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건강검진을 하고 왔다. 술도 많이 마시고 고기도 좋아하고 담배도 피우고 운동도 안하는데, 혈압도 정상이고 걱정했던 대장도 깨끗하단다. 게다가 골밀도까지도 양호하단다. 남편이 건강하다니 기쁜 일이긴 한데... 이게 좀 억울하단 말이지. 나는 담배도 안피우고 술도 안(은 아니고 가끔) 마시고 운동도 매일 하는데, 벌써 혈압약을 먹고 있다. 역시 건강도 타고나는 건가?
건강검진을 앞두고 잔뜩 쫄아있던(자신의 죄를 아는거지) 남편은 별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그날 저녁 바로 또 축배를 들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깨끗하게 비워낸 대장에 다시 술을 집어넣고 싶을까. 그래도 건강에 이상이 없다니 그래, 마셔라 마셔!
남편은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이니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나 보다. 별 문제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니 이게 다 그동안 내가 해 준 밥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뭐지? 분명히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왜 안하던 짓을 하지? 검진 항목에 정신과 항목을 추가했어야 했나?
남편의 칭찬과 감사에 겸손하게 '별말씀을..." 했더라면 무척 아름다웠을텐데, 나는 기회는 이때다 하고, "그걸 이제 알았느냐", "내가 밥 하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마누라 잘 만난 줄 알아라" 하며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다 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의 얼굴은 점점 아니꼽게 변해갔고...
그래도 뭐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할 말은 해야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그동안 밥 하나는 진짜 열심히 했다. 평생을 '밥,밥' 하시는 친정 엄마의 잘못된(?) 가정교육 때문에 나도 그 흔한 냉동식품이나 밀키트 하나 사지않고 매일 직접 음식을 해서 밥상을 차렸다. 외출했다가도 어김없이 밥 때가 되기 전에 돌아와서 밥을 했고, 연속해서 두 끼니 밥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밥을 했다. 내 안에 있는 쥐꼬리만한 창의력은 죄다 저녁 반찬을 만드는 데 썼다. 아마도 나는 죽을 때 "꿱"하고 죽는 게 아니라 "밥"하고 죽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이 그놈의 '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그 밥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밋밋하던 내 60년 인생이 어쩐지 '밥' 때문에 화사해지는 기분이다. 그동안 밥 하느라 고생한 나를 위하여 치얼스~~. 오늘 저녁은 특별히 치맥으로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