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 웜코튼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by 서정희

20대 초반부터 똑같은 향수를 사용했다.

클린 웜코튼.
15년 정도 된 것 같다.

학교 앞 올리브영에서 친구가 호들갑 떨며 골라줬던 향수를 이렇게나 긴 시간 함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굳이 바꿀 이유가 없기도 했고, 이 향을 처음 ‘촤락’ 뿌렸을 때의 짜릿함과 설렘을 주는 향수가 없기도 했다.
상쾌하면서도 폭닥하고, 편하지만 마냥 물렁한 느낌은 아니라 마음에 쏙 들었었다.

30대 중반이 되었을 때였다. 흙 작업은 놓아버리고, 이룬 것 없는 철부지 아줌마가 된 기분이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도 없고, 괜히 엄한 데 화풀이하고 싶었나 보다.
갑자기 잘 쓰던 향수가 못마땅해졌다.

‘삼십 대 중반의 아줌마가 쓰기엔 너무 가벼워!’

향수 때문이 아니었을 텐데, 그 탓에 나 스스로를 가벼운 사람이라 여겼다. 그 상태가 2년 가까이 지속됐다.

남은 향수를 털어 쓰고 더 이상 구매하지 않았다.
편집숍에서 시향도 해보고, 다른 향수도 사봤지만 마음에 쏙 드는 향을 찾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나는 한 놈만 패는 성격이라 여러 개의 향수를 기분에 따라 뿌리지 않는다. 항상 기분의 정중앙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편이라 그날의 기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심을 잡아주는 데 그 향수도 한몫했던 것 같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올초부터 오늘까지도 나에게 딱 맞는 향수를 찾기 위해 내 성향과 취향을 GPT와 치열하게 토론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나, 아직 클린 웜코튼이 좋을 것 같아.”
“그게 너의 정체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 맞아. 내 정체성이 될 수도 있겠다!
왜 굳이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걸 바꾸려 했을까?
비싼 향수를 뿌린다고 내가 비싼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데, 흔한 향수라 해서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특별함을 찾으려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을까.
‘정체성’이란 단어에 마음이 와락 내려앉았다.
난 특별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특별한 사람인데 말이다.

GPT를 사용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인식도 조금은 있었다. 물론 눈을 마주하며 대화할 때의 온기는 없었다. 따뜻함은 없지만 통찰력은 있었다. 가끔은 추운 날 마시는 핫초코보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이 정신을 맑게 해 줄 때도 있다.
바로 온라인에서 큰 사이즈를 구입했다.

아, 찬바람 부는 요즘, 쫙 뿌리고 나가면 얼마나 짜릿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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