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섬은, 4000만송이 애기동백의 계절
이생진 시인은 ‘혼자 피는 동백꽃’에서 “꽃은 외로워야 피지/외롭다는 말을 꽃으로 한 거야”라고 노래했다. 매혹적으로 붉게 핀 4000만 송이 동백꽃 앞에서, 허공에 진눈깨비 몰아치는 날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여기저기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한다. 아마 관람객들 자신도 세상에서 ‘혼자 피는 동백꽃’이었나 보다. ‘섬 겨울꽃 축제’가 한창인 전남 신안군 압해도 ‘천사섬분재정원’의 요즘 모습이다.
여타의 꽃들이 모두 겨울잠에 들어간 이때 강한 추위를 견뎌내며 절정을 이룬 꽃이 바로 애기동백이다. 꽃이 동백보다 작으므로 애기동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산에서 피어나는 차꽃’이라는 의미로 산다화(山茶花)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애기동백(Camella Sasanqua)은 동백(Camella japonica)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우선 피는 시기가 다르다. 애기동백은 겨울이 시작될 무렵 꽃이 피어 1월에 절정을 이루지만 동백은 겨울이 가려할 때 피기 시작해 3~4월에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겨울에 피는 애기동백을 동백(冬柏)이라 불러야 하고, 동백은 춘백(春柏)이라 불러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꽃이 지는 모습도 다르다. 애기동백은 꽃잎이 각각 흩어지면서 떨어지는 반면 동백은 통꽃 그대로 떨어진다.
#꽃은 외로워야 피는 것, 우리도 세상에서 혼자 피는 동백꽃일까
신안군은 지난 12월 9일부터 이달 31일까지 ‘천사섬분재정원’에서 섬 겨울꽃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분재정원은 압해도 최고봉인 송공산(230m) 남쪽 자락 13만㎡(3만9000여 평)의 부지에 자리 잡았다. 그림 같은 압해바다를 앞에 두고 국내 최대 애기동백숲과 분재원, 사계절 꽃피는 초화원, 조각공원, 저녁노을미술관 등이 있는 예술공원이다. 2020년에는 전라남도에서 꼭 가봐야 할 불루이코노미 명품숲에 선정되었으며, 최근에도 ‘별미 따라 전남 한 바퀴 추천 여행지’에 선정됐다.
‘천사섬분재정원’ 애기동백숲에는 10년생 2만여 그루 이상의 애기동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미로처럼 이어진 3km 남짓 탐방로 사이로 온통 붉은 동백의 세상이다. 군데군데 플라워월(flower-wall)과 플라워아치(flower-arch), 늦은우체통 등 볼거리와 포토존이 제공되어 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동백꽃의 향연에 흠뻑 빠져들고, 어느새 애기동백숲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카페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천사섬 분재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작은 고깃배와 지주식 김발이 촘촘하게 박힌 서정적 느낌의 압해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애기동백꽃 구경을 마쳤다면 쇼나 조각원과 사계절 꽃이 피는 초화원을 지나 분재원에 가봐야 한다. 분재원에는 팽나무, 향나무, 소나무 등 수령을 다 합하면 족히 수 천 년은 넘을 작품들이 많다.
#1500년 주목 분재 앞에서 숙연해지는 사람들
분재원에서 관람객들에게 가장 관심을 받는 작품은 실내온실의 1500년 된 주목(朱木) 분재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은 주로 고산지대에서 사는데 어떻게 저런 분재로 만들어졌을까? 의아해진다. 자연을 떠나와 분 생활 만도 45년을 넘었다니 참으로 희귀한 작품이다. 사람들은 분재 아래 관리 표찰에 붙은 ‘가격 10억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진다. 밑동은 굵은 고목으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잔가지 잎사귀에서는 시퍼런 기운이 왕성하다. 푸른 잎에 살짝 체온을 보내보니, 1500년의 숨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면 반투명 온실에서 분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목과 마주한다. 열쇠가 채워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음에 자세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수령 2000살 이란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래며, 저마다 20억? 30억? 가격을 매겨보고 발길을 옮긴다.
#저녁노울미술관에서 느끼는 남도의 향과 멋
분재원 우측에 있는 ‘저녁노을미술관’은 시원한 압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송공산 자락에 자리한 2층 규모의 미술관이다. 신안 앞바다의 파도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지어져 외관도 아름다운데 그 이름마져도 시적이다.
