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험실 깊은 곳, 고요한 장치들의 심장부에 놓인 유리병 하나. 그 속에서 사카로미세스는 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숨을 멈춘 채, 세상과 단절된 무중력의 시간 속에서 미동조차 없이 웅크린 상태로. 세포벽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내부의 미세한 결들이 있었다.
하루의 손끝이 병마개에 닿았다. 금속이 미세하게 울리고, ‘딸깍’ 소리와 함께 마개가 돌아갔다.
그 순간, 병 속을 감싸고 있던 얇은 공기의 막이 찢어졌다. 미묘하게 눅눅한 온기가 스며들었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세계가 처음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조심스럽게 미지근한 물을 붓고, 은은한 단맛이 배인 곡물즙을 효모 위에 흘려보냈다.
방울들이 표면을 적시자, 닫혀 있던 세포벽의 틈새에서 아주 작은 떨림이 일었다. 처음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그 움직임은 점차 분명해졌다. 물방울 속에서 잔잔한 기포가 오르기 시작했다. 기포는 점이 되었고, 점은 선으로 이어졌으며, 이윽고 호흡처럼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사카로미세스가 깨어났다.
세포 안의 효소들이 서서히 작동하며 미세한 대사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공기 속에는 날카롭지 않은, 부드럽게 감싸는 향이 피어올랐다.
그 향은 실험실의 차갑고 정제된 공기를 서서히 깨뜨렸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결들이 실내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 유리병 속에는 단순한 가루나 곡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 들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숨, 미세한 맥동.
그것이 바로 ‘사카로미세스’, 닫힌 발효의 문을 여는 작은 손잡이였다. 이 효모는 평범한 거래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양조장에서만 은밀히 길러지는 귀한 균이었다.
그러나 에스반 교수 실험실에는 냄새는 불필요하고, 위험했다. 살균이 곧 질서였고, 살아 있는 냄새는 통제할 수 없는 혼란, 즉 오류였다. 온도와 습도, 수치와 데이터로 재단되지 않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신념이었다.
하지만 하루는 알았다. 바로 그 살아 있는 냄새야말로 모든 생명의 증거라는 것을. 그것은 단지 향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게 하는 숨이었다. 언젠가 이 작은 병 속에서 시작된 발효가,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입 안에 머물며 아주 조용한 떨림을 일으킬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이건 마법이야. 통제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마법.”
그 냄새는 맛을 깨웠다. 그리고 단순한 발효가 아니었다. 억눌린 감각 깊숙이 스며들어, 얼어붙은 세계에 서서히 온기를 불어넣는, 고요를 깨우는 마법이었다.
문득, 떠오른 냄새가 있었다. 바로 된장이었다.
어린 시절, 지붕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 더미. 그 곁에서 장독대를 정리하시던 할머니의 손길.
할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 안엔 콩만 있는 게 아니야. 기다리는 마음, 함께 먹을 사람, 그 계절의 공기까지… 다 담겨 있어.”
그때 그는 알았다. 된장은 ‘썩는 게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을. 장독대 뚜껑을 열면 피어오르던 짭짤하고, 구수하고, 시큼한 향기. 그건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계절을 품은 흔적, 곧 시간의 냄새였다.
하루는 발효가 단지 ‘변화’가 아니라 ‘공존과 순응, 그리고 애정’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기계는 온도를 읽고, 산도를 측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숫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하루는 깨달았다. 자신이 몰래 키우는 이 발효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세대 간의 시간, 잊히지 않은 감각, 그리고 다시 되살리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할머니, 나… 이제 그때 그 냄새가 왜 좋았는지 알아요.”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미생물과 오래전 할머니의 손길을 함께 떠올렸다. 이 세계에 감각을 되돌려주는 첫 번째 발효 마법이 되었다.
실험실 위에는 손끝으로 쌀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거칠지 않았다. 손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스치는 감촉. 충분히 불린 쌀은 투명한 물속에서 부드럽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루는 물을 따라내고 찬물에 다시 한 번 헹궜다. 하얗게 흐려진 물살 속으로 쌀알들이 굴러갔다.
쌀을 조심스레 찜기에 펼쳤다. 물기 없이 고르게 펴고, 불을 올렸다.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익은 향이 천천히 실험실을 채워갔다. 살짝 달큰한 냄새.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쪄낸 쌀은 넓은 대야에 펼쳐 식혔다. 뜨겁지 않도록 식은 뒤, 누룩 가루를 골고루 뿌렸다.
