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부모의 거울? 부모도 자식의 거울

ADHD의 발견.

by 해변의 요리사

근래 학교 수업을 마치고 실습에 들어간 뒤로 나에 대해 다시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나의 작은 소망이었던 앞으로 평범한 사람이 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될 듯하다. 자기 연민, 우울감, 두려움 등등이 물 밀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간 40년의 나의 인생을 뒤돌아보았을 때,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개인적인 문제들, 형편없는 저급 인간관계, 끊임없는 고뇌들의 비밀이 열쇠로 자물쇠 열듯 선명하게 풀렸다. 그간 공부를 통해 나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된 것들이 있다면.... 지극히 이용당하기 쉽고, 나르시시스트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설정인 에코이스트 완전체인 데다가 덤으로 나르시시스트에겐 밥일 수밖에 없는 애매모호하게 눈에 띄지 않는 ADHD였다는 사실.

설마 설마 했다. 하지만 두루 두루 관련 동영상을 찾아보고, 가정의와 상담해 보니 ADHD가 없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나의 불안정하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가 모두 설명되었으며 다른 이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답답한 구석이 많은 데다가, 그 사실을 마스킹하기 위해 남들 눈을 피해 눈에 보이지 않게 열일하다가 번아웃 와서 잠적 타버리는 나의 씁쓸한 인생역사도 모두 설명이 되어버렸다. 이런 미련한 주제에 하찮게 욱하는 성격, 주제를 모르고 남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가식까지... 두루두루 갖추었다. 그리고 투약결정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한 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나는 일단 투약을 하지 않고 조금은 정신 피곤한 데로 살아가되 테라피스트를 만나서 상담을 받는 정도로 할까 하는데... 과연 지금 실습기간이 끝나도 간호조무사로 일할수 있을까?실습을 시작하면서 여기 저기 레드 플래그가 눈에 들어오고 있다. 선생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모르겠다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행히 그간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피나는 노력 끝에 출중한 마스킹(스스로 훈련을 통해 장애가 없는 듯 연기하는 능력) 실력을 갖추게 된 나는... 그동안 정상인처럼 사는 척했으나. 새롭게 학교 생활을 하면서 ADHD의 껍데기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시간에 그전날 8시간 풀수면을 취하고도 졸고 있는 나의 모습.(심지어 수업내용은 수면 모드로 들어간 나의 뇌를 송곳으로 찔러버리고 싶을 만큼 정말 좋은 내용이었다!집중력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ADHD 신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실기 시험날 준비물을 통채로 안 들고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지갑도 잊어먹고 남들에게 기름값을 꾸러 다닌 적도 있었다. 사실 그 정도는 그냥 단순히 건망증 정도나 피곤해서 그런 정도로 이해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큰 신호는 실습 기간이 나타났다.


무언가 이건 아닌데... 나 제대로 하고 있는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파트너의 웃는 얼굴은 웬지 모르게 엄청 화나있었고, 심지어는 나보고 똑똑하다고 학생들 앞에서 칭찬한 선생까지 버럭하고 있었다. 왜들 그러지? 나름 일할때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머리가 멍해지며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흑역사가 PTSD처럼 찾아왔다. PTSD가 찾아오자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자청해서 실습과는 관계없는 잡일을 도와주다가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를 몇 주가 지났을까.(어딜가도 정상인몫을 해내기 위해 배로 노력하는 ADHD에게 흔한 번아웃) 한 5년 전인가 다른 직장에 있었던 해고 PTSD가 떠올랐다 나는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나의 용납할 수 없는 몇 가지 실수가 그들이 머리에 각인돼버린 후였기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초반부터 내 실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을 것 같지만, 고쳐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말할 가치를 못 느꼈을 확률이 높다. 애초 당시 " 저거 바보 아냐?"했을것 같다. 모르겠다.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해고 통보를 받고 말았다.한국또는 해외 유투브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ADHDer들이 같은 내용을 증거하고 있었다. 학교 성적은 훌륭하지만 정작 학교밖에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업무에서 힘들 수밖에 없었다는 수많은 간증 동영상들을 보면서 OMG를 외쳤다. 정말 나 ADHD인걸까?


