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숙을 끝내고 큰아이가 집에 오면 마치 오랜만에 손님이 온 것처럼 마음이 분주해진다. 마침 추적추적 비도 오고 저녁 찬거리도 마땅치 않아서 아이에게 먹고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날씨 탓에 나는 내심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딸내미는 삼겹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빗소리를 들으니 불판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이 생각난다고 했다. 가족 단톡방에 남편과 둘째에게도 메세지를 남기고 집앞 삼겹살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밖에서 온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술 좋아하는 남편과 큰애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런지 내 입맛에는 고기가 너무 느끼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의 외식에 기분이 들뜨고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정작 고기맛은 내 기분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먹는동안 내가 음식맛이 별로라는 얘기를 몇번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금 먹다가 일찍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잘먹히지가 않는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자 둘째가 나에게 그냥 먹지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으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좀 황당하고 무안했다. '불평'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평가'를 한 것 뿐이라고 대꾸했지만, 내가 종종 그럴 때가 있다며 고치라고 말했다. 즐거운 식사 분위기에서 내 말이 거슬렸나 보구나 싶으면서도 은근히 노여운 마음이 들었다. 괜시리 별거 아닌 일에 분위기를 망칠까봐 더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내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람마다 음식의 맛을 다르게 느낄 수 있고, 먹으면서 맛이 있네 없네를 말하는 건 예사로운 일 아니던가. 별 뜻 없이 했던 말인데 그게 그렇게 거슬렸나. 엄마한테 훈계를 할 정도로? 그랬다. 딸 아이의 말을 듣고 내 기분이 나빠진 포인트가 바로 그 부분이었던 것이다. 감.히. 엄.마.를. 훈.계.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지나치리만치 냉정하고 객관적인 엄마였다. 아이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꼭 짚고 넘어갔다. 행여라도 다른 자리에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일방적으로 아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따지고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가려냈다. 나는 언제나 합당한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는 심판관이었다. 내 말과 행동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고 권위가 있었다.
나의 심판을 받던 아이에게서 이제 거꾸로 내가 지적을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이성적으로는 아이가 불편하게 느꼈던 내 행동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아이 앞에서 내가 틀릴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리고 이런 옹졸한 속마음을 내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더 씁쓸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앞으로 아이들에게서 불편한 충고를 점점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나에게 하는 충고도 (예전에 내가 아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남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거라는 걸 잊지 말아야한다. 하지만... 고쳐야겠다는 생각보다 아이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 같다. 몇번을 더 깨져야 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