누룩,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생명이 잠들어 있는 가루. 하루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섞었다. 과하지 않게, 억지로 비비지 않고. 손바닥의 온기가 누룩과 쌀 사이를 천천히 건넜다.
그는 물 한 통을 조심히 부었다. 물줄기는 누룩과 쌀 위를 지나 항아리의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쌀은 물에 잠기고, 누룩은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발효가 시작되었다.
말 한 마디 없었지만, 미생물들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숨을 쉬고, 먹고, 서로를 만나고 있었다.
온갖 생명의 기운이 조용히 항아리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루는 항아리의 입구를 깨끗한 천으로 느슨히 덮었다. 숨 막지 않게. 죽이지 않게.
그저, 살아가게 놔두었다. 항아리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했지만, 그 안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십억 개의 생명체들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술을 빚어내고 있었다. 막걸리는 그렇게,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아주 희미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첫날은 그냥 기분 탓인 줄 알았다. 지쳐 있는 몸이 만들어낸 착각, 혹은 무의식의 장난이라 여겼다.
둘째 날이 되자, 어렴풋이 ‘뭔가 다르다’는 낌새가 들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이곳 공기 어딘가에 작은 틈이 생긴 것 같았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주 작고 보이지 않는 금.
셋째 날. 그건 착각도 아니고, 기분 탓도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이 공기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극도로 억제된 실험실. 루나와 멸균으로 완벽하게 정제된, 냄새 없는 공간.
무취의 세계.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그 향은 아주 미약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건 막 누군가가 만든 향수처럼 강하지도 않았고, 익숙한 향신료처럼 구체적인 형태도 아니었다. 단지, “익어가고 있다”는 생명의 언어.
벽을 타고, 바닥을 스치고, 공기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는 실험 기록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이리안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 묘한 울림이 있었다.
“……냄새 나지 않아?”
이리안은 처음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하고 대답하려던 그녀의 입술이, 그 순간 살짝 멈췄다.
이리안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코끝에 집중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낯설게 미묘한 기운이 걸렸다.
“…약간… 술 냄새.” 그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혹시… 막걸리야? 아니면 네가 몰래 숨겨둔 거 아니야?”
이리안은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곧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아니면… 너, 실험실에서 막걸리 빚는 마녀지?”
하루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거든.”
하지만 이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 직접 확인해 봐야지.”
그녀는 고양이처럼 가볍고 재빠르게 일어나, 향기가 나는 쪽을 슬금슬금 향했다.
하루도 마지못해 따라갔다. 좁은 통로를 지나, 둘은 유리병 앞에 섰다. 그 속에선 무언가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공기 속의 향은 점점 진해졌다. 달콤하면서도 은근히 톡 쏘는 기운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리안은 병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봤지? 내가 맞았어. 막걸리.”
그리고는 슬쩍 하루를 보며 웃었다. 그 미소는 놀림 반, 진심 반이었다. 하루는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래, 살아 있는 냄새다.
그녀는 손끝으로 병목을 빙그르르 돌리며, 와인을 감별하듯 진지하게 향을 맡았다.
“알지? 이런 건… 향만 맡아도 취한다니까.”
하루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취하긴 누가 취해. 효모 냄새일 뿐이야.”
“아니거든?”
이리안은 한 발 다가서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이건 말이야… 살아 있는 향이야. 귀가 간질거리고, 혀끝이 벌써 반응하는 것 같아.”
하루가 웃음을 참고 있는 사이, 이리안은 병마개에 손을 올렸다.
“조금만, 진짜 조금만 열어볼까?”
그녀의 손끝이 병마개를 비틀자, 안쪽에서 ‘툭’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순간, 공기 속으로 더 진한 발효 향이 번져나갔다.
이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루를 쳐다봤다.
“봐봐! 이거지! 향이 더 달콤해졌어.”
그리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병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이건 이제 내 거다.”
하루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 미소 속에 깃든 생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차가운 실험실 공기 속에서, 그 향과 웃음은 묘하게 따뜻하게 번지고 있었다.
이리안은 병을 품에 꼭 안은 채, 길러온 고양이라도 되는 양 손바닥으로 병의 옆구리를 토닥였다.
“쉿, 얘 놀라겠다. 조용히 해야 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다정했다. 하루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효모한테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달라지지. 다 느낀다니까.”
그녀는 병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봐, 기포가 조금씩 올라오잖아?”
이리안은 그 작은 기포 하나하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마치 병 속의 효모가 정말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그에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병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잘 자라, 작은 친구들. 곧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루를 바라봤다.
“이건 이제 나랑 같이 키울 거야. 이름도 지어야겠네.”
