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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은 무균이었다.
냄새도, 색도, 잡음도 없는 완벽히 정제된 공간. 모든 것이 수치로만 움직이고, 공기는 밀폐된 듯 고요했다.
그런데 하루의 발끝에 낯선 감각이 스쳤다. 희미한 냄새였다. 이곳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을, 흙냄새였다.
차가운 복도를 따라가자, 끝자락 작은 틈새에서 그 기척이 새어 나왔다. 환기창 아래, 손바닥만 한 흙더미에 배추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잎맥을 따라 은은히 번지는 녹빛, 흙냄새 속에 깃든 생명의 기척. 하루는 놀란 듯 다가가 잎을 만지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교수님이 알면 큰일납니다.”
이반이 서 있었다. 그는 배추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 냄새가 그리워서요. 데이터상으론 별 의미 없는 잎사귀지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장난스레 덧붙였다.
“컵라면을 먹을 때 김치가 빠질 수 없잖아요?”
하루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무균 실험실에선 냄새조차 금지일 텐데요...?”
“그러니까 몰래 키우는 거죠.” 이반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짧은 웃음이 지나간 뒤, 하루는 배추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럼 답은 정해졌네요. 김치는 제가 담그겠습니다.”
그는 배추를 들어 올려 속잎을 갈라냈다. 속살은 하얗고 단단했다. 한 포기씩 큼직한 통에 눕히고, 소금물을 천천히 부었다.
처음엔 줄기마다 자신을 지키려는 듯 단단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고집스러운 힘은 풀리고 부드럽게 몸을 내려놓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이반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데이터상으로는 그냥 침투 현상인데… 이렇게 보니까 마치 배추가 항복하는 것 같네요.”
하루는 피식 웃고, 손을 씻은 뒤 다시 배추 곁에 섰다.
얇게 썬 무, 다진 마늘과 생강, 고춧가루, 따뜻하게 데운 찹쌀풀. 잎마다 양념을 펴 바르고, 무채를 끼워 넣으며 손바닥으로 안쪽까지 눌렀다.
동작은 빠르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양념은 손바닥의 열기를 타고 천천히 배추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 포기까지 다듬자, 그의 손에는 붉은빛이 옅게 남았다. 물 한 컵으로 씻어내자, 고춧가루 향이 손끝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김치는 하루의 손끝에서 마침내 완성됐다.
빨갛게 물든 한 조각을 집어 들자, 향이 실험실 공기 속으로 번졌다.
하루가 먼저 맛을 보려는 순간, 이반이 잽싸게 손을 뻗었다.
“데이터상으론 안전한지 제가 먼저 실험해보겠습니다.”
그는 김치를 한입에 넣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으… 아, 맵다! 근데… 맛있네요.”
하루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맵다면서 벌써 두 번째 집으셨어요.”
“데이터는 반복 검증이 필요하니까요.” 이반은 태연히 대답했다.
김치는 실험실 한 구석에 놓였다. 천을 한 겹 덮자, 침묵 속에서도 숨이 살아 있었다.
그 냄새가 퍼지는 순간, 이반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입안에 은근히 남아 있던 산미가, 마치 오래 잊었던 기억을 깨우듯 가슴 속으로 번져갔다.
어릴 적 부엌 한구석, 항아리 뚜껑을 열던 순간이 스쳐갔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단지 포만감을 원한 게 아니었다. 배를 채우는 것은 연료였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감각은 연료만으로는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것은, 아주 잠깐이라도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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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실험실 한가운데, 음식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온기라곤 한 점도 없이, 마치 유리 진열장 속 모형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표면은 매끄럽고 반듯했으며, 재료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정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릇 속 ‘대게 볶음밥’은 바다 향도, 불 냄새도 없이 단지 모양만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음식이라기보다, 숫자와 공식을 따라 조립된 구조물 같았다.
