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렬한 콘텐츠에 익숙해진 우리
지하철 풍경을 바라보면 시대의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다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전철 안에서 각자만의 세상을 즐기곤 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거나, 대학교 시험기간엔 프린트 자료로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지하철 안에는 쇼핑을 하고 드라마를 보고 웹툰,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손바닥 크기만 한 휴대폰으로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우리의 즐길거리는 교체되어 갔다. 본방사수하던 드라마, 두툼한 소설책, 친구들과 뛰어노는 시간 대신에 짧고 화려한 영상 콘텐츠,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웹툰과 웹소설, 1회에 60분씩 보지 않아도 되는 드라마 요약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디지털 미디어와 IT 기술의 발달로 세상은 순식간에 다양한 콘텐츠들로 차고 넘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 보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 많은데 볼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예전에는 지상파 3사의 드라마나 예능이 주 볼거리였다면 지금은 종편, 케이블 채널은 물론이고 웹드라마, OTT 플랫폼의 오리지널 콘텐츠,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까지 봐야 하는 시대다.
콘텐츠의 공급은 범람하듯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더더욱 짧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콘텐츠에 접근한다. 1시간짜리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야 하지만 한 회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5분, 10분만 소요하면 된다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쉽고 빠른 길을 택한다.
내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독하는 유튜브 콘텐츠만 해도 수십 개, OTT 플랫폼에서 현재 시청 중인 콘텐츠도 10개 가까이나 되고 호기심이 생기는 드라마는 초반 요약본부터 먼저 시청한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들 때 가장 손쉽게, 그리고 빠르게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나오는 콘텐츠들은 시청자들의 흥미와 욕구를 정확히 파악해 대부분 재밌다. 한번 재생 버튼을 누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활자로 된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도 꽤 좋아한다. 종이를 손으로 넘겨가며 연필을 들고 인상 깊은 문장에 줄을 치고 텍스트를 읽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행위이다. 전통 매체인 책, 다양한 분야의 뉴스레터, 종이 잡지는 짧은 영상 콘텐츠가 줄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가령, 소설 같은 문학은 긴 호흡으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가며 머릿속에 그리는 스토리에서 상상력을 가미할 수 있다. 교양서나 비문학은 깊고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한 작가의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현실적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생각을 소상히 알 수 있고 그들의 삶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책은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따라가고 평소 생각지 못한 영감을 떠올리게 해주기도 한다.
사실 나는 기본적으로 텍스트, 영상 할 것 없이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책과 영상, 뉴스레터와 매거진 등 각 매체마다 특징과 장점이 다르고 다루는 주제도 매체별로 다양하기 때문에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글보다 시각적인 영상에 훨씬 많이 노출되어 있는 젊은 세대의 콘텐츠 소비 문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긴 글이나 영상을 보는 것보다 짧은 콘텐츠가 빠르고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요즘은 유튜브에서 좋은 책의 줄거리를 요약, 설명하고 간결한 감상까지 덧붙여 주어 굳이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대략적인 내용 파악이 가능하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다. 관심 있는 분야의 강연, 학계의 유명인을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관련 영상이 쏟아진다.