나의 인간관계도 그다지 아름다운 형태는 아니었다. 항상 내가 주최가 되어서 친구들 간의 모임이 되었고 그러지 않는 이상 나를 불러서 가는 일은 없었다. 지지부진한 연인관계에도 내가 먼저 지쳐버려 내가 먼저 종료를 선전했었고, 엄마나 친구나 나를 항상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듯... 그 수많은 자기 개발서적을 읽어도 나는 항상 그들에겐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딱 5kg 만 더 빼자, 눈이랑 코만 고치자... 처음엔 나를 위해주니 그러려니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화가 났다. 자기들은 얼마나 잘났다고 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지 않지? 유럽여행 같이 가기로 한 10년 지기 베프에게 나는 여행 내내 완전한 민폐 캐릭터였다. 베프는 말하지 않았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무지 애쓰는 모습이었다. 나도 느낌적인 느낌으로 베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진 노력했지만, 여행 이후 나의 베프 타이틀은 유리처럼 산산조각났으며 베프는 가족에게 여행애서 발견한 내 민폐스런 행동을 다 보고하는 바람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저 민망했고 자존감은 더욱더 바닥을 쳤다. 그나마 내가 자랑스레 여긴 마지막 인간관계가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그이후로 12년이 지난 근래까지도 내가 여행 가서 한일을 들먹이는 걸 보니... 그토록 기대했던 여행을 나 때문에 망쳐버린 것 같아 미안해 죽을 지경이다. 몇 가지를 돌이켜 보자면 여행첫날 파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줄 알고 여기저기 미친년처럼 하루 반나절을 뛰어다니다 결국 짐가방에서 찾아낸 일, 유학생활 5년이나 했는데도 5년 한국생활하고 나서보니 영어가 안 들렸는지 말귀 못 알아먹고 엄청 헤맸던 것, 차가 오는 찻길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차가 멀리 있어서 길을 지나려 했던 것)베프가 몇 번을 잡아서 막았다고 한다. 같이 침대쓰면서 잠버릇이 정말 험했다고 한다 (아마도 단체 관광이던 그 여행은 ADHD였던 나에게 스트레스 만땅었다는 증거) 그 결과 여행 절반차에 병이 나서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아파서 폐렴증상에 가까운 감기였는데 숨도 못쉬고 골골거렸던 것이 그녀를 결정적으로 더 화가 나게 했던 것 같다. 왜냐면 그 친구가 아파서 몇 년을 미룬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프지 말라고 하며 독려했었고... 그런데 결국 여행 가서 내가 아파버렸다.


내가 ADHD라는 진단을 스스로 내리기까지...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아빠였다.

