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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쏨 Nov 05. 2022

더 봉긋하게!

정량을 알기 위해 

더 봉긋하게!  _ 정량을 알기 위해



5g의 립밤 용기에는 대략 6g의 오일이 들어간다. 분명 6g을 담았는데, 5g이 되어있는 마법 같은 일은 액체 오일이 고체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대부분의 액체는 고체가 될 때 밀도가 높아져 부피가 줄어든다. 하지만 질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니, 질량의 단위인 그람(g)으로  표기해야 한다면 [6g 립밤]이라고 표기해야 맞지 않을까? 이런 나의 혼란을 비웃듯이 모든 립밤 용기에는 정확히 [5g]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용기의 용량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액체가 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가 화장품을 직접 만드는 사람에겐 참 억울하다. 그렇다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없는 오류에 집착하며 ‘6g을 넣었지만 부피가 줄어들어 5g처럼 보입니다.’ 라거나 혹은 ‘용기의 용량은 물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지만 오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6g입니다.’라고 쓰는 것도 참 구질구질하긴 하다. 






립밤을 만들 때는 액체가 고체가 되는 과정에서 부피가 줄어들 것을 예상해서 용기보다 조금 더 봉긋하게 올라오도록 오일을 담아야 한다. 액체상태의 표면장력으로 인해 용기를 채우고 더 많은 내용물이 담겨도 어느 정도까지는 봉긋하게 솟아오를 뿐 넘쳐흐르지 않는다. 


 어. 느. 정. 도. 는. 


중요한 것은 이 정도를 오로지 ‘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료를 배합해서 섞고 적당한 온도로 녹이는 과정을 지날 때까지만 해도 


‘어머, 이렇게 쉬운데 그동안 사서 썼다니, 이제부턴 계속 만들어서 써야지!’


라고 의지를 불태우다가 용기를 타고 줄줄 흐르는 오일을 보며 나의 다짐도 함께 흘러내렸다. 입구가 엄지손톱만 한 5g의 조그만 공병에 흐르는 액체상태의 오일을 흘러넘치지 않게, 하지만 줄어드는 부피를 예상하여 꽉꽉 가득 채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넘치기 직전의 구슬처럼 맺힌 위태로운 오일 방울을 보고 있자면 손이 덜덜 덜덜 떨렸다.    


이 찰나의 순간에 넘치더라도 가득 채우는 것이 좋을지, 모자라지만 안전한 게 좋을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한다. (빠르게 굳는 오일의 특성상, 넘치고 모자라는 결과가 순식간에 나타난다.) 립밤 용기는 보통 맨 아랫면에 톱니바퀴로 생긴 롤러가 달려있다. 조금 넘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도르르 흘러 톱니바퀴까지 오일이 흘러가게 되면 이쑤시개로 굳은 오일을 파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추가된다. 그럼 모자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용물이 모자란 립밤은 마치 한입 베어 문 사과처럼 중고의 뽐새가 난다. 먹던 걸 건네 받은 것 처럼 애매하게 남은 빈공간을 불쾌함이 채우고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손끝의 감각이 총동원되어 저절로 손목 스냅이 멈추는 순간 립밤은 완성된다.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외국어는 감으로 때려 맞추는 거라고 강조하시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때려 맞추라고 하실 땐 언제고 치일 정도로 많은 양의 숙제를 내주시던 선생님이셨다. 그때는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다고 구시렁거리며 겨우겨우 숙제를 마쳤는데, 때려 맞출 정도의 감을 익히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립밤 용기를 채우며 불현듯 깨닫는다. 결국 외국어의 감은 잡지 못했지만, 용기가 넘치지 않을 정도의 오일 양에 대한 감은 익히게 되었다. 물론 지난 6년간 수도 없이 용기를 타고 오일이 흘러내린 후였지만.



용기를 채울 때마다 ‘한 방울만 더, 한 방울만 더, 한 방울만 더 넣어볼까...’라고 외치는 나를 발견하며, 나는 역시 넘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넘쳤을 때 비로소 정량을 알게 됨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가끔은 ‘나’라는 용기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이나 관계의 마지노선을 알기 위해서라도 넘쳐흐르게 두어야겠다. 


용기의 정량을 알기 위해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봉긋하게
‘나’라는 용기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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