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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구공오 Jan 12. 2021

멍청이가 하는 말 '난 행복해지고 싶어.'

행복이란 감정에 대해.

'난 행복해지고 싶어.'



사람들이 정말 흔히 마르고 닳도록 하는 말 중에 하나일 것이다.

또한 '너 지금 행복해?'란 질문에도 흔하게 나오는 대답 중 하나.

난 저 문장을 가증스러운 덩어리로 인식했었다. 정말 어린 투정으로 감싸진 욕망의 부스러기 같은 말.

그런 내가 2020년부터 시작된 방황을 잠시 끝마칠 수 있던 결론이 저 문장이었다는 게 당혹스럽기만 하다.


처음에 저 문장을 가증스러운 덩어리로 인식한 이유는 '행복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행복이란 감정을 자신이 살아왔던 삶 중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쁨과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 차

회색빛의 세상이 그 순간만큼은 하나하나 고유의 색으로 인식되는 그런 느낌.

즉, 최고로 긍정적인 기분 말이다.


고작 10살이 되던 무렵,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내린 '행복'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오는 작은 기쁨들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 같아. 지금 삶을 사는 것도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이렇게 올 수 있을 텐데. 그 소중함을 몰라. 그런 생각들로 사람들이 말하는 '난 행복해지고 싶어.'란 문장이 너 참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 소중함과 감사함을 모르는 멍청이구나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행복의 정의를 믿고, 10년을 넘게 살아온 나에게 솔직히 말해선 행복이란 멀고도 험한 존재였다.

난 사소한 곳에서 오는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 무심했고, 항상 높은 것을 갈망하면서 나한테 채찍질하기 바빴다. 20살이 되자 그런 성향은 더욱 심해졌다. 휴식, 여유란 단어는 나에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도 같은 최고의 기분이었고, 지치고 무너지고 싶은 내 진정한 속마음을 무시한 채 난 지금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본가로 오는 것이 휴식처였던 나에게 코로나로 인해 휴식과 일의 공간의 분리가 되지 않자 더 큰 혼란을 가져왔다. 그저 현실의 눈 앞의 목표만 세우기 바빴고, 남이 이루어 놓은 일들로 나의 목을 조르며, 나도 남에게 선보일 수 있게 나의 모든 창작물들과 나를 만들어야 해 란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렇게, 난 내가 학창 시절의 6년 동안 부모님과 서로를 머리채를 잡으며 겨우 지켜냈던 꿈과 글쓰기에 흥미를 보이던 나의 소소한 취미들이 하나같이 다 변질되어 예전의 의미를 찾지 못 한채 '괜찮아. 인생은 한 치 앞도 못 보는 거라 잖아.'란 말로 내가 지금 처해있는 현실을 외면하기 바빴다.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어버리고, 기분은 처참히 바닥을 뚫어 다시 올라가질 못 할 무렵,

일기에다 모든 감정, 생각을 휘갈겨 적었다.


'난 계속 이상 속에 살면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그런 멍청이로 남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며, 나 자신이 날 한심하게 느낄까 두렵다.
어떻게 하루 경계 사이로 일기장의 기록이 달라지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어디에서 온 건지,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영상, 글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원해서,
이것들을 내 삶에 들어놓으면 몇 년 후에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거였다.

난 행복해지고 싶다.

아무것도 확신이 서지 않는 미래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지금 사소한 것이던, 내 과정을 즐기는 순간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싶다.
주관이 확실한 사람, 생각이 깊은 사람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 시작된 가식으로 똘똘 뭉쳐진 글들을 쓰지 않고 싶고, 쓰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결말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냥 닥치는 대로 내 모든 것을 휘갈길 것이다.

난 내가 행복했음 하는 바람에서 이 모든 걸 시작했다고.'


-나의 일기장 내용 일부


정말 가식적이었던 하찮게 보였던 '난 행복해지고 싶어.'란 문장이 거친 바람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저 눈 감고 서있던 방황을 끝내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덕은 계속될 것이란 것을 확신한다.

그래도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간 거친 바람이 잠잠해졌고, 내가 서있는 두 발이 보였다.

타인에게 공고히 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일기장에 나의 감정, 생각들을 다 쏟아부으며 나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그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난 행복해지고 싶어.'란 문장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란 것을.

이제는 사람들한테 그 말을 들어도 속으로 '저 일상을 사소한 것에서 오는 감사함을 모르고, 투정 부리는구나.' 란 생각보다 '그래. 그 말 해도 괜찮아. 네가 그 말을 한다고 해서 지금 있는 상황이 불행한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난 행복하지 않아서 말할 수도 있지만, 보통 그 감정을 충족하지 못해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 일 것이다.



행복을 갈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그 갈망하는 행위가 네가 불행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의 본능이란 것 일뿐.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말하는 문장이 그 자체로 용기 있는 외침이라고.

넌 언제든 아니 지금의 순간까지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 문장을 내뱉는 사람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위로이자, 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이 아니었을까.

그 전의 나로서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받고 싶어 몇 번을 도전하여

브런치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난 내 글이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이나 영감이 없기에

글 쓰는 것을 미뤄왔다. 나의 모든 글에서 모순적인 면이 독자에게 전해지고 싶지 않고 난 행복한 사람이란 것을 어필하는 허례허식에 갇혀서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내가 곧은 사람이 아니던, 변덕스러운 사람이던, 글이 완성도가 높지 않던 그 어떤 무엇이던

그냥 써보려고 한다. 난 행복해지고 싶기에 이 글을 쓰고 있고, 이 글의 끝이 다가올수록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자유를 느낀다.


행복을 고민했던 나와 같은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새를 사랑하는 사람은 새를 새장 안에 가두지 않아요.

그저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게 내버려 두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행복과도 같은 좋은 감정들만 모여져 있는 이상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게 아니라

내가 겪은 치졸함, 허탈함에도 한 번은 자신을 풀어놓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감정이란 파도에 한 번 휩쓸렸다 보면, 결국엔 파도를 즐기는 것 또한 행복이란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이제야, 사소한 것에서 행복이 오는 것을 실감하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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