3D 프린터로 조형된 대게의 등껍질은, 마치 바다에서 방금 건져 올린 듯 완벽했다. 등판의 미세한 요철, 물결처럼 이어진 윤곽, 손끝에 전해지는 단단한 감촉까지 섬세하게 복제되어 있었다.
붉은빛은 아스타잔틴 색소를 정밀하게 조율해 주입한 것이었다. 찜통 속에서 김을 뿜으며 익어 가는 자연산 대게가 내는 그 선명하고도 깊은 색, 뜨겁고 짠 향기만 빠진 채, 오직 시각만을 위해 존재하는 껍질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껍질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자, 그 안에는 ‘게살을 흉내 낸’ 하얀 살점이 차곡차곡 얹혀 있었다.
얼핏 보면 바닷물 속에서 갓 건져 올린 듯 섬세했지만, 그 결에는 미묘하게 균일한 인공의 결이 있었다. 이 살점은 실험실의 또 다른 연구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다. 지방과 근육의 함량, 씹었을 때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세밀히 조율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게살’도 살아 있는 생물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수치를 따라 조립된 또 하나의 계산식이었다.
그 모습은 얼핏 보면 실제 게살을 잘게 찢어 올린 것처럼 보였다. 위에 흩뿌려진 결까지, 바닷바람에 살짝 말린 듯한 그 연출은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하지만 그 빛깔과 결 사이에는 어딘가 지나치게 고른 균일함이 있었다.
밥알처럼 보이는 구성도 사실은 쌀이 아니었다. 전분과 식이섬유, 미세 단백질 분자를 정밀하게 배합해 만든 ‘영양 복합체’. 모든 영양소는 치밀하게 계산되어 정제되었고, 체내 흡수율까지 고려한 생명을 흉내 내는 수학식 같은 음식이었다.
에스반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유리관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유리관 안의 액체는 빛을 받아 은은하게 번뜩였다. 푸른빛이 표면에 스치듯 퍼졌다가, 이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건 단순한 액체가 아니었다. ‘루나’였다. 숨을 삼킨 듯한 정적 속에서, 그는 단 한 방울만을 떨어뜨렸다. 그 움직임은 살아 있는 것처럼 섬세했으나, 이상하게도 어떤 온기도 없었다. 마치 생명을 흉내 내는, 완벽히 계산된 손길 같았다.
에스반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순수한 형태. 배고픔을 없애고, 충족을 넘어 존재마저 최적화한다.”
그 말에는 따뜻함도, 냉소도 없었다. 단지 정리된 문장, 하나의 정의처럼 들렸다. 눈부시게 매끄럽고, 기하학적으로 정교한 윤곽.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어떤 온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생명감 없는 완벽. 그 차가운 질서야말로, 그가 꿈꾸는 식탁의 이상이었다.
식사는 완벽하게 계산된 ‘가짜의 미(美)’였다. 색은 이상적이었고, 형태는 조형적이었으며, 성분은 정량화되어 있었다. 재료들은 한 번도 숨 쉰 적이 없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들처럼, 식욕을 흉내 내고, 포만을 모방하는 완벽한 복제였다.
짠맛도, 단맛도, 깊은 감칠맛도 없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음식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감각을 자극하는 어떤 요소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도는 미지근했고, 질감은 평평했다. 씹는 행위조차 메마른 의무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하루는 깨달았다. 이건 ‘먹는 행위’가 아니라, 단지 ‘섭취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하루는 조심스럽게 ‘대게 볶음밥’의 등껍질을 집어 들었다. 껍질은 마치 방금 찐 것처럼 윤기가 돌았고, 형광등 아래서 선명한 붉은빛이 번들거렸다.
외형만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진짜’ 대게라 믿을 정도였다.
“아스타잔틴 색소로 재현한 거야.”
에스반 교수가 건조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진짜 삶은 게처럼 보이지?”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껍질을 벗겨냈다. 그 안에는 하얗고 가지런한 섬유질의 속살이 들어 있었다. 모양은 완벽했다. 살의 결도, 윤기도, 두께도. 하지만 손끝은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던 흔적도, 한때 생물이었단 감촉도 전혀 없었다.
