과 실험 사이에 잠깐 허락된 ‘생리적 보충’처럼. 그들의 식사는 살아 있는 행위가 아니라, 측정된 침묵 속에서 연료를 주입하는 기계의 과정 같았다.
하루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건 식사가 아니라, 수치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삼키는 무색무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루나’ 한 방울 푸른빛이 수프처럼 풀리며 면발에 스며들었다.
향은 사라지고, 공허한 포만감만이 남았다. 정적까지 함께 삼켜버린, 멸균된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