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광안리에 가고 싶을 때
내가 국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다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광안리를 꼽는다. 특히, 해 질 무렵이나 깜깜한 밤에 반짝반짝 빛나는 광안대교의 야경은 언제나 내 마음을 벅차오르게 한다. 바다 한가운데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으로 휘어진 광안대교는 낮에 보는 것만으로도 예쁜데, 까만 밤에 그 곡선을 따라 조명이 켜져 대교 위에 춤추는 빛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만큼 빠져들곤 했다.
생각해 보면 광안리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새로 사귄 친구와 처음으로 떠난 부산 여행에서 사진을 가득 찍은 곳이고 첫 취업 준비 시절, 최종 합격자 발표일 바로 전날 친구와 부산에 가 광안리에서 최종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고는 근처 식당에서 낙곱새와 소맥을 시키고 허한 마음을 달랬던 곳이기다. 대학시절 사귄 남자친구와 광안리의 민락회센터에서 회를 포장해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회를 먹었던 곳이기도 하다.
연인이든 친구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는 꼭 광안리에 가자고 했다. 그 멋진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란히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의 미래도 드넓게 펼쳐진 바다처럼, 늠름한 자태로 우뚝 서 있는 저 대교처럼 찬란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곤 했다. 항상 사람의 일이란 생각하는 대로만 되지 않듯 그렇게 꿈꿨던 미래는 옅어지고 흐려지기도 했으며, 마치 언제 그런 꿈을 꿨냐는 듯 새하얀 신기루처럼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나의 광안리에 대한 애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바다에서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때 꾸었던 꿈이 먼지처럼 사라져 버려도 그저 내가 보고 싶을 때 달려가기만 하면 언제나 크고 반짝이는 다리가 그 자리에 서 있어 주는 것으로도 나는 그 바다를 사랑할 가치가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고도 뭔가 생각할 거리가 생기거나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매번 부산행 기차표를 끊었고 내 몸은 광안리로 향했다. 먼발치에서 광안대교가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여지없이 반가움과 설렘으로 내적 흥분을 느꼈다.
이번 연휴 첫째 날, 나는 또 부산으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예전처럼 좋아하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도 아니었고 어떤 고민이 있거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근 10년 간 새롭게 가고 싶은 곳이 생길 때마다 국내와 해외 여기저기를 다녔던 탓인지 요즘은 여행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도 연휴에 부산행 티켓을 끊은 것이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그냥 오랜만에 광안리 바다가 보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부산은 그리 멀지 않아서 금방 갈 수 있는 데다 '하루종일 바다를 바라보면서 글을 써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항상 부산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탔었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센텀역에서 내리는 표를 끊었다. 센텀역에서 광안리로 가는 것이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안 것일까. 역에 내린 나는 바로 광안리행 버스를 탔다. 얼마 안 가 버스에서 내렸고 여러 번 와서 익숙한 길을 걸었다. 10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광안대교가 빼꼼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날이 풀려 춥지 않았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바다를 볼 생각에 내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이제 대교 전체가 다 보이는 거리가 되었다. 마지막 신호등을 건너면 그리웠던 바다와 조우할 수 있다. 나는 모래사장에 발을 내 딛기 전에 광안대교가 다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모래 밟는 느낌을 느끼며 파도가 치는 곳 가까이로 다가갔다. 운동화가 파도에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한번 보고 저 멀리 수평선을 한번 보면서 눈에 바다를 한가득 담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이 날따라 유난히 바다가 반짝반짝 빛났다.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이 아름다웠다. 윤슬이었다. 한동안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행복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금방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니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감정을 잘 느낀다면 그 반대로 불행의 감정이 문을 두드리는 것도 잘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감정에 무딘 편이었던(아니면 애써 무던한 척하며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보다 감정을 더 잘 느끼게 된 지금이 좋다. 기쁨과 슬픔, 행복함과 서운함, 즐거움과 실망감.. 모든 감정이 소중하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인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잘 들여다보고 자신을 다독이는 법을 조금 더 배워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내가 기분 좋아지는 일을 알고 스스로에게 적당한 시기에 보상을 줘야 한다. 자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즐거움과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멋진 선물인 것 같다.
혼자만의 잘난 척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려 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 아직 오전이구나. 어쩐지 유난히 해가 높게 떠 있다 했어.'
생각해 보니 이 날이 지금까지 광안리에 갔던 내 역사에서 광안리에 가장 이르게 도착한 시간이었다. 아침 바다를 보는 건 오션 뷰의 숙소를 를 예약하고 일어난 다음 날, 창가에서 고개를 내밀어 바다를 내려다보는 게 다였다. 보통은 느지막한 오후 시간이나 해질 무렵에 맞춰서, 혹은 밤바다를 보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였다. 해질 때의 노을 색이 너무 예뻐 광안리는 그 시간대에 도착하게끔 일정을 짰던 탓이다.
처음 본 오전 11시의 바다는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해에 비친 눈부신 잔물결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윤슬이었다. 몇 년 전, 하동 봄꽃 축제를 보러 가는 길에 만난 섬진강의 윤슬 이후 처음이다. 그때 나는 잔잔한 강에 비치는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처음 알게 되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풍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바다의 윤슬은 생각지 못했는데 잔잔한 광안리 앞바다의 푸른 반짝임은 그 못지않게 예뻤다. 내가 광안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한 줄 더 추가되었다.
그리곤 나는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갔다. 원래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들고 갔지만 쓰려고 했던 글은 쓰지 못했다. 다음날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원고 마감을 했다. 이번에도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일하는 것은 또 다른 낭만이었다. 항상 정해진 책상, 자리에서만 일하다 새로운 곳에서, 잠깐 고개만 들어도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충분히 기분전환과 리프레시가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쓰고 싶었던 글은 지금 이렇게 집으로 돌아와 쓰고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다음에 나는 또 광안리에 갈 갈 것이므로 그때 쓰고 싶었던 글을 다시 쓰면 된다. 아니면 그림을 그리거나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다. 무얼 하든 간에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면 넓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건 미래의 그날도 그럴 것이다. 언제고 광안리에 오고 싶을 땐 고민하지 않고 올 것이다. 다음번 광안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한 명쯤 데리고 오고 싶다. 이 멋진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감상을 나누는 건 더더욱 멋진 일 같아서다.
이 날 묵은 숙소는 광안대교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조명이 켜진 광안대교를 또 한참을 바라보았다. 빛의 움직임을 따라 내 눈도 따라 움직였다. 밤 12시가 넘어가는데 바닷가에서 한 커플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슝 하는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불꽃들이 파박 동그랗게 터졌다. 그 커플 덕분에 나는 공짜로 불꽃놀이를 보는 호사를 누렸다.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온다면 꼭 불꽃놀이를 하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이 날은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았다. 새벽에 잠깐 잠에서 깼을 때 슬쩍 밖을 내다보고 다시 잠들었다. 깜깜한 밤의 빛나는 광안대교처럼 나를 설레게, 즐겁게 하는 것들을 언제고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