단순히 ODD(분노조절 장애)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Bipolar(조울증) Schizophrenia(조현증)이기엔 너무 정신이 멀쩡한 데다가 보통 아빠는 항상 해피하다 트리거만 건들지 않으면 말이다. 성인 ADHD를 찾아 보니 그동안 아빠에 대한 수수께끼들이 한방에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빠는 애 어른 할거 없이 호감을 단번에 살 수 있었던 휜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아빠를 정상인으로 취급하고 있었고 그 이상으로 항상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하지만 그 특출 난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아빠는 무슨 일인지 그 어떤 직장도 꾸준히 지속 시킬 수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대기업에 취직한 아빠는 2년이 채 안되어서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뛰쳐나와 버리고... 처가의 재력에 기대어 이일 저일 하다가 수입회사 결국 중소기업에서 월급쟁이를 하다가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전자공학을 공부했으니 컴퓨터 장사를 하겠다고 사무실을 차렸다가 그마저도 돈이 안되자 돈이 되는 만화방을 차리겠다고 하다 그마저도 엄마한테 떠맡겨 버리고는.... 역시 적자를 면치 못해 그래도 수입이 보장되는 택시기사를 하겠다고 하여 금융 감독원, 의사, 대기업 다니는 형제들로 이루어진 친가와 눈만 높아진 엄마의 억장을 있는 힘껏 무너뜨리고 말았다. 결국 인생의 마지노선 택시기사는 그렇게 하기 싫어하면서 15년은 넘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아빠는 당시 표현으로는 알랭들롱의 싸대기를 후려칠 만큼 출중한 외모였는데, 느끼하지 않게 쌍꺼풀진 눈, 서양스타일 콧대, 단정한 치열과 입술 날렵한 턱선 당시로서는 엄청 크지 않지만 적당히 휜칠한키에 말하기를, 경리 아가씨가 방에 커피 가져다주러 오면 본인의 외모가 긴장한 듯 커피를 나르는 손을 덜덜 떨었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 선생을 가르칠 정도의 영재에다 그야말로 인기스타였다. 모든 식구의 자랑이었으며, 밖에 외출을 나갈 때면 엄마의 콧대를 높이 세우는데 큰 몫이었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엉망이었다. 정리 정돈이랑은 담을 쌓았으며, 기본적으로 삶에 필요한 청소, 살림, 자기 관리, 건강관리 모두 잼병이었는 데다가, 담배와 커피는 입에 달고 살았었다. 아마도 하루에 한 갑은 넘게 피는 것 같았고 커피믹스 커피도 손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Adhd로 뇌 도파민이 불균형하면서 커피가 많이 당긴다고들 한다) 주말은 정말 빈틈없이 잠만 잤던걸 생각하면 그 당시 직장생활이 어지간히 고달팠던 것 같다. 본모습을 감추고 사회생활 해야 하니 번아웃이 와도 심하게 왔을 것 같다. 그 수려한 외모에 마스킹을 벗겨낸 아빠의 본모습은 잠에 취한 채 식탁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담배를 피우다가 반복하는 모습이었다. 인간관계도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 항상 밝은 성격과 환한 미소로 아빠는 아이들에게는 인기 만점인데다가 본인의 고등학교 동창들에게도 인기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게 깊게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는 전무하고, 그나마 근래 길가다 만난 한 고등학교 동창이 현재 유일한 친구이다. 아빠는 의심많아서 사람을 깊게 못사귄다는 엄마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기에. 아빠가 장기적인 인간관계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사회적 위치를 달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져서 친구를 안만난다고 보는게 맞다. 사회생활 맞춰나가기가 하루하루 버거운 ADHD 인간들에게 낮은 자존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그러다가 결정타를 날린 것은 로또 중독이었다. 내 유학비 대출 이자를 갚다가 지친 아빠는 마지막 모든 희망을 로또에 걸고 말았다. 물론 계기가 있었다. 아마도 긁는 로또 몇 개가 맞아서 수백만 원을 손에 쥐고 나서...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그 좋은 머리로 확률계산을 한 것 같다. 하루하루 무섭게 불어나는 이자를 한방에 갚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는지 매주 금요일이면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서 열심히 숫자 맞추기 작업에 여념에 없었다. 그 모습이 바로 유학을 마치고 1년 뒤 집에 돌아와서 보게 된 아빠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확실한 중독의 형태를 띠었었다.(충동조절장애로 ADHD증상중 하나) 그리고 늘어나는 이자의 무게는 확률계산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부담은 우울증의 형태로 찾아오기도 하고 심지어 점점 이성과는 거리가 먼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찬송가의 코드로 번호를 유추하거나, 내 생일을 비롯한 온 가족의 생일을 때려껴 맞춘다거나 특히 꿈에 의존하는 숫자놀음... 거기에 더해서 심지어는 꿈에 나온 어떤 동물의 모양을 로또지에 그림으로 그려내기까지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택시는 계속 운전했었다.


아빠의 로또에 대한 집념은 어마어마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냐하면, 10년간의 로또의 역사를 책으로 낼 수 정도의 분량의 기록을 할 정도였으니까. 하루는 그 꼴을 너무 보기가 힘들어 엄마가 노트를 없애려고 하자 불같이 다 뒤집으며 화를 냈다. 좁아터진 베란다에 공짜노트로 매회 로또의 꿈기록과 계산법 그림으로 풀어낸 로또지가 산처럼 쌓여갔다. 엄마는 티 안 나게 조금씩 버렸다고 했으나 베란다는 늘 엉망진창이었다. 비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종이가 불어 터지고 빛까지 맞아서 바래진 채로 베란다 한구석에 굴러다녔다. 그래도 아빠는 그것들을 귀하게 여겼다 왜냐면 아빠에게는 그것들이 헛소리로 여기지 않고 언젠가는 책으로 출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해도 됐을법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에 대한 초집중상태로 이 또한 ADHD증상중 하나)


