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 결혼기념일 : 나는 놀이터, 남편은 낮잠
-.서운하다
(형용사) 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이 있다.
10주년 결혼기념일을 무심히 지나간 남편에게 느끼는 내 감정이 ‘서운하다’라는 한 줄로 정의가 가능한 걸까? 그보다 더 깊은 빡침을 표현할 감정 표현 어휘는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그날은 온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토요일이었다.
그날 늦은 오전 내가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거실로 나왔을 때, 소파에 누워 다리 마사지기를 하며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거실에 나왔음을 알아챘으면서도 그는 눈을 감고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걸까? 만약 몰랐다면 그는 오히려 평소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빨래를 개며 아이들에게 한 두 마디씩 건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말을 걸지 않는 느낌.
애써 먼저 결혼기념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느낌.
왜였을까? 남편은 왜 우리의 특별한 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
(결혼기념일을 잊었다고 생각하기엔 무리다. 우리가 각자의 휴대전화에 저장해놓은 일정은 한 대의 태블릿에 연동이 되는데, 내가 저장하지 않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그 일정에 체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잊었든, 알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든 내 기분이 나빠졌단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나는 그것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먼저 그 말을 하면 내가 결혼에 굉장한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일까봐서였다. 단지 남편이 먼저 결혼기념일 이야기를 꺼내면 건조하게 '응, 그래.' 이런식으로만 반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전혀 일언반구하지 않았고 나는 건조한 반응을 보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매 주말마다 오늘은 아이들과 어딜 갈까, 무얼 할까. 내 입에서 먼저 ‘우리의’ 일정에 대해 얘기를 꺼내며 아직 꿈 속을 헤매고 있는 남편을 깨운다. 그러면 내 기척 때문에 슬쩍 깬 남편이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입으로만 '응, 일어나야지. 어디가지.' 하며 귀찮은 듯 건성으로 대답한다. 계속 문 밖에 서서 그의 잠이 깨길 기다리며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비몽사몽 중인 남편을 두고 내가 뒤돌아서면, 남편은 다시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계속 머문다.
남편은 늘 한 번에 일어나는 법이 없고, 내가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언제 나갈건지 애써 화를 누르며 여러 번 깨워야 일어난다.
하지만 난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까지 답답한 실랑이로 시작하는 늦은 주말 오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낮잠을 자고 TV를 보았으며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놀이터에 가고 자전거도 타고 밥도 먹고 카페도 갔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그렇게 그냥 지나갔다.
아니, 그냥은 아니다.
남편에 대한 내 감정과 앞으로 함께할 시간들에 대한 막막함,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민하는 내가 남았다.
맹세컨데 10주년 기념으로 물질적인 선물을 바란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부처럼 큰맘 먹고 여행을 가자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침 주말이니 온 가족이 나가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평소처럼 카페에 가서 시간도 보내고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남편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그는 언제까지 마음 편하게 늘어지게 잠 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