누군가가 나에게 '책을 왜 꼭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젊은 세대들 혹은 책을 즐기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납득할 수 있을만한 필요성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여전히,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는 이동진 평론가의 영상을 발견했다. 국내 영화 평론가 중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 한국 영화 평론의 대중적 관심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과연 책을 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이동진 평론가는 독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질문 1. 왜 글을 읽어야 할까? > 글이 아니어도 지식을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문자를 제외하면 문명과 문화를 다룰 수 없다. 문자의 사용은 시대의 기준이 된다. 대략 5~6천 년 전부터 인간은 문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넓은 의미에서 독서 행위를 시작한 시기가 그쯤인 것이다. 문명 이후의 인간에게 문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고도로 지적인 행위이며, 독서는 인간의 두뇌 활동을 활성화하고 고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질문 2. 왜 책의 형식을 갖춘 글이 중요할까? > 말과 직접 경험을 통해서도 지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책 대신 나무위키나 강의를 보면 되지 않나?‘라는 질문에 이동진 평론가는 동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웹상에서 펼쳐지는 정보의 바다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체계와 진위 여부이다. 예전에는 어떤 상황에서 지식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면, 요즘은 구글 같은 포털에서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무위키와 책을 비교해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빠르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나무위키를 통해 정보를 파악할 것이다. 나무위키는 상세하고 빠른 정보들을 다룬다. 인터넷 정보는 실시간성과 상세성의 강점을 갖추고 있다. 즉, 빠르고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책보다 인터넷이 더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보의 특정화가 어렵다. 너무 많고 잡다한, 불필요한 정보들이 섞여있다. 우리가 원하는 지식이 '밥'이고, 집중된 지식이라면 나무위키의 지식은 '낱알' 즉, 정리되지 않은 지식인 것이다. 책은 정제된 형태로 여러 단계를 거쳐 밥을 만드는 것과 같다. 품질이 보장된 정보를 원한다면 책을 추천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일반인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지식의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온라인상의 정보는 늘 진위 판별이 요구된다. 책도 진위의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책들끼리 상충하는 문제나 떠도는 얘기를 저자가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서 그냥 책에 실린 경우들도 있다. 그런 면에선 책도 진위 판별의 문제가 있지만 책의 잘못된 지식 비율보다 인터넷의 잘못된 지식의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이다. 웹상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지식의 출처를 알기 어려운 반면, 책은 지식 검증과 제작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검수와 수정을 거치는 책과 달리 인터넷은 피드백 과정이 적다. 지식을 다루는 시스템에 있어서 책은 인터넷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검수과정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동진 평론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책을 읽는 것이 원하는 분야에 다가가는 가장 빠른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책은 경제적이다. 예를 들어,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의 가격을 비교해 본다면 영화는 한 편에 15,000원 정도, 책 한 권에 17,000원 정도이다. 비슷한 가격이다. 사람에 따라 영화는 책보다 감각적인 경험이 강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한번 보고 나면 끝이다. 반면, 책은 읽고 난 후에도 그 형태로 남아있게 된다. 영화보다 책을 읽을 때 더 긴 시간을 들여야 하므로 적은 금액으로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이처럼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대개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책에서 얻는 단편적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과 개별적 요소를 함께 읽는 총체적인 시각이다. 재미보다는 전체적인 맥락과 지식의 진위, 핵심 파악이 중요하다. 정보의 진위와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효율적인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소비는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다. 효율을 추구하는 콘텐츠의 뚜렷한 장점 이면에 숏 콘텐츠는 우리의 사고 과정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짧은 요약본으로는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감상자가 주체적으로 '매개체'이자 '필터'가 되어 이해하고 요약해서 구조화하는 과정을 생략하게 된다.
기승전결의 과정을 천천히 풀어나가는 책, 긴 호흡의 콘텐츠들은 여러 방면에서 우리의 뇌를 자극한다. 글을 읽으며 맥락을 파악하고 사유하는 것은 이해력과 문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 책을 통해 인간사회를 거시적으로 보는 시각과 지혜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알고리즘 세상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은 하루아침에 책과 친해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비자의 사용 기록, 패턴, 취향을 분석해 개개인이 만족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받다가 스스로 장르를 발견하고, 몰랐던 취향을 탐구하여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긴 시간을 들이는 것은 성가신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몰랐던 것을 만날 때 변화할 수 있다. 같은 것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는 본연의 맛조차 잊어버릴지 모른다. 한정된 시간 내에 실패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무언가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가끔 우리는 그 틀을 적극적으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
책을 읽으며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해 보자. 인간의 감정과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보고 세상의 변화를 읽어보자. 그러니 우리는 조금씩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너무 두꺼워 손대지 않았거나 보고 싶긴 한데 내 취향은 아닐 것 같아서 미뤄둔 책을 집어보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에 쏙 든다면 나라는 사람의 폭을 넓힐 것이고, 아니라면 나의 취향을 확고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는 이런 사람도,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하고 이해할 기회를 얻게 된다. 스스로 자신이 정의한 모습과 한계를 깨부수려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한다. 사람은 매일매일 변화할 때 성장할 수 있다.
<참고>
성인 53%가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시대, 여전히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유튜브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