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녁식사 자리가 꿈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꿈이었네.
이제는 익숙한 장소. 고층 주상복합아파트 건물로 들어왔어.
몇 층인지는 모르지만 긴 복도에서 서너 집을 지나면 맨 끝쪽에 있는 집이 우리 집이야.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간이지만, 꿈속에선 이곳이 우리 집이더라. 매번 말이야.
바로 이 꿈속세계 우리 집에 네가 찾아왔지 뭐야.
해 질 녘 풍경이 예쁜 거실 통창을 바라보며 나와 남편은 열심히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어.
손님 대접인데 왜 흰쌀밥에 미역국을 차리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야. 우리의, 그리고 네 생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아이방인 작은방에는 너와 어떤 여자가 함께 잠든 우리 아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지.
착한 인상의 그 여자는 아마도 네 와이프겠지.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너희 부부는 아이방에서 나와 이제 가야 한다며 현관으로 나섰어.
저녁 먹고 가라는 말도 못 한 채, 난 엘리베이터까지만 바래다주겠다며 널 따라나섰지.
긴 복도를 지나 같은 층 이웃들이 바글바글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있더라.
여기가 좀 그래. 복잡하지? 등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어.
엘리베이터는 짝수층, 홀수층, 전층 세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가득 타는 바람에 두대를 보내고 세 번째 엘리베이터를 탔어.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나도 함께 탔지.
엘리베이터는 한 면이 투명한 창으로 되어있어서, 점점 어스름해지는 도시 풍경이 점점 하강하는 것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어.
1층으로 내려온 우리는 쇼핑몰같이 넓은 로비를 지나 상가가 있는 지하로 한 계단을 더 걸어서 내려왔어.
사람들이 모여있어 보니 때마침 무슨 공연을 하고 있지 뭐야. 셋이서 멍하니 그 공연을 조금 보고 있자니, 남편이 우리를 찾아 내려왔어. 그러곤 다 같이 바깥에서 저녁을 먹자는 거야.
건물 밖으로 나온 우리가 마주한 거리는 명동 골목을 연상하듯 좁고 매대가 많은 복잡한 곳이었어.
두 명 정도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라 남편은 앞장섰고, 우리 둘은 그 뒤를 따라 나란히 걸었지.
수많은 인파에 가만히 넌 내 손을 잡아끌었지. 간간히 남편이 우리의 모습을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어. 너와 나는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손을 잡고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난 너에게 전에 하던 일은 계속하는지, 최근에 낳은 둘째는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하여 물었지.
꿈속임에도 우린 실제 상황의 테두리 안에서만 행동한 거야. 허용 가능한 수준의 대화랄까.
그 형식적 상황 속에서 꿈임에도 눈치를 보면서 손이라도 잡아주어서 고맙고 목이 메어온다.
식당에 도착한 후 남편과 마주 앉고 우린 나란히 앉아 자리를 잡았지.
화기애애하게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어. 꿈에서 본 웃으며 이야기하던 네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 지금까지 꿈에서 모습조차,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어.
그 저녁식사 자리가 꿈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꿈이었네.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거리를 나왔어. 다시 언제 또 한국에 올지 모르겠다며 연신 멋쩍게 인사하던 넌 와이프와 함께 그렇게 떠났지.
그리고 돌아서 집으로 향하던 중 내 주머니 속에 무언가 잡히는 걸 느꼈어. 아까 갔던 음식점의 냅킨이 들어있었어. 네모난 냅킨 가운데즈음 대여섯 줄 빼곡히 글자가 적혀있더라.
그걸 못 읽고 깼네... 그 글씨들의 형상이 아직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읽어낼 수 없다니.
어쩌면 그 편지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나에게 비밀스럽게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 마음만은 확실히 전달받았다고 생각해.
비록 읽지 못했어도 말이야.
잠에서 깨어나, 눈을 감은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어.
아직 꿈속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도 했지만, 너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내 머리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말이야. 그러나 몇 가지 장면들 빼고는 안개처럼 또 흐릿해져 버렸네.
난 왜 꿈에서까지 이렇게나 절제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건지 나 자신한테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난다.
하긴 네가 옆에 있었던 그때조차 난 그랬었지. 과거의 내 모습과 다름이 없네.
한 번도 마음껏 너를 좋아해 보지 못했던 것 같아서 꿈에서조차 용기를 내지 못하나 보네.
나에게 주었던 그 마음은 이미 십여 년 전 다 날아가버렸겠지만, 그 여운은 백 년이 지나도 내 무의식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거야.
오랜만에 이렇게 또렷이 네 얼굴을 보여주어서,
그 목소리를 들려주어서,
그 손의 촉감을 기억하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잊히지 않도록 이렇게 꿈속세계에서라도 가끔은 우리
밥 한번 먹지 않을래?
2025. 7. 9. 수. 꿈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