조용히 멈춰섰고, 그 순간 표정이 굳었다. 입안에 넣자, 아무 맛도,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씹히는 감촉은 지나치게 균일했고, 혀는 그 어떤 온기나 복합적인 반응도 감지하지 못했다.
“…붉은 색을 입힌다고요..?”
하루가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반 교수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마치 인간이 아닌 기계에게 말하는 것처럼 차가운 반응.
“색이면 충분해. 사람들은 맛보다 겉을 믿어.”
말은 단정했고, 감정은 철저히 제거된 문장 같았다. 그에게 음식은 기억이 아니라, 기능이었다. 하얀 실험복을 입은 연구생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들, 감정 없는 눈빛. 젓가락을 내려놓는 일련의 동작들이, 마치 사전 설정된 프로그램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에스반 교수의 눈빛은 온도 없이 차가웠다.
“모든 수치가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다. 필요한 영양소, 칼로리, 미세한 맛의 균형까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어. 최적화된 포만. 설계된 만족.”
목소리는 자부심이 아닌, 기록을 낭독하는 듯한 톤이었다. 감정의 울림 없는 세계의 언어였다. 마치 인간의 생리 작용이 단순한 알고리즘인 양, 실험실엔 기계적인 정적이 감돌았다.
하루는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공기를 가르는 듯 또렷했다.
“그런데…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에스반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웃음도, 분노도, 동요도 없었다. 준비된 답안을 꺼내듯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행복은 오류야. 우리는 완벽함을 향해 진화하는 중이다. 불안정한 쾌락보다 예측 가능한 포만이 더 합리적이지.”
그 말에는 온기 대신 냉정한 수치와 그래프만이 담겨 있었다. 하루는 잠시 숨을 삼켰다. 그 말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행복이 오류라니. 그건 인간이 숨 쉬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불필요한 결함’으로 치부하는 말이었다. 만약 세상에 행복이 없다면, 살아간다는 건 그저 생리 작용의 연속일 뿐이었다. 온기 없는 식탁, 향 없는 음식, 웃음 없는 얼굴 그건 삶이 아니라, 단지 작동하는 기계였다.
하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완벽이라면, 차라리 불완전한 내가 낫다.’
연구생들은 더 이상 ‘맛’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이반만 제외하고.
향이 사라진 세상에서 음식은 연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늘의 식사는 어제와 같았고, 내일도 같을 것이다.
입안에서 흩어지는 질감에도 의미는 없었다. 포만감조차 실감 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식사를 끝냈다. 아니, ‘마쳤다’보다 ‘완료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정밀하게 조작된 분자 음식은 씹을 필요조차 없었다. 목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눈을 한 번도 감지 않은 채, 정확히 3분 만에.
그 시간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주문처럼, 어긋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젓가락이 부딪히는 미세한 소리만이 공기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울림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파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잘했다. 감정을 허비하지 마라. 감정은 오차를 낳는다.”
그 구호는 실험실의 벽과 천장, 바닥까지 스며들어 수없이 반복되며 각인된 문장이었다.
하루는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건… 식사가 아니라 절차야.’
이곳의 식탁에는 웃음도, 대화도 없었다. 남은 것은 기계적인 포만과, 감정 없는 반복뿐이었다. 그저 ‘완벽’이라는 이름으로 계산된 배경음처럼 흡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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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교수는 질서 속에서 마지막으로 ‘비밀’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 아주 강하고 깊은 결심이 솟구쳤다.
“질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하루는 그의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단단했고,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교수님, 이제 그만해요. 이건… 더 이상 실험이 아니잖아요.”
하루는 손에 쥔 자료를 들었다. 루나의 성분 분석표, 분자 구조도, 실험 일지 복사본. 그리고 여기에 적힌 건 단순한 수치나 화학 공식이 아니었다.
“이 ‘루나’는… 그냥 연구 결과물이 아니에요. 왜 이 모든 걸 감추고 있었나요?”
