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를 보내 드렸다

by 하이디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던 날,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듯 시원했다. 남편은 사전에 약속된 친구들과의 축하 술자리에 가고 아이들은 모두 약속이 있어서 나간 저녁, 나도 그냥 있을 수 없어서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갔다. 기분 내기용으로 간단하게 맥주 한 캔과 소세지 한 개를 사서 편의점 문을 나서는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갑.자.기. 하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갑자기가 아니었다. 며칠 전에 통화했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괜찮았는데도 마음속으로는 왠지 오래 못 사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한 달 전 입원하셨을 때 병원에서 쇠약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그 이후로 내내 그런 마음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받는 순간 가장 먼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연락을 받은 남편은 집에 들를 새도 없이 택시를 타고 먼저 내려갔다. 마침 한식을 앞둔 금요일 밤이라서 내려가는 차편이 없어 나는 아이들과 다음날 새벽에 내려갔다.


작은 시골 마을의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졌다. 명절에 시댁에 내려가는 길에 지나치던 한적하고 자그마한 장례식장이었다. 빈소 안내 모니터에 어머니의 사진이 올려있고 자손들 이름 속에 내 이름도 들어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덤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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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 옷들 사이에 노란 점퍼를 입은 아버님이 앉아계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급하게 병원에 가셨다가 홀로 임종을 지키시게 된 아버님도 크게 동요하시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골로 내려가는 내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보다 혼자 남겨진 아버님을 더 많이 걱정했다. 아버님의 상심한 마음보다 앞으로 아버님을 어떻게 보살펴 드려야 할지에 대한 부담감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셔서 발인이 일요일로 잡혔다. 실질적으로 조문객을 맞을 시간이 토요일 하루밖에 없어서 오후 시간이 많이 분주했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91세라는 나이 때문에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신 걸 다행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도 어머님이 며느리인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가신 것 같아 그동안 어머니께 서운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을 보내드리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웠다. 특히 매장과 화장 사이에서 아버님과 자식들간에 의견이 갈렸다. 이미 선산에 가묘까지 준비해 둔 상황이라서 당연히 매장을 생각하고 계셨던 아버님은 처음에는 화장을 완강히 반대하셨다. 며느리인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지만, 우리 자식 세대에게 산소 관리를 넘겨주는 건 큰 짐이 될 것 같아서 아버님을 설득하는데 동참했다. 아버님의 손을 잡고 서운한 마음을 달래 드리며 차분히 말씀드리자 결국에는 자식들의 의견을 따라주셨다. 감사했다.


입관식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혹시라도 무서운 마음이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누워계시는 어머니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여서 내 마음도 편안했다. 어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으신 수의를 곱게 입고 계셨다. 간소화된 절차에 따라서 일부만 남겨놓고 나머지 절차는 이미 마친 상태였는데 아버님은 또 그 부분이 못마땅해서 역정을 내셨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큰 소리를 내시는 아버님을 겨우 진정시켜서 입관식을 무사히 마쳤다.


아버님은 조문객을 접대하느라 바쁘셨다. 보는 사람들마다 밥 먹고 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에서는 별로 슬픔이 보이지 않아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밤이 되자 한쪽 구석에 앉아 자신이 어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그렇게 되었다며 가슴을 치면서 우셨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식사 시간에 맞춰서 몇 번 제사를 지냈고 발인제를 끝으로 장례식장을 나섰다. 아버님은 화장터에 가시는 대신 어머니를 모실 산소에 먼저 가셨다. 가묘의 봉분을 걷어내고 땅을 파는 일에 장비를 동원하는 문제를 두고 또 한 번 아버님과 마찰이 있었다. 예전에 시골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아버님이 손수 삽으로 땅을 파고 매장을 돕던 때만 생각하셔서 장비가 필요없다고 우기셨다. 다 비용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아버님이 마음을 돌려주셨다.


산소에 유골함을 매장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 모든 장례절차를 마쳤다. 길고도 힘든 3일이었다.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이토록 어렵고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일정이 있어서 먼저 돌아간 가족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시누이의 주도하에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어머니가 남기신 유품은 옷가지 몇 벌과 지갑 안에 이만원도 안되는 돈이 전부였다. 겨울에 신으시라고 사드린 털신 한 켤레는 한 번도 신으시지 않은 채로 신발장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버님을 모시고 나가서 어머니의 사망신고를 했다. 혼자서 하시면 더 마음 아프실 것 같아서 자식들이 있을 때 하시도록 했다. 종이 몇 장으로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너무 간단해서 너무 허무했다.


처음 어머니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되짚어 보았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오히려 아들에게 부담이 되었던 어머니가 이제 그만 아들 걱정을 내려놓고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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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삼가 어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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