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트레커 Dec 27. 2020

우리는 안나푸르나에 간다

양진형의 자연기행 ⑦

◇ 옛 추억을 휘저어 놓은 한 편의 지리산 산행기     


후배 A : “지리산과는 많은 인연들이 그립네요. CUB 21기들과 노고단 산행 세 번의 종주.

          첫 번째는 J형과 군대 가기 전. 혼자서. 마지막은 작은 형과... 

          가족과 함께 차로 노고단에 내려 둘러보고 온 게 마지막인 듯.”     


후배 B : “다시 한번 지리산 종주를 해보고 싶네요. 설악은 여러 번 갔는데 지리산을 통 못가 보내요. 

             한라산도 몇 번 갔는데... "   


후배 A : "더 늦기 전에 함 가시죠. ㅎㅎ”     



지리산 제석봉 지나, 바람의 노래를 듣고 있는 고사목


시작은 이랬다. 지난 11월 8일, 지리산 성삼재 ~ 반야봉 ~ 피아골 코스를 다녀온 내가 카톡으로 남긴 산행기에 후배들이 남긴 흔적이다. 이날 이후 후배 A가 주축이 되어, 후배 B와 나를 포함한 7명의 단톡 방이 만들어졌고 지리산 종주의 시기와 코스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더 늦기 전에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의 종주는 찬성했으나, 시기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겨울 산행은 위험함으로 내년 꽃피는 봄에 가자는 쪽이 우세했다가 ‘쇠뿔도 당긴 김에’ 쪽으로 급선회하여 D-day 12월 25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기일이 다가올수록 마파람에 방귀 새듯 이탈 대원이 늘어만 갔다. 사실상의 모임을 주도하던 서울의 후배 A와 후배 C가 사내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으로 이탈한 데 이어, 광주에 사는 후배 D 또한 엇비슷한 사정으로 불참을 통보해 왔다. 그럼에 따라 스케줄의 변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산행자 네 명의 출발지가 서울, 광주, 여수 등 세 곳인 바 사실상 차량 회수 때문에 출발지와 도착지를 달리하는 1박 2일 일정의 지리산 종주가 힘들어진 것이다. 애초에는 서울팀이 기사가 붙은 미니버스를 대절하고 와서 하산 지점에 기다렸다가, 차를 주차한 산행 출발지까지 실어다 주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25일 저녁에 백무동 산장에서 만나 간단히 소주 한잔하고 26일 장터목 산장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원점회귀 코스를 택했다.    

 

후배 B는 내가 올해 8월 말 서울 직장을 정리하고 여수로 낙향하기 전, 교분을 자주 가졌으나 광주 사는 후배 E와 F는 사실상 대학 졸업 후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교내 방송반에서 학생 기자를 했다는 연대감으로 우리는 세월의 간극을 금세 극복하고, 기수 간에 있었던 잊지 못할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드나들다 보니, 분위기로 봐서는 소주 한 박스도 부족할 듯싶었다. 그러나, 안전한 겨울 산행을 위해 소주 1명에 맥주 1병 정도에서 마무리할 순간에 후배 B가 눈에 번쩍 뜨이는 발언을 했다.     


“형님, 오늘 모인 멤버들과 5년 내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고 싶습니다.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즐길 수 있을 때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즐기는 게 인생이지, 뭐 별 게 있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맞은편 후배 F에게 “혹시 내가 다음에 오리발 내밀지 모르니 녹음해 두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 산은 무섭다죽음의 산행에서 돌아오다     

이중섭의 황소를 연상케 하는 지리산 주능선의 근육미


"여보, 별이 정말 주먹만 하게 쏟아지네요."     


아침, 6시 30분 어둠의 자락을 헤드 랜턴으로 길을 내며 백무동을 출발한다. 장터목으로 오르는 계곡에서는 졸 졸 졸 물소리가 난다. 날씨가 그만큼 온화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 백무동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쏟아지던 별을 쳐다보던 상기된 아내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30대 중반이던가, 아내와 2박 3일의 여름휴가를 이 코스로 왔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는 백무동의 우측에 있는 한신계곡을 거쳐 덕평봉(추정)~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에 올랐는데 하산 코스가 백무동이었다.      


당시에는 국립공원인 지리산에서도 취사가 가능해 버너에 쌀과 김치 등속과 텐트, 담요를 챙겨 배낭을 꾸리는 바람에 배낭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산행 시기가 하필 여름 장마철 인 데다 8부 능선까지 안개로 자욱한 매우 습한 날씨였다. 그런 날씨는 유독 땀이 많은 나를 몹시 힘들게 했다. 준비해 간 식수는 다 떨어지고, 길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고 지도를 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

"여기 좀, 도와주세요. "     


한 폭의 수채와 같은 산과 하늘

메아리만 공허하게 되돌아 올 뿐, 바람 한 점 없는 산등성이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길 두어 시간. 이마 위쪽에서 드문드문 사람의 말소리가 습한 공기에 밀려 내려왔다. 힘겹게 내 뒤를 따르던 아내도 분명한 사람의  소리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살았다는 위안 감으로 30여 분을 더 오르니, 지리산 주 능선에 닿았다. 지금 지도를 보며 회상해 보니, 덕평봉 바로 아래 지점 같다. 지나는 사람을 보자마자 ”물 좀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사실, 산을 다니는 사람들은 안다. 특히, 여름철 지리산이나 설악산 주 능선에서 물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이 얼마나 미안스러운 일인지를.          