아빠의 비정상적인 모습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분노 장애 조절의 형태를 띠는데 트리거는 "돈"이었다. (ADHD 뇌에는 ODD OCD 우울증이. 종종 동반된다) 고모들에 의하면 돈이 화두가 되면 아빠는 그야말로 성난야수처럼 길길이 뛰고 부시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미국에 사는 큰고모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아빠 잘 지켜보라고 괜찮냐고, 물론 첫날은 무탈했었다 둘째 날이 되기 전까지... 큰고모의 예상은 진짜 화살이 과녁 맞추든 적중했고 부조금이 화근이 되어 아빠는 미친놈 널뛰듯이 뛰어다녔다. 고모들이 많아서 각 사회에서 한자리하던 고모부들 장례식 손님이 많았었는데.... 그 장례식을 계기로 우리가족은 아빠 형제들과 얽히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추궁해 보자면 고등학교 때 부모님 사업이 부도가 나서 빚쟁이를 피해 아빠만 빼고 모든 가족이 야반도주를 해버린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명문고를 다니던 아빠만 학업을 마치기 위해 고향에 남겨졌지만, 그 모든 상황이 아빠의 자존심과 명예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그것이 PTSD로 남아 ODD의 모양으로 아빠의 뇌에 각인되었을거라는 나의 추측) 결국 아빠는 부모의 보살핌 없이 가장 중요한 시절을 시시콜콜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대학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보겠다고 당시엔 어디 서울에 이름 없는 전문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나마 외모를 중요시 여기는 우리나라 사회 구조 덕분에 아빠는 큰 득을 본 것 같았다. 전문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면 이름만 돼도 알아주는 대기업에 바로 취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외모의 한계는 거기까지 실상 대기업 정글에선 학맥 없이는 날개를 펼칠 수 없었던가 보다. 본인의 아이디어로 낸 특허를 엄한 사람에게 공이 돌아가게 되는 바람에 본인 스스로가 특허를 신청하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내가 아마 막 태어난 시기였던가 1살인가 2살이었나 싶다.


엄마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젊고 가능성 있다고 생각해서 밀어줬다고 한다. 특허를 따내서 사업을 하겠다, 공부를 더해서 대학을 졸업하겠다, 트럭을 사서 야채장사를 하겠다, 컴퓨터를 조립해서 파는 사업을 하겠다, 만화대여점을 하겠다, 결국 회사택시로는 돈이 안되니 개인택시를 해야 하니 택시를 사겠다.택시기사로 살기에는 면이 안서니 공인중개사자격증을 따겠다 등등 근데 뭐 하나 3일을 가는 게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오래 했던 게 택시라고 한다. 그나마 운전이라도 잘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엄마 말에 따르면 아빠는 심각한 길치라고 했다. 정작 운전경력이 짧은 엄마는 평생 무사고 인것에 비해 아빠는 그 긴 세월을 운전하고도 교통사고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거기다 길치라서 택시비가 더 나오는 바람에 손님이랑 꽤 싸웠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아빠는 예물로 할아버지가 해준 롤렉스로 팔아서 쓰고, 나중엔 엄마 결혼반지도 팔아서 썼다고 한다. 나는 물었다. 미친 거 맞네, 왜 이혼 안 했어? 하지만 새엄마가 미운 엄마의 복수는 잘살아서 당당히 보여주는 것이었던 건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새엄마의 이간질로 결혼초기에 이혼위기를 한번 겪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들이고 이혼녀 딱지고 일단 그냥 엄마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내 관점으로 봤을때 이 둘은 환상의 커플이다. 감탄사를 불러내는 아빠의 외모와 잘난 시동생들이 엄마의 면을 세우는데 한몫한 것이라는 추측도 해본다. 엄마에 대한 아빠의 계산도 꽤나 정확하다 피아노 전공했으니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을듯한 생활력과 집안의 재력을 사랑했던 것 같다. 돈이 트리거였기 때문었는지 외삼촌과 동창이어서 잘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재력이 자석처럼 이 둘을 끌어당기지 않았을까?


