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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비키 Jul 01. 2018

90년대를 회상하며...

각종 대형사고들이 일상처럼 터지던 그 때,  최선을 다해 버틴 우리들.


주말 아침에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보다가 페친님 포스팅을 보고야 알았다. 어제(2018.6.29)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던 날이었다는 걸.  (관련기사: 삼풍백화점 붕괴·화성 씨랜드 화재 참사…강산 두 번 바뀔 동안 변한 건 없었다, 아시아경제)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현장 (출처: 아시아경제)


한창 예민하던 10대시절에 발생했던 사고이니 잊었을리야 없겠다마는, 바쁜 일상속에서 날짜는 잊고 살다보니, 어제가 그 날이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그 시절을 회상하니  뜨거운 마음으로 분노했고 한편으론 좌절했던 20살의 내 모습이 생각나 끄적이고 싶어졌다. 매일같이 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끓으면 견딜수 없어 메모 한 줄이라도 써야했던 그 당시 습관이 잠깐이지만 되살아나려는가 보다.


미리 밝혀두건대, 이 포스팅은 뉴스를 공유하던 평소 포스팅과 달리, 매우 개인적인 느낌을 나눈 글이 될 거고 (감성적? 주관적? whatever...), 머리속에 매우 빠르게 떠돌아다니는 생각의 파편들을 따라 잡으려 정신없이 타이핑하고 있는 손가락 덕분에 전혀 정리되지 않은 글이 될 거다. 90년대 우리 사회의 끔찍했던 사건사고들을 목격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글이라 우울한 글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속풀이 글로 읽힐 수도 있으니 관심없으면 패스하길 권한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 4학년 1학기 여름방학까지, 나의 꿈은  방송기자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대학  3학년 2학기 초반까지는 '사회부' 방송기자를, 이후 4학년 1학기까지 약 1년간은 '국제부' 기자였다. 기자들이 정치부, 사회부 등 순환보직한다는 걸 전혀 모르던 시절이니 그러려니 하자.


온라인 매체가 생기기 전이었고, 이미 영상의 시대였음에도 '뉴스'하면 여전히 '신문' 파워가 훨씬 강하던, 소위 KBS 기자보다 조선일보 기자 되는 것이 비교조차 안될 만큼 훨씬 나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뉴스에선 마이너(!)인 방송을 택한 건, 아마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어도 내 안에는 뉴미디어를 쫒아가려는 나름의 DNA가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뉴스에선 방송이 뉴미디어였으므로.


방송은 그렇다치고, 그러면 기자를 꿈꾼 건 왜였냐고 묻는다면, 중고딩시절에 마치 일상이라도 되는 양 벌어지던 대형 사건사고들 때문이었다. 당시 사건사고들은 너무도 강력해서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만큼, 검색없이 기억으로만 나열해보겠다. (연도가 틀렸다면 알아서 확인해주길)




93년 5월 기차전복사고-7월 아시아나 추락사고-10월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사상 최초로 국민투표에 의해 평화스럽게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당시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부정부패척결을 강력히 펼치던 시절이라 인기가 매우 높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 해동안 기차-비행기-배가 모두 사고가 일어난 건 군사정권 시절에도 없던 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선 대통령 때문이라는 원망이 나왔고, 7월 아시아나가 추락했을 때는 "다음엔 배가 가라앉는 것 아냐?"라는 예언 아닌 예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이는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그때 난 중학생이었다.


94년 성수대교 붕괴.


94년 가을의 어느 날. 10월쯤으로 기억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당시는 고등학교에 반마다 TV가 설치된 곳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학교는 강제적으로 아침 7시까지 등교해서 밤 10시까지 있어야 하는 곳이다보니, 그때의 우리 세대들은 세상과 담쌓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강요받으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고분고분 강압에 굴복할 10대일리가 없지! 더구나 드세다는 여고였는데. 아이들은 워크맨을 가져와서 선생님 몰래 라디오나 음악을 들으며 소소한 반항을 즐겼다.