하루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병이 이상하게도 다정해 보였다. 실험실의 차갑고 무균한 공기 속에서, 그 모습은 작은 생명을 품은 듯한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막걸리 향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었지만, 끝자락엔 살짝 장난스러움이 묻어났다. 하루가 눈을 가늘게 뜨자, 이리안은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이거 너만 마시려고 했던 거 아니야?”
그녀는 마치 애완동물에게 간식을 숨겨두었다가 들킨 주인처럼, 하루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서 말해, 어디 더 숨겨놨어?”
눈을 반짝이며 묻는 표정은 마치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장난감을 찾아내려는 순간 같았다. 하루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잠시 풀린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이리안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하루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이리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막걸리병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 속에서 하얀 기포들이 마치 비밀을 들키고 웃는 듯 가볍게 흔들렸다.
“그렇게 좋아하면…”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마셔야지.”
그는 잔을 들어 기울였다. 막걸리가 부드럽게 흐르며 잔 속을 가득 채우는 순간, 하얀 액체 표면에 작고 동그란 파문이 번졌다.
막걸리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이리안의 뺨에 은은한 빛이 번졌다. 그 빛은 단순한 홍조가 아니라, 마치 겨울 끝자락에 피어오른 꽃처럼 서서히 번져나갔다.
“으음… 생각보다… 부드럽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아졌고, 끝이 살짝 풀려 있었다. 말끝마다 숨이 고요히 섞여 나와, 그 숨결이 하루의 귓가를 스쳤다.
이리안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도 하루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평소엔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물빛처럼 깊고 잔잔했다.
“너… 이렇게 술 잘 따르는 사람이었어?”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고, 그 움직임에 머리카락 끝이 하루의 팔에 살짝 스쳤다. 머리카락에 배어 있던 은근한 발효 향이 하루의 숨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몸을 기울이며, 그녀는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나… 조금 더 마셔도 돼?”
그 말에는 허락을 구하는 듯한 부드러움과, 은근히 시험하듯 건네는 장난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하루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잔을 들어 다시 채워주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손끝 하나만 뻗으면 닿을 만큼 좁아져 있었다. 실험실 한켠에서 작은 기포들이 막걸리 속에서 조용히 터져 오르고 있었고, 그 소리는 마치 서로의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파문과 닮아 있었다.
잔이 비워질 때마다 하루의 손은 조용히, 그러나 주저 없이 다시 채워졌다. 세 번째 잔을 입에 대고 비우던 이리안의 눈가에는 이미 풀린 빛이 번져 있었다. 그 빛은 차갑던 실험실 공기 속에서도 은근한 온도를 품고,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문틈으로 스며드는 봄바람 같았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있잖아…”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추고, 막걸리 향이 섞인 숨결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이거… 너랑 마시니까 좋다...”
그 말은 가벼운 농담이었을지도, 아니면 술기운이 만든 작은 고백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리안은 잔을 비우고 나서 무심한 듯 하루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러나 그 기울어짐은 가볍지 않았다. 부드러운 무게가 하루의 팔에 닿는 순간, 막걸리 향이 은근하게 번져있었다.
그 향은 막 걸러낸 술 특유의 달큰함과 곡물의 고소함이 섞여 있었고, 그 사이로 스치듯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은 차가운 실험실 공기를 조금씩 녹였다.
이리안은 살짝 웃으며, 귓가 가까이 속삭였다.
“너, 생각보다 괜찮네…술 때문인가?”
그 목소리는 장난 같았지만, 그 안에 술기운과 함께 묻어난 부드러움이 하루의 귓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하루의 팔목을 스쳤다. 은은한 향과 체온, 그리고 조용히 들려오는 숨소리가 한데 섞여 실험실 한구석을 다른 세상처럼 바꾸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차갑게 멈춘 공간이 아니라, 아주 느린 박동을 가진 살아 있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그냥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
그 말이 끝나자, 마치 세상이 잠깐 멈춘 듯 고요해졌다. 실험실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사이로 두 사람만의 온도가 피어나고 있었다.
하루는 그 옆에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단지 아주 작고 은근한 온기가 번져나가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이리안은 천천히, 규칙적인 호흡을 이어갔다. 막걸리 기운이 아직 남은 듯, 볼에는 은근한 붉은 기가 스며 있었고 어깨 위의 힘은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숨결은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하루의 곁으로 번져왔다. 하루는 잠시 망설였다. 그냥 이 고요를 지켜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손끝을 뻗어 닿아볼까. 막걸리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지만, 그 안에 남은 빛과 향은 사라지지 않고 공기 속에 부드러운 잔향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잔향은 단순한 알코올의 냄새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 같은 공기였다. 아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감정이었다. 물 위에 번진 잉크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퍼져가고 있었다.