엄마는 말하길 너는 완전 친가 쪽 피야. 성질 머리하며... 뭔가 끝마무리가 칠칠맞고, 덜렁거리는 것 너희 할머니랑 완전히 똑같아. 설거지 하는 거 보면 대충 꼼꼼히 못하고 지저분한 거 그대로 있고. 그리고 뭔가 집중하면 입이 항상 벌어진다. 너무 집중해서 입으로 숨을 쉬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니까. 입 좀 다물어라 항상 듣는 소리였다. 초등학교를 들어가니 점점 사회적으로 인간적인 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느린 아이였고,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고, 말귀가 어두웠고, 눈치가 없었다. 사교성도 없었고 사회성이 부족했고 따돌림당하기도 했었다. 중고등학교로 들어가서 조금 나아져서, 친한 친구도 생겼지만, 학업성적은 바닥을 쳤었다.초등학교때는 꽤 괜찮은 성적으로 친가 닮은 머리로 공부를 잘할것이라는 엄청난 기대가 있었지만, 중학교는 그럭저럭,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성적은 엉망이었다.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미술학원비가 아빠의 돈 트리거를 건드리는 바람에 쏙 들어가 버렸다. 진짜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동기 없이 배우는 배움이란 정말 종이 위에 글자일 뿐이었다. 일부 좋아하는 영어나 문화 예체능 과목만 빼고 나머지는 성적이 바닥을 기었다. 아빠는 "니는 내 닮아가 머리가 억수로 좋은데 왜 머리를 안쓰나?이 기똥차게 똑똑한기" 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뭐 누구나 그렇듯 당시에는 고슴도치 제자식 이쁘다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뇌는 그래서 아빠 뇌라는 힌트를 얻었다고나 해야할까? 역시 아빤 틀린 말은 안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을 포기한 나는 엄마의 자존심에 나는 좀 골치 덩어리였다. 이 찬스를 예리한 캐나다 이모부는 예사로이 넘기지 않았다. 이모부는 엄마를 자극해서 나를 캐나다로 유학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연히 돈트리거가 엄마아빠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는 고졸도 취직해서 열심히 일하면 먹고살 수 있다는 주의였고, 엄마는 우리나라 사립대 보내도 그 돈은 든다라는 남들 다하는데 왜 니는 못하나라는 주의였다.(사실 아빠는 정형적인 한국사회를 살아나가기엔 무리가 많은 상태였지만, 꽤나 이성적인 사고를 했다고 오늘날 나는 생각한다) 둘이 그다지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모부를 통해 나의 캐나다 유학 소속이 진행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다음 해 나는 유학을 가게 되었다. 기억에 의하면 그 전날에도 엄마 아빠는 열심히 싸웠던 것 같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나는 유학을 가면 안 됬었다. 집대출을 받아서 유학비를 댔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부담이 치매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던 우리 집에 큰 타격을 주고 말았다. 캐나다 가던 당시 우리 집은 방 4개와 화장실 2개짜리 42평 고급아파트를 고모의 도움을 받아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전세가 끝나가는 과정이어서 다음 살 곳을 정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16평짜리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있는 집을 매매로 하게 되었는데, 돌이켜보면 그 집은 엄마아빠와 동생 그리고 치매할머니가 쾌적하게 살기에는 불가능한 집이었다. 엄마 아빠가 거실에서 자고 할머니가 안방에서 주무시는데, 밤낮이 바뀐 아빠 때문에 사람을 부를 수도 없었고 부를 형편도 안 됐었고, 캐나다로 떠나기 전에 엄마와 아빠는 나를 데리고 새로 이사 갈 집을 구경 갔었다. 나야 낼모레 캐나다를 떠나니 아무 생각 없었고 아마도 엄마 아빠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집에서 엄마가 레슨까지 해가며 동생 고3 뒷바라지에 치매할머니를 돌본다는 건 그야말로 어벤져스라고 해도 불가능이었다. 거기다가 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급기야는 문자 그대로 벽에 똥칠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고모들이 불시에 찾아와 할머니가 방치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할머니를 따로 모실테니 당시 집에 보탠 돈을 다시 달라고 했었지만... 그 돈은 이미 집에 묶여 내 유학비를 하고 있던 상태였으니 돌려줄 리가 만무... 근근이 택시운전하며 원금도 아니고 이자만 갚고 있던 아빠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그 길로 고모와 엄마는 정말 틀어지게 되고 아마도 그때부터 아빠의 돈트리거는 점점 심해져 갔다. 원금 빠지고 갚은 이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만 가니 심리적 압박은 심해져 갔던 것 같다. 그 해 2002년 월드컵이 있던 해, 아빠의 월드컵 복권 당첨은 아빠의 돈트리거를 쎄게 후려쳤다.