헤드 랜턴에 의지해 오르는 새벽 오르막 산길은 그래도 덜 힘든 느낌이다. 눈에 깎아지른 듯 가파른 급경사가 보이지 않아 불빛만 따라가며, 소가 한 걸음씩 걷듯 내디디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백무동에서 천왕봉 오르는 길은 가파른 들숨과 날숨의 연속이다.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는 7.6km인데 고도는 1500m 이상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펜션 주인은 “겨울이라 빠른 걸음이라 해도 4시 30은 걸릴 거라”고 했다.     


후배 B는 산행 시작 20여 분 정도 지나니.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천왕봉 바로 밑 

"형님, 나 어제 아침에도 청계산 다녀왔어요."      


어제저녁에 백무동에서 만났을 때 후배 B가 한 말이 새삼 생각났다. 이 후배는 산행을 앞두고 동틀 무렵, 산등성이들이 겹쳐있는 장면을 찍어 단톡에 올리곤 했다. 모르긴 해도 나름 준비를 많이 했음에 틀림없다. 평상시에도 지하 5층에서 사무실이 있는 16층까지 걸어서 오른다고 한다.      


나는 광주에서 온 후배 둘과 간밤에 못다 한 그동안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며 맨 뒤에 섰다. 사실, 나도 5~6년 전까지만 해도 산을 거의 뛰어다녔다. 뒷사람이 나를 앞서면, 반드시 그 사람을 앞서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천천히 가자로 바뀌었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앞서가는 자신을 종종 본다. 어찌 보면, 지난 세월을 지나친 경쟁 속에 살아온 세대의 단면이 아닐까 한다.      


그래도 산행에서는 맨 후미에 서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번엔 그 이유가 있다. 최근 섬 트레킹을 무리하게 한 적이 있는데 후유증으로 왼 발바닥에 족저근막염이 온 것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었다면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고 싶었으나 모처럼 만남을 약속한 후배들이라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 산행의 시발이 나로 인해서이지 않는가? 가는 데까지는 가보고, 정 어려우면 양해를 구하고 하산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왼발이 심각하게 말썽을 부리지 않아 감사하며 오른다.           




◇ 겨울산에서 희망의 불빛을 찾으려는 행렬      

거리를 두며, 통천문을 지나는 산행객들


장터목에서 제석봉을 오르니 아이젠을 하지 않으면 산행이 어려울 정도로 길이 미끄럽다. 장터목에서도 후배 B는 보이지 않는다. 역시 겨울 지리산은 매섭다. 날씨가 비교적 온화하다고 했지만 장터목의 바람은 날카롭게 빈 곳을 파고든다.     


따스한 커피로 차가운 몸을 달랜 후, 백골이 된 고사목 지대인 제석봉을 지나니 후배 B가 벌써 천왕봉을 찍고 하산 중이다. 이 친구 천왕봉 인증샷을 보여준다. 눈 쌓이는 겨울철, 3시간 10분 만에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 돌파. 대단한 기록이다.


나중에 하산하여 펜션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 정도면 산악마라톤 선수 중에서도 수준급 기록이라 한다. 펜션 주인도 처음엔 믿지 못했으나 인증샷을 보여주어 고개를 끄덕였다고.     


천왕봉에 오르니 사위는 온통 희뿌였다. 발아래 펼쳐진 하늘은 고요의 바다처럼 평온하다. 성삼재에서 반야봉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굵은 능선들은 마치 이중섭의 ‘흰소’를 연상케 할 만큼 웅장한 근력이 드러나 있다. 백두대간의 시발점인 지리산은 겨울에도 잠들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는 듯하다. 깊은 계곡 사이의 얼어붙은 물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찌른다.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으로 산악회들이 움직이지 않아 무리를 지어 오르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래도 일정 거리를 둔 채 겨울산에서 희망의 불빛을 찾아보려는 이들의 발길은 의외로 많아 보였다. 새해에는 국민 모두가 편하게 일상을 즐길 수 있기를 작은 마음으로나마 기원했다. 아울러, 꿈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멋진 후배들과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꿈을 공유하며 살아가게 될 여수의 삶이 푸르게만 느껴졌다.           


한국섬뉴스 바로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목포에서 고하도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