눈빛은 조용히 교수에게 닿았다. 책임을 묻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교수는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연구 일지 사이의 문서를 덮었다. 오래된 기록들. 자신이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이유와 목적.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약간 떨리고 있었다. 전과는 다른 톤이었다.
“너는… 모르겠지. 내가 왜 이걸 만들었는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그는 손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말했다.
“사람들이 냄새를 잃고, 감정을 잃고, 조용해졌을 때…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 더는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게 만드는 거. 그게… 내가 하는 일의 목적이었다.”
숨을 고르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고통이 없는 사회. 평온함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걸 만들 수 있다고 믿었어.”
교수의 시선은 멀어졌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실험실 벽 너머, 아주 오래전의 과거였다.
“나는 그 길을 갔고, 사람들은 평온해졌지. 적어도… 그렇게 보였어.”
그는 한동안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중얼이듯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 그 평온은 진짜가 아니었어.”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러나 하루는 그 속에서,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한 한 인간의 고백을 들었다. 그가 만들었던 평화. 그것은 감정을 지우는 삶의 온기를 제거한 가짜 평화였다는 사실.
그 순간, 교수는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선택을 마주한 사람이었다. 교수의 말은 무겁고 단호하게 공간에 울렸다.
그 말에 하루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왜요...? 이건… 그리운 향인데요. 왜 이걸… 숨겨야 하죠?”
눈빛은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짓도, 반항도 아닌, 단지 이해하고 싶다는 갈망. 교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단순한 망설임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진실을 꺼내기 위한 고요한 준비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냄새는…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지.”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향은 사람의 기억을, 그리고 감정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자극하지. 우리가 향을 되살릴수록… 사람들은 과거를 떠올려.”
그 눈엔, 단순한 과학자의 시선이 아닌 삶을 감당해온 사람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야. 그건 문득 피어나는 감정이고, 때로는 억눌러온 고통을 다시 끄집어내는 문이 되기도 해.”
그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공기 중을 그었다. 마치 그곳에 떠다니는 무형의 기억들을 짚어내듯이.
“그래서 사회는 그것을 두려워했어. 향은 질서의 적이었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불씨였으니까.”
교수는 서랍 속에서 오래된 연구 자료를 꺼냈다. 그것은 지식의 기록이 아니라, 질서를 위해 새겨진 상처였다.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사회는 기억을 잊은 사람들을 원해 슬픔도, 그리움도, 고통도 없는 사람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향을 되살리는 작업은 금기였어.”
하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말이 어쩌면 너무나 사실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다시,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 냄새를 없애버린 거야.”
그게 바로, 이 세상이 만든 규칙. 그 규칙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이 공식을 신념처럼 믿었다. 향을 없애고, 감정을 통제하면, 사회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을 되살리는 것은, 향을 통해 감정을 복원하는 것은 이 모든 ‘안정’이라는 체계를 뿌리째 흔드는 위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향을 없앴고, 감정을 무디게 했으며, 사회를 차갑고 무미건조한 안정 속에 묶어두었다.
그러나 하루는 안다. 그 실험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향을 줄이면 감정이 사라지고, 감정을 잃으면 결국 순종하게 된다. 그건 안정이 아니라, 죽음과 같은 질서였다.
에스반의 목소리는 차갑게 울려 퍼졌다.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야. 그건 기억을 흔들고, 감정을 일으키지. 때로는 사랑이 되지만, 같은 힘으로 고통을 찢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사회는 향을 버렸어. 질서만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었지.”
그 말이 실험실에 가라앉자, 공기는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루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짧은 침묵.
이반의 손끝이 보이지 않게 흔들렸고, 눈빛은 잠시 흔들렸다. 교수의 손마저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였다.
덮어둔 천 사이로 은근한 기운이 스며 나왔다. 매운 듯, 시큼한 듯 이름 붙일 수 없는 발효의 향.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정제된 공기 속에서,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루는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향은 폭력이 아니야. 살아 있다는 증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