이런 아빠의 상태를 유학생활 내내 듣고 있자니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엄마와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엄마는 토로했다. 이자는 불어나는데 매주 얼마치의 복권을 하는지 모르는 데다가 일은 나가는 둥 마는 둥 매일 몸 아프다고 핑계만 된다. 듣고 있자니 절망 그 자체였다. 유학생들은 기본 안정된 직장을 재력을 가진 부모들을 가진 자녀들이라는게 정설이라는데.... 그 유학생 친구들은 겨울방학에 스키여행 갈생각에 신나하고 있는데, 나는 스키복 살 여유도 없다. 스키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유학이라는 굉장히 좋은 위치에 있는것 같긴한데 뭔가 대단히 안맞는곳에 있는건 확실했다 좋은곳에 있는데 당최 즐길수가 없고 마음은 가난에 찌들어 항상 고단했다.


훗날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를 20년이라는 세월을 봐왔잖아? 나는 아빠가 그런 상태인 거 알면 유학 안 보낼 것 같은데 왜 그랬어?" 엄마는 시인했다 "남들 다 자식 대학교육시키는거 와 지는 몬하는데 지방사립대 보내도 그 돈드는데 캐나다가는게 낫지" 또 물었다 고모가 할머니 모시라고 집에 돈 1억을 보태준 건데 그 좋은 전세집에서 그 좁은 집으로 매매해서 이사를 갈 형편이었으면 날 유학을 보내면 안 되지 않았는가? 고모가 화낼 만도 하다고 고모가 도와준 그 집에 대출받아서 돈 끌어다가 빚내서 딸 유학 보내놓고, 자기 엄마 제대로 안 모셔지는 거 보면 당연히 그 돈 돌려 뱉어내라 하지., "차라리 날 보내기 전에 집을 할머니 잘 모시게끔 고모들이랑 잘 상의를 해놓고 내 유학을 보낼지 말지 생각해 보지 그랬어?" 엄마의 자존심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엄마가 날 캐나다로 유학 보낼 거라고 명절마다 얘기하는 바람에... 고모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 내 치매 부모 모시느라 내 돈 보태서 지 집 전세내고 사는 마당에 내 새끼도 유학 못 보내고 있는데 무슨 돈으로 유학을 보내? 부잣집 딸이라 여유가 좀 있나 보지? 그런 여유 있으면 우리 엄마도 잘 모시겠지?" 선견지명이라는것이 없는 엄마의 본능적인 결정이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 유학은 엄마의 면을 살리기위해 앞뒤 사정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보내진 것이 확실하다. 부자가 삼대를 못간다는 얘기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앞으로 받아야할 도움은 생각도 안하고 충동적으로 대단히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남이사 어쨋든 나만 좋으면 됐지라는 심리를 이를두고 하는 말이다.이와 같이 돈많은 할아버지를 등에 업은 믿을구석 있는 엄마와는 달리, 기댈 곳 없는 아빠의 병만 깊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등신같이 지 새끼도 못 거둬들인다"는 등신같은게 아니라 원래 태어나기를 정신이 정상이 아니게 태어난것이 기정사실인데,..그것을 자존심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것이다. 이런 분노 폭발 성향이 할아버지의 유산처리 과정에서 외가집사람들에게 드러나고 할아버지는 깊이 좌절하며 내손을 잡고 우셨다 "니 아빠는 제 정신인 사람이 아니야. 네 엄마가 고생이 많다" 자업자득이다. 병을 숨기면, 키워지고, 욕심은 늘 화를 부른다.