청소년들에게 아침 7시는 한창 자야 할 시간이니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대놓고 엎드려 잤지만, 어디서나 꼭 모범생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시간에도 열공하는 몇 몇이 굿모닝팝스를 듣겠다며 라디오를 틀었다가 속보를 듣고 반 전체에 알렸다. 멍때리며 잠에서 간신히 깼다가, 소식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소식을 들은 건 아마 오전 8시 조금 넘은 시간, 사고는 8시 전이었을 거다. 대부분 학교들의  등교시간이었고, 성수대교 붕괴로 희생됐던 사람들은 일찍 등교하던 고3 언니, 오빠들이었다.  


그날 수업은 최악이었다. 국어 선생님의 탄식이 기억에 난다. 어쩌다가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거길 지나갔냐며, 국어 선생님은 한탄을 했었다. 한강 전망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어떤 사람이 모닝커피를 마시며 한강변을 바라보다가,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을 목격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 사람은 너무 놀라서 게임 장면을 봤다고 순간 착각했다는 인터뷰도 기억난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현장


지금도 나는 아주 가끔씩, 한강다리 위를 지날 때마다, 다리가 무너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마치 내가 당한 것 마냥 다가왔던 것 같다. 아마도 나랑 한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던 꽃다운 언니, 오빠들이 희생된 때문인가보다. 대학에서 성수대교 희생자들이 다니던 학교 출신 동기들이 몇 몇 있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강렬해졌다.


95년 봄,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95년 봄엔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가 있었다. 역시 등교길이었고, 이번엔 중학교 아이들이 학교가다가 갑자기 폭발한 가스로 그 자리에서 스러져갔다. 제대하고 3일된 대학생도 희생됐다. 길을 지나가던 아줌마, 아저씨들도 사망 혹은 부상을 당했다. 그냥 우리처럼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길을 걷다 갑자기 생을 달리한 사고를 보면서, 당시 나의 마음은  부실공사가 만연했던, 빨리빨리 근성의 우리 사회에 대해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폭발을 겪은지 한두달 가량 지난 95년 여름.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많은 이들이 희생된 대형 사건이다. 평일이었는데, 시험기간이라 일찍 집에 왔고, 공부하기 싫어서 엄마랑 TV를 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갑자기 화면 하단에 대형자막이 뜨던 건 선명히 기억난다. "삼풍백화점 붕괴."


그 글자가 얼마나 선명하게 남아있는지, 지금도 그 글자 이미지 자체가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어 있다. 2014년 세월호도 엄청 충격이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내겐 1995년 삼풍백화점이 더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바다보다 육지가 생활반경인데다, 그 정도 규모의 대형사고를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일 거다. 앞선 사고들도 끔찍했지만, 삼풍사고에 비하랴! 청소년 시절에 목격한 참혹산 사진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다시 봐도 공포스럽다. ㅎㄷㄷ)


1995년 6월 29일의 삼풍백화점


이후 어떤 건물이든 사람이 복작거리는 곳을 갈 때마다, 많은 이들이 한동안 "혹시 이 건물은 괜찮나?"하는 공포에 시달렸던 걸로 알고 있다. 삼풍 희생자들은 의외로 저녁 찬거리를 사러 백화점 마트에 들렀던 주부들, 백화점 직원들 등 소소한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96년 한총련 궐기사태.


96년엔 한총련(한국대학생총연합) 궐기사태가 있었다. 아마 이것이 80년대부터 이어져왔던 민주화투쟁의 맥을 잇는 마지막 대학생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 했고, 20대 미만의 청소년 세대들은 심각하리만치 관심이 없었다.


철이 없어서? 어려서?

그렇게 치부하기엔 이미 우리는 앞서 사회의 대형사고들을 일상처럼 겪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80년대 학번들같은 정치투쟁이 더 이상 우선순위가 되지 않았다.


길을 가다 가스가 폭발하고, 등교하다가 다리가 무너지며, 쇼핑하다 죽고, 반찬거리를 사다 건물에 깔리는 세상이었다. 이념이 뭐가 중요할까. 일상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를 살면서, 일상의 모든 것이 위험일지도 모르는데.


1996년 농성중인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


그래서인지 한총련 사태는 대학생들조차 환영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대학의 학생 운동은 그 이후로 변했고, 한총련 사태는 대학생들의 외면속에 조용히 사라져갔다.


