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개츠비적인 사랑을 하고싶은 우리들에게
스마트폰이 없던 2000년대 초반.
좋아하던 아이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아니 약간은 진심을 내비치려 문자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고민하곤 했었다.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 시절의 아날로그의 표현방식이 자꾸 떠오르던 요즘.
무려 한 세기 전의 이야기인 개츠비의 사랑이야기가 애틋하게 다가온다.
요즘 친구들(이런 단어를 사용하면 옛날 사람 같지만)은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을 과연 어떻게 볼까.
흔하고 뻔한 내로남불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또는 개츠비의 일방적인 집착에 오히려 소름 끼쳐 할 수도 있겠다.
마음만 먹으면 SNS를 통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금방 닿을 수 있는 요즘도 개츠비처럼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저렇게 오랫동안 간직하며 만날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난 개츠비가 위대하고 멋있는 이유가 자신의 사랑을 한결같이 간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미래의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이룬 것까지 합리화해버린 개츠비.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으로 지켜낸 그 사랑.
그 강력한 사랑의 힘을 지닌 그는 진정 위대하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데이지가 살고 있는 집이 위치한 만의 초록불빛을 바라보기 위하여 정확히 그 반대편 해변가에 저택을 마련하여 살고 있는 개츠비는 그 커다랗고 화려한 저택의 모든 층의 불을 환하게 켜놓고, 매일매일 성대한 파티를 열며 생각했을 것이다.
- 저 바다 건너편에서 그녀가 이쪽을 바라봐 줄수도 있겠지.
-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라도 바라보면 그만이다.
개츠비는 화려한 파티가 끝난 후 테라스에 나와 그녀가 있는 건너편 해변의 초록 불빛을 응시하는 여운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희망으로 살아냈을 것이다.
주인공의 닉 눈에는 그러한 개츠비의 모습이 테라스에서 별을 바라보는 웅장한 모습으로 보였다는 부분에서 더욱 개츠비의 간절함과 꿈은 빛났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매일같이 성대한 파티를 열고, 오로지 그녀를 다시 과거로 데려가기 위하여 과거는 그대로 다시 반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개츠비는
그의 말처럼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흐름에 거슬러 자꾸만 뒤로 밀려가는 조각배와 같은 낭만적인 인생을 살았다.
윌슨이 쏜 총에 맞아 죽는 그 찰나에 개츠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수영장에 매트리스를 띄우고 누워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총살이 아니었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데이지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으니.
데이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한순간이라도 사랑한 적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
자신만이 아직 과거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흐름이 없이 멈춰진 물결 위에 자신을 띄워 마지막을 준비했던 것이 아닐까.
윌슨이 자신을 겨눌 때, 어쩌면, 데이지를 대신하여 죽는 자신의 삶의 끝이 데이지를 향한 사랑의 완성이었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하지 않았을까.
데이지가 운전하는 차에 치여 죽은 머틀의 끔찍한 장면을 읽으며,
내 뇌리에 더 끔찍하게 박힌 장면은 데이지의 저택 앞 수풀에 숨어서 데이지를 감시하고 있는 개츠비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인공인 닉은 지독한 두통을 느끼며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데이지를 걱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생각도 없는 사람 같았다고.
주인공인 닉에게 사실 자신이 아닌 데이지가 그 차를 운전했고, 치인 사람은 죽었을게 당연하다며 태연하게 말하는 개츠비는 넋이 나간 채 데이지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방금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데이지가 톰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될지만 걱정하며,
그녀가 뛰쳐나온다면 언제든 받아 줄 생각으로 그렇게 그녀가 잠들기 전 방에 불이 꺼지는 순간까지 그저 그녀의 집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을 개츠비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너무 대단해 보여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무력함에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겠지.
저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데이지에게 충분히 있는 것일까.
그녀의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불법적인 사업을 벌여 재산을 늘린 개츠비, 불륜을 저지르는 데이지와 톰 부캐넌 부부의 모습을 보며,
이 소설 속 수많은 부도덕적이고 불법적인 불협화음 속에도 그의 사랑에 대한 마음에 경의를 표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조차 죄가 될까 괜히 두려워진다.
그러나 데이지를 향한 절대적이고, 끊임없이 현재를 거스르는 개츠비는 위대하다는 그 수식이 적절하다.
평생에 저런 개츠비적인 사랑을 한 번이라도 받아 본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평생에 저런 개츠비적인 사랑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또 얼마나 행복할까.
해류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끊임없이 배를 띄우는 우리의 삶도 역시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