캐나다에서 칼리지를 졸업하던 해 나는 아빠로부터 고모가 내가 사는 동네에 애들 데리고 이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여차 저차 연락해서 고모를 만나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인 고모는 아예 이민으로 캐나다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었고. 당시 애들은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동네가 캐나다에서 최고 좋은 명문 사립고등학교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쪽에 선택한 듯했다. 부자들만 산다는... 세금을 제일 많이 낸다는 동네로 유명한 그 동네에서 오랜만에 본 사촌 아이들이 엄청 듬직하게 잘 커있었다. 영어도 유창했고 심지어는 불어나 라틴어도 원어민처럼 말하고 있었다.교육도 제대로 받고 해외에서 공부한 준비된 글로벌 인재의 면모를 갖추었다. 근래 남미 여행을 갔다고도 했던 것 같다. 금전으로 인한 그늘은 이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네들의 문제는 공부 빼먹고 친구들과 1분이라도 어떻게 놀아볼까 하는 것이 자기들 부모와의 갈등문제였다. 나는 생각했다. 소위 유학이란 이런 금수저같은 애들이 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거늘... 왜 내 부모는 나의 유학으로 인해 엄청난 금전적 고통을 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까 내 유학비를 감당 못하는 아빠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이런 아빠 상태를 알고도 유학 보낸 엄마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 누구도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뱁새가 황새를 쫓으나 가랑이가 찢어져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내가 뱁새의 길을 갈 것이라는 것을 애초당시 몰랐다는 것이 내 탓일까? 나를 위한 유학이 아니라 엄마를 위한 유학이었던것 같다. 엄마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한 유학에 가까웠기때문에 정작 본인인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행복하지 않았던것 같다. 돌이켜보면 꽤 많은 유학생들이 이런식으로 비싼돈 들여 유학와서 맘고생 아닌 고생을 한것 같았다.


마침 유학생들의 벗 교회에 충성봉사하던 차에 새벽기도때마나 좀 울부짖었던 것 같다. 이모부의 강요로 교회에 잠시 의존했지만, 교회라는 곳이란게 계층 간 차별의 연속이었다. 이민자들끼리와의 갈등, 이민자 자녀와 유학생간의 차별. 헌금액수가 당연차이 날 수밖에 없는 유학생들은 마치 교회의 봉사꾼으로 인식하는 듯했었고, 심지어는 목사가 유학생과 이민자의 자녀를 대놓고 차별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깨달았다. 교회라는 곳은 하나님을 핑계로 형성된 하나의 이민사회 네트워크구나...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먼 타지까지 날아와서 대한민국의 축소판을 작디 작은 이민교회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캐나다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안 좋은 사건이 이를테면 아동성범죄나 성직자와 교인간의 불륜등 교회에서 일어나니 그냥 안 나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조용하다고 믿던 캐나다마저도 그렇다는 건 일단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아빠랑 교회에 나가 종교에 귀의해서 성실한 사회인의 길을 살고자 도모했지만. 이미 교회자체가 사회였기 때문에 이미 아웃사이더인 아빠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은 0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나이차이 많이 나는 언니들과 잘 엮이는 일들이 더 많았다. 아마도 그네들의 연륜에 나의 상태를 더 잘 이해해 준다고 생각했었던 같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언니들과 친해졌다가 이용당하거니 뒤통수 맞아서 다시는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이런 일들이 꽤 자주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런 형태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 나는 나이가 나보다 열댓 살 많은 올드미스이지만 나름 사회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여자들에게 끌리거나, 역시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 상사들인데 엄청 센 사람들한테 끌리지만 결국엔 이용당하는 모양새로 마무리되는 형태... 그네들은 처음에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거나 나를 인정해 주는 형태로 다가오지만, 결과적으로 내 영혼을 한 바퀴 휘 젖은 뒤 목적을 성취하면 빠져나가는 형태 거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연락을 취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나는 왜 이런 이들에게 불나방같이 달려들게 되는 걸까? 일단 그들이 주는 러브 바밍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나의 성공의 그릇 삼고 싶어 하는 욕망에 내 몸이 타는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형태가 되어버린다. 그들의 인간적 고뇌는 나의 에코이스트 성향에 활력으로 다가온다. 나의 도움이 조금이라도 그들의 고뇌에 도움이 된다면 마치 그들의 성공이 내 것이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나에게 미끼를 던진다는 사실은 한창 후에나 깨닫는다.