96년을 기점으로 대학가는 '집단문화/정치투쟁'의 시대가 저물고, '개인문화/글로벌시대 인재되기'가 중요 키워드로 부상했다. 각 학교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다. 97년 이후로도 간간히 학생운동이 있었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이 강렬했던 외대만해도, 97년 이후의 학생운동 참여자는 재학생의 10% 미만일 정도로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했다. 대신 이제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등록금 마련, 취업을 위한 성적관리가 중요해졌다. 작금의 대학생들의 스펙쌓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자 과도기였던 것이다.


97년 12월 2일, IMF 구제금융 시작.


대학에 들어갔을 때, IMF 가 터졌다. 12월 2일. 친구와 떡볶이를 먹으며 분식집 아줌마의 탄식 속에서 뉴스를 접했다. 이미 그 전부터 9월, 10월, 11월 연일 주가가 하락하고, 당시 700원 가량 하던 달러가 2000원까지 오르는 것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것을 생생히 목격했지만, 정작 IMF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리자 힘이 빠졌다.


한참 지나서야 알았지만, 당시 중학교 단짝은 집안이 파산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살았다며, 몇 년이 지나서야 내게 연락을 해왔다. 같은 과 남자 동기들의 절반 이상이 예정보다 빨리 군대를 갔고, 여자 동기들은 몸이 좀 아프다는 이유로 휴학했다. 그 모든 것이 20살 어린 마음에 남아있던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것도 역시 나중에야 알았다. 그 모든 건 IMF라는 키워드로 묶여있었다.


97년은 IMF외에도 7월에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했던 해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했던 탑 성우가 사망했고, 유명 정치인도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99년엔 기사에도 언급됐듯 씨랜드 화재사고가 있었다. 앞서 사고들로 중고딩들이 대거 희생됐던 게, 이번에는 유치원생까지 확대됐다. 기가 막혔고 더 이상 분노할 힘도 없었다.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섹션은 무엇일까?  정치뉴스? 종이신문 대부분이 정치기사를 제일 처음에 싣는다. 하지만 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신문의 이런 포맷이 너무 싫었다.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가는 건 국민이다. 국민이 일상에서 황당하게 죽어가는데, 당시 정치면 기사의 헤드라인은 '3김 파워', '영호남 갈등'이 10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은 보수-진보, 세대갈등이 이슈지? 키워드만 바꼈을 뿐 똑같이 반복되는 프레임이 너무 싫다.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는 극혐수준으로 싫어졌다.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욕하는 모든 행태들도 다 싫다. 사람 위에 사람 없는데, 특정인을 우상시하는 행태도 싫다.


특히 아직도 80년대에 갖혀있는 작금의 정치권 분위기는 최악이다 (미디어 업계도 이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미디어 업계에서 10년 이상 종사한 사람으로써, 시장의 쇠퇴에 여러 정책들 요인이 크겠지만, 이러한 이념적 성향에 매어있는 똑똑한 인재들이 너무 많은 것도 산업 쇠퇴와 무관치 않다 싶다.)


그 시절 운동한 것이 자랑이라면 당신들 세대에서만 공유해라. MZ세대들에겐 90년대 사건사고조차 암울하게 들릴텐데, 호랑이 담배피던 80년대는 왜 자꾸 소환하는지. 21세기에 80년대 얘기 좀 안할 수 없을까. 꼭 할 거라면, 경제 성장, 올림픽 등 국민들 기억 속에 즐거웠던 걸 얘기하면 얼마나 좋냐 말이다.


그 시절 나는, 왜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톱기사는 될 수 없는지, 왜 사회면이 헤드라인이 되는 건 늘 사건 사고여야만 하는지, 답답해 미칠것만 같았다. 무관심으로 변한 지금에 비해보니, 참 젊었다 싶다. (물론, 원래 평범한 것이 아니라 '특이한 것'이 뉴스가 된다는 기본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뉴스의 기본 생리를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없기를.)


