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뭘 먹는지, 잠을 함께 자는지 각방을 쓰는지 뭐 그런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는 굳이 알고싶지 않다. 그리고 사실... 부부끼리 다정하게 여행을 가거나 아내를 위해서 남편이 깜짝 이벤트를 해주는 모습을 보면 배알이 꼴린다. 내 남편만 저런가, 나만 이렇게 사나 싶어서 씁쓸하다.
그런데, 우연히 TV를 돌리다가 중년 여배우와 (전)판사 남편 부부가 나오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옆동네 학교에 다니던 나와 동갑내기인 그 여배우가 우리 학교 축제 때 했던 연극공연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그 배우가 앞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연예인의 모습은 긴 생머리에 뽀얀 얼굴, 그야말로 누가봐도 연.예.인.이었다. 실물을 본 몇 안되는 연예인이라서 내적친밀감이 들어 채널을 멈췄다.
젊은 부부들처럼 과하지는 않았지만, 연애시절을 회상하며 역시나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 나왔다. 이번에도 배알이 꼴렸냐고? 아니다.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다니 그들 부부가 사는 모습이 어떨지 짐작이 되었으니까. 알콩달콩해봐야 뭐 얼마나 알콩달콩 하겠나.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측은해 하면서 그냥저냥 살고 있겠지.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가슴 깊숙이 꽂힌 부분은 따로 있었다. 27년간 판사생활을 한 남편과 (아역부터 시작해서) 52년차 현역 배우, 두사람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는 거의 최고 경지에 오른 전문가들이다. 아내는, 남편이 일할 때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로 후배 변호사들을 긴장시키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남편 역시 퇴근 후 아내가 하는 연극공연을 관람하며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무대에서 멋지게 해내는 아내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같은 위치에 올라서 있는 동등한 부부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솔직히, 남편에게 인정받는 아내가 무척 부러웠다.
내가 꿈꾸었던 결혼생활 30년 후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어느 한쪽의 포기나 희생없이 함께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사회적으로도 각자의 일을 끝까지 해내고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랐다.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집안 일을 하고 아이들과 씨름하는 모습이 전부인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었던 이유가 육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육아는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포기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누가 포기를 해야 하는지 선택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너무 쉽게 내린 결정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남편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인 줄로 착각했다. 내 일을 포기하는 것이 30년 후에 이렇게 큰 후회로 남게 될 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긴 생머리에 뽀얀 얼굴의 열일곱살 연예인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쉰여덟살이 되었어도 남편에게 존경받는 연예인은 여전히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인 것 같다. 아마도 연예인이어서 그렇겠지... 애를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을테고, 연예인이기 때문에 일을 놓았다가도 다시 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못나서는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