근래 나는 엄마와 크게 한바탕해서 연락을 하지 않은 상태에 놓이게되었다. 간호 조무사 경력이 채워지면 간호과를 짧게 졸업할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쪽으로 갈까 생각중이다라고 했는데 ... 엄마의 반응은 간호사라는 직종도 그닥 너한테 안맞는것 같고 아마도 뭔가 하나 진듯이 안하고 그 나이에 학교를 들어가는것이 우려되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것이 나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트리거가 되었다. 나는 요리사였던 커리어를 발전시켜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내자신을 발전시키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간호사가 기피 직종인 한국에서 엄마의 인식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쉽지 않은 직종인데, 한국보다 대우는 낫고, 일과 병행하면면서 공부를 할수 있고 의료노조나 정부에서 지원도 어느정도 해주기 때문에 공부만 따라잡으면 할만 할 것같았다. 간호 조무사과에서 공부탄력을 받은대다가 수간호사 출신인 선생으로 부터 머리좋다는 얘기까지 들은 나는 자신감 만땅인 상태였다. 남은 인생을 남들이 좋다하는 머리를 잘 활용만한다면 의료인력이 부족한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 제법 안정적인 생활과 노후가 보장이 된다면 그보다 좋은게 어디있을까? "엄마는 그게 늘 문제야, 왜 자식 자존감 낮추는 말을 그렇게 막해? 내가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왜 내가 하는건 다 못마땅해?" 늘 그렇듯 자식이 걱정되서 하는 말인데 너는 부모한테 그딴식으로 말한다고 말버릇을 잡고 물어진다. 싸우다 10년 넘어가는 일까지 들먹인다 "...니가 캐나다 다시 가고 싶어서 갔잖아 내가 보냈냐?" " 그래 한국에는 내 미래가 안보여서 캐나다 왔다 마침 기회도 있었고, 그 나이 되도록 직장도 변변찮고 나이먹고 결혼도 못하고 골치덩어리였는데 캐나다 잘 보냈다고 생각안했어? 오히려 속시원하지 왜?" "..." 아마도 정곡을 찌른듯하다. 나의 이런 모지란 모습이 엄마는 늘 불만인것은 어릴 때 부터 느껴왔었다. 지금도 이제는 별 볼일 없어진 캐나다에서 하찮은 간호조무사 자격증이나 따며 찌질하게 살고 있느니 차라리 엄마한테 붙어서 잘사는 한국에서 지내는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차라리 엄마한테 의존적으로 지내는게 본인의 맘도 편하고 나한테도 이득이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참사랑이 아닌것 같다. 그것은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사랑이라고 요즘 사람들은 그런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나에게 아빠처럼 한가지에 진듯히 안주 못하는 ADHD 힌트를 마지막으로 던져주었다. 내가 ADHD일것이라는 추측이 점점 맞아떨어져가는 사실을 맞딱뜨리며, 한동안 없었던 우울증이 몰려와서 한두주 힘들었었다. 이 놈의 ADHD gene덕분에 나의 삶의 질, 인간관계가 곤두박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트리거였다. 알면 알수록 인간은 우울해진다는데 내가 그걸 자청해서 하고 있다는 생각의 늪에서 헤어나오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ADHD에게 건강한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는 나에게 사치로만 느껴진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적당히 나의 본모습을 마스킹해 가면서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제법 괜찮은 사람으로 남겨지기를 소망하는 일뿐이다.나도 안다 욕심인거... 나의 진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은 떠날 것 같기만 하다. 나 자체로 인정받고 싶고 정상인처럼 사랑을 주고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아니면 건강한 인간관계라는 것 자체가 ADHD들이 포기해야만 하는 많은 것들 중에 하나일까? 나는 뇌에 장애가 있다는 타이틀을 감당할 자신이 있을까? 약을 먹지 않고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이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욕심 부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사실이다.


내 뇌는 과부하가 잘 걸리는 ADHD 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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