99년, 없는 돈을 모아 뉴욕으로 갔을 때, 폭스TV 아침뉴스를 보고 충격을 먹었다. 날씨, 사건사고, 지역소식(NY City 소식), 민간정책  등의 사회뉴스가 메인으로 나오고, 뉴스의 진지함 대신 유쾌함과 발랄함이 뒤덮었다. 폭스TV 뉴스의 논조는 뒤로 하고, 일단 유쾌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진행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뉴스와 엔터가 섞인 '뉴스쇼' 형식의 프로였다는 걸 알았지만(당시 한국엔 그런 형식이 없었다), 내겐 그것이 엄숙한척 하지 않고 뉴욕시민 눈높이를 맞춰주려고 애쓴 '뉴스 포맷'으로 보였다. 결과적으로 착각이었으나, 여하튼 당시 나는 뉴스의 중심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덕분에 지금도 미국을 가면, 폭스TV부터 틀곤 한다. 습관은 아니고, 걍 그리움이라고 해두자.


인재 사고의 글로벌 확장, 2001년 뉴욕 911 테러.


마지막 정점은 2001년 뉴욕 911테러 였다. 2000년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월스트리트 쌍둥이빌딩이 눈앞에 보이던 jersey city의 아파트를 쉐어해서 살았었다. 지인이 월가에서 일하고 있었고, 간신히 탈출하자마자 1분뒤 건물이 무너졌다고 했다. 미국에서 나를 딸처럼 아껴주셨던  목사님이 그 비행기를 탈 뻔했다가 5분전에 비행기를 바꾸셔서 사셨고, 역시 중학교 또 다른 단짝 친구는 실제로 그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 6개월 이상을 실어증에 걸렸었다고 했다(다행히 친구는 구조되서 지금은 잘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했던 911 테러도 내겐 국내 사고처럼 일상의 사고로 다가왔다.


NYC 911 Attack, 2001


지금도 난 신문이나 잡지를 볼 때 사회면부터 보는 습관이 있다(TV뉴스는 어쩔 수 없지만). 중고딩 시절 신문 순서대로 정치 뉴스부터 보던 것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대학시절 의도적으로 바꾼 이후, 이제는 습관처럼 굳어진 셈이다. 너무 커다란 사고들이 일상처럼 터지고, 국민들은 아픔을 채 헤아리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들을 마주해야 했던 극도로 비현실적이던 시기가 하필 인생에서 가장 예민했던 10대 시기와 맞물려 있었으니 어쩌겠는가.


감성보다 이성이 강한 성격이라 쉽게 어떤 사건에 이입하는 스타일은 아님에도, 그 때의 모든 사건들은 이상하게 내가 겪은 것마냥 다가온다. 10대 시절이라 그랬나보다. 그래도 그것은 슬픔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어쩌면 감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고가 감사라는 건 전혀 아니니 오해는 금물!)


그래서 1987 같은 영화들을, 난 보지 않았다. 내용은 알지만 공감을 하기엔 87년의 나는 너무 어려서, 머리로 이해만 하는 영화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 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냈던 이유로, 더 이상 이념 논리에 매몰된 콘텐츠나 사상은 격한 거부감부터 들어서 보지 않는 편이다. (21세기에 80년대 얘기 좀 안할 수 없겠니? 꼭 할 거라면, 경제 성장, 올림픽 등 국민들 기억 속에 즐거웠던 걸 얘기하면 얼마나 좋냐 말이다.) MZ세대들에겐 90년대 사건사고조차 암울하게 들릴텐데, 호랑이 담배피던 80년대에 매몰된 작금의 사회 분위기라니.


대신 내 기억에는 90년대의 사회 이슈들이 더 강력하게 남아있다. 그 시절을 잘 견딘 내 자신이 대견하고, 부실공사로 인재를 만들어냈던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분노와,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안쓰러움이 공존하던, 혼란했던 마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씩 가라앉게 된 것도 감사하다.


하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한 슬픔이 남아있는 걸 보니, 역시 그때의 시간들이 힘들긴 힘들었나보다. 그 당시 10대 시기를 보낸 30대 중반-40대 초중반의 분들이라면, 같은 시기를 잘 견디며 왔다고 토닥토닥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


긴 글이다. 정리없이 썼고, 급하게 타이핑하느라 오타가 나는 것만 delete 키 누르며 썼다. 아마도 문맥이 이상할 거다. 그래도 그냥 순간의 감정과 기억을 메모해본 걸로 됐다.  


 #긴글 #90년대 #시사정치 #역사 #사건사고 #사회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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