미술관에는 신안 출신인 우암 박용규 (愚岩 朴容奎) 화백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박 화백은 남종화의 중흥조인 남농 허건의 외손으로 태어나 서남단 절해고도에서 화인으로 살면서 탄생시킨 주옥같은 300여 작품을 기증했는데 그 뜻을 기려 신안군에서 전용전시관을 마련해 주었다.
1층 전시실에는 섬겨울꽃 축제에 맞춰 애기동백숲의 풍경을 담은 회화전이 열리고 있다. 작품마다 그림인지 사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 아름답다.
미술관 한쪽에는 3500여 권의 책을 비치하고 있는 북카페도 있다. 카페 앞 테라스에서는 압해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노을 지는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 이보다 더한 호사가 있을까 싶다.
# 신안군의 심장, 압해도 송공산 트레킹
천사섬 분재정원을 뒤로하고 송공산 트레킹에 나선다. 송공산은 분재정원 바로 옆으로도 올라갈 수도 있지만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송공산주차장 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주차장은 산악회 버스와 승용차들로 빼곡하다. 송공산 둘레길은 원점 회귀가 가능한 약 7km 코스로, 잘 조성된 둘레길의 이정표를 따라 우측으로 한 바퀴 돈 후 정상에 이르렀다 하산하는 코스다. 높낮이가 가파르지 않은 데다 호젓하게 걷기 좋아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다.
송공산 정상에 서면 압해도를 중심으로 신안군의 혈관들이 퍼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압해도는 육지 바로 앞에 있다고 해서 ‘앞에도’로 불렸다가 한자로 압해도로 바뀌었다는 설과 섬이 누를 압(押)과 바다해(海)의 의미대로 ‘바다를 누르는 형상’이라는 뜻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예로부터 서남해의 요충지에 위치한 압해도는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설치되는 등 백제의 해상활동에서 거점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통일신라 말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대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송공산 정상에는 둘레 230m의 송공산성(宋孔山城)이 있다.
2008년 압해대교(목포~압해도)가 놓이면서 신안군청도 목포 더부살이를 끝내고 압해도로 옮겨왔다. 2013년에는 김대중대교가 놓이면서 무안 운남을 거쳐 신안 북부권인 지도, 증도, 임자도와 이어지고 2019년 천사대교 개통으로 신안 중부권인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와 연결됐다.
현재 계획 중인 추포도~비금도 연도교 건설공사가 완공되면 비금·도초는 물론 장차 신안 남부권인 하의도, 장산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섬 속의 섬, 압해도 가란도도 가볼 만
가란도는 압해도 대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압해도의 부속 섬이다. 아름다운 난(蘭)이 많아 아름다울 가(佳) 난초란(蘭) 써서 가란도라 부른다. 최고봉이 72m로 섬 전체가 갯벌과 맞닿은 완만한 지형으로 해안선 길이가 6km인 작은 섬이다. 2006년만 해도 92세대에 531명이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64세대 92명이 바다에서 굴, 꼬막, 갯지렁이, 낙지, 감태 등을 채취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예전에는 200여m 떨어진 압해도 숭의선착장까지 도선을 타고 다녔으나 이제는 목재 보도교가 놓여 사실상 육지나 다름없다. 섬 내에서 주민들은 주로 전동카트를 이용해 이동한다. 한적한 둘레길을 따라 이 섬의 명물인 ‘짝짓기나무’를 구경하고 평온한 가란마을을 거쳐 다시 가란선착장으로 돌아온다.
겨울 오후, 아직 바닷물이 빠지지 않아 호수같이 잔잔한 가란도바다를 끼고도는 둘레길은 ‘느림의 미학’을 체득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압해도 천사분재공원, 송공산들레길, 가란도 여행 일정표
10:00 압해도 천사분재공원(신안 압해면) 도착
10:00~11:50 애기동백숲→분재원→저녁노을미술관 관람
12:20~14:20 송공산 둘레길 트레킹
송공산주차장~출렁다리~팔각정1·2·3~송공산 정상~송공산주차장
(원점회귀, 약7km, 난이도 초급)
14:20~15:00 천사대교 입구 관람
15:30~17:00 가란도 트레킹
숭의선착장~보도교~가란선착장~짝짓기나무~가란마을~가란선착장
(약 5km, 포장+비포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