⁕
에스반은 문 닫는 소리, 걸음 소리,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지만 책상 위 병을 바로 알아봤다. 손으로 천을 벗기고 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막걸리병. 하루가 전하고 간 그것. 병의 표면엔 아직 미세한 습기가 맺혀 있었고, 안쪽에선 보이지 않는 호흡이 기포를 만든 듯했다.
에스반은 잔을 꺼냈다. 유리도, 실험 도구도 아니었다. 조심히 꺼낸 작은 사기 잔 하나. 그는 막걸리병을 기울였다. 소리는 거의 없었다. 천천히, 탁한 액체가 잔으로 흘러들었다.
그 순간 기포들이 움직였다. 잔 안에서, 표면이 흔들리며 둥그런 거품들이 올라오고, 서로 밀고 다시 가라앉았다. 마치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작은 움직임들처럼 보였다. 기포는 막걸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잔을 들어 코 가까이 가져갔다.
향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신내음, 쌀이 남긴 당의 냄새, 그리고 작은 발효의 흐름
입에 대기 전, 그는 한순간 멈췄다. 그리고 한 모금. 천천히, 아주 조용히. 막걸리는 달지도 쓰지도 않았다. 그건 ‘느껴지는 맛’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직의 감촉이었다. 목을 타고 내려가자, 속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미각이 아니라, 감각의 흔들림이었다.
막걸리를 마신 지 30분쯤 지났을 무렵. 에스반은 혼자 실험실 정리 중이었다. 기계 작동은 멈췄고, 조도는 낮았다. 그는 메모를 하려 펜을 들었다.
그 순간 손끝에서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펜촉의 무게. 손가락 관절의 굽힘. 종이를 누르는 힘의 조절. 이전까지 오차 없이 반응하던 그 손이, 지금은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는 멈췄다. 펜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펴고, 손가락 하나씩 구부렸다.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각 관절의 접힘이 의도가 아닌 감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끝을 천천히 책상 표면에 눌렀다. 나무결의 질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도 있었을 결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결은 살짝 따뜻했고, 살짝 저항이 있었다.
에스반은 한 줄도 적지 않았다. 그건 기록할 수 없었다. 이건 데이터가 아니라 돌아온 감각의 짧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맛은 착각이다. 향은 자극이고, 감각은 오류다. 남겨야 할 건 오직 구조뿐.”
에스반은 기존의 막걸리를 ‘비과학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감각 오염’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는 향을 제거하고, 촉감을 표준화하고, 맛을 수치화한 막걸리 체계를 구축했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정밀함이다.”
교수는 홀로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빼곡한 실험 기록지와 분석 보고서들이 쌓여 있었고, 자동으로 조절되는 조명 아래 무표정한 얼굴로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손끝은 익숙하게 키보드를 눌렀고, 시선은 습관처럼 그래프의 추이를 쫓았다.
그러다, 문득.
종이 한 장을 뒤적이며 무심코 코를 가까이 댄 순간 냄새가 느껴졌다. 평범한 종이의 섬유 냄새. 미세한 잉크의 화학 잔향. 손끝과 코끝에 동시에 스친, 아주 오래전의 익숙함. 언제부터인가 잃어버렸던 감각.
그것은 ‘분석된 분자 정보’가 아니었다. 통제 가능한 물질의 성분표가 아니라, ‘냄새’ 그 자체였다. 에스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숨이 흔들렸다.
밤이었다. 실험동 대부분은 조명을 끄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기계 소리도 멎고, 공기마저 식은 그 정적 속에서 에스반 교수는 말없이 조용히 걸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숨기려는 목적도 없었다. 단지 이 시간에 그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이제 아무에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걸음걸이는 기계처럼 정확했다.
하지만 발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느리고 부드러웠다. 실험실 문을 열었다. 기계음도 경고등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자동문이 조용히 미끄러지듯 열릴 뿐.
그리고 그 안, 항아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덮개는 헝겊 한 장. 마치 누군가 다정하게 덮어둔 듯, 정갈하고 조심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록지도, 실험 메모도 없었다. 오직, 냄새만이 남아 있었다.
에스반은 손을 뻗지 않았다. 뚜껑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앞에 섰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아주 얕게. 거의 티 나지 않을 만큼.
그 냄새는 다시 돌아왔다. 쌀이 발효되며 내는 미묘한 단내. 누룩의 살아 있는 숨결. 막걸리가 부풀어 오르며 흘리는 따뜻하고 습한 공기. 익어가는 생명의 언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떨림.
에스반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는, 무언가가 아주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냄새는, 다르다. 데이터처럼 남아 있지 않는다. 수치로 바꿀 수 없고, 논리로 조립할 수도 없다. 지금 이 감각은, 무서웠다. 잊어버렸다고 믿었던 것을 신경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그 냄새를 서서히,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달고, 살짝 시고, 공기보다 가볍고, 목구멍보다 깊은 냄새. 막걸리의 숨. 그것은 설명되지 않았다. 분해도, 정제도 되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의 콧속으로 들어와 신경의 가장 안쪽을 조용히 흔들었다.
막걸리 항아리 앞. 에스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냄새는 마음보다 먼저 몸을 찔렀다. 혀끝이 작게 움직였고, 목이, 가볍게 한 번 넘어갔다. 삼킨 게 없는데, 목은 반응했다.
향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식욕도 아니었다. 쾌감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단순하고 원초적인 감각.
“더.”
더 맡고 싶다.
더 알고 싶다.
한 번 더, 마시고 싶다.
그건 교수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의 ‘의지’가 아닌, 몸에서 먼저 올라온 신경 말단의 충동이었다.
에스반은 그날 자신의 실험실 한편을 정리했다. 사용하지 않던 작은 배양 용기 몇 개 보관 중이던 쌀과 물, 효모 샘플. 그는 메모도 하지 않았고,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단지 손을 움직였다. 머리로 기억한 순서대로. 물. 쌀. 누룩 유사 성분. 온도 조절. 산소 차단 장치. 기계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조건. 실패할 수 없는 세팅. 그는 항아리 안에 쌀을 넣었다. 불리지도, 삶지도 않은 채. 정량만큼 정확히 떨어뜨렸다.
작은 숨결조차 지금 이곳에는 없었다. 온도를 맞췄다. 세균 오염을 막기 위한 항균 장치도 작동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덮개를 닫기 직전 그는 한순간, 자신의 손끝을 바라봤다. 차가운 손이었다. 습기도, 온기도, 기름기도, 냄새도,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에스반은 그 손을 천천히, 덮개 위에 얹었다. 잠시, 가만히. 아무 말 없이.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느꼈다. 이건, 살고 있지 않다.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은 죽은 채로 완성돼 있었다.
기포가 없었다. 움직임이 없었다. 기다림도, 떨림도 없었다. 그리고 냄새가 없었다. 그것은 단지, 입자와 숫자와 구조만으로 이루어진 ‘모사체’에 불과했다. 그 손끝엔 삶이 없었다.
에스반은 덮개를 닫고, 그 위에 태그 하나를 붙였다.
[실험 실패]
글자는 또렷했고, 종이는 깨끗했고, 장비는 정확했다. 모든 것이 정확했지만, 그 안엔 생명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무너진 것도 아니었고,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안에 살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조용히,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에스반은 웃고 있었다. 냄새라는 걸, 이제 다시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웃음은 크지 않았다. 소리조차 없었다. 그저 입가에 아주 미세한 곡선이, 오랜 시간 얼어붙어 있던 얼굴 근육을 조심스럽게 깨우듯 움직였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지은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조차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감정을 잃었고, 갈등은 사라졌으며, 사회는 효율을 얻었다. 그는 그 결과를 자랑스러워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당황도, 혼란도, 저항도 없었다. 오히려 조용한 납득. 말없이 받아들이는 고백.
“이제 냄새를 다시 쓸 수 있어.”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은, 단지 후각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건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잉크 냄새, 종이 냄새, 발효된 쌀 냄새, 그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스치는 막걸리 기포의 냄새. 그 모든 향은 ‘데이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였다. 이제 그는, 그 언어를 다시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실험노트 한 권. 그 앞에 펜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는 숫자 대신 단어를 썼다.
향은 기억을 불러왔다. 기억은 마음을 불러왔다. 마음은,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그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완벽한 맛을 계산하려 하지 않았다. 향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기다릴 수 있었다. 기포가 오르고, 시간이 흐르고, 그 안에 감정이 깃들기를. 그리고 그는 알았다. 다시 냄새를 쓸 수 있다는 건,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라는 걸.
그동안 실험의 모든 조건은 ‘무취’가 원칙이었다. 냄새는 오염을 유도하는 불확실성, 감정을 자극하는 위험한 인자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는 알게 되었다. 그가 깨달은 건 단순했다. 완벽한 멸균 아래선,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