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오스틴의 <설득> 사랑의 기억을 지켜가는 시간

제인오스틴의 마지막 장편소설 “설득”을 읽고

by 윤지아


사실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은 직후 접한 책이어서 그런지, 느린 전개와 절제된 표현에 답답함이 컸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아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설레했던 그 느낌으로,

잠시 스치거나 조금은 바뀐 목소리 톤을 낸 것으로도 온갖 추측을 해대던 그 시절의 그 소소한 감정선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전개라고나 할까.


나는 읽는 내내 ‘그래서 둘이 대체 언제 진지하게 얘기해 볼 건데!!‘ 라며, 쥐어짰다.(급한 성격)

그러나 그 절제된 행동 속 주인공들의 깊은 사랑은 더욱 빛났던 것 같다.



앤은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하여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는 레이디 러셀을 정신적 지주로 여긴다.

뭐든 그녀와 상의하고, 그녀의 의견이 최선의 선택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앤은 그런 존재가 반대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인생에 두 번은 더 없을 사랑이란 걸 알면서도.

레이디러셀의 주장은 매우 타당했고, 앤은 결국 설득당했다.

엔트워스는 당시 조건적으로는 볼품없었고, 앤 앨리엇은 준남작 지위를 가진 집안의 딸이었다.

앤은 결국 가슴보다는 머리가 지배하는 그 설득에 굴복했고 받아들였다.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그녀에 대한 존중과 그녀의 뜻을 저버리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집안의 영광은 사라져 가고, 가문의 저택을 결국 세를 주게 되면서 앤 앨리엇과 웬트워스 대령은 8년 후 다시 재회한다.

그때와는 정 반대의 상황이다.

웬트워스 대령은 더 이상 볼품없는 8년 전 그 청년이 아닌 인정받는 해군이 되어 많은 재산을 모은 채 돌아왔다.


그와 그녀는 작은 친목모임이나 파티 속에서 서로를 맴돌며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한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일부러 다가가지 않고 맴돌며 앤은 그와 같은 프레임 안에 있다는 사실에 크게 동요한다.

그가 다른 사람과 나눈 들릴 듯 말듯한 대화를 듣고 크게 실망하거나, 또는 희망에 젖어 기뻐하 거나하며 말이다.


겨우 서로 형식적 인사정도를 주고받을 정도로는 지내게 되었지만, 주로 상대의 마음을 추측할 뿐, 아무도 8년 전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웬트워스 대령은 앤이 자신과의 약혼을 저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설득당했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앤은 여전히 그의 말투, 눈짓 하나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한결같이 사랑한다.

다른 좋은 혼처도 마다하고, 그와 보냈던 시간들, 그와 나눈 대화, 감정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오롯이 그만 사랑해 왔다.

결국 웬트워스 대령도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도 그녀 이외에 다른 여자를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다는 것을 시인하며 둘은 다시 마음을 확인한다.

무려 책의 93% 지점인 마지막 30페이지를 남겨두고 말이다.



이 책을 끈기 있게 읽으며, 둘의 마음이 닿는 부분을 끝내 마주하고 나니 깨달았다.

둘의 재회 이후 펼쳐진 그 긴 시간 속에서도 둘은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이다.

사랑의 시간은 둘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가 아니라, 이렇게나 긴 혼자만의 착각과, 위로와, 설득의 시간들이 주가 되어 이루어져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시간들은 결코 답답하거나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으로 둘의 사랑은 더욱 성숙해졌고, 더욱 단단해졌다.


앤은 레이디러셀에게 설득 당해 그와 헤어졌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 떨어져 있던 그 8년의 세월이 그녀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더 깊게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랑의 기억은 결코 흐려지거나 변질되지 않고 외려 선명하고 강렬해진 듯했다.

그래서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오히려 그녀는 그와 마주치기를 원치 않았다. 아마 영원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앤은 그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품고 살았을 것이다.


제인오스틴의 작품들은 결국 주인공들이 끝내 이루어지니 마음 놓고 읽었던 편이다.

그러나 이 작품처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 사랑의 이루어짐을 기다리며 읽었던 건 처음인 것 같다.


앤은 곰곰이 따져본 끝에 감정을 잘 간직하는 사람에게는 8년의 세월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해군의 아내가 된 앤은 결국 “세금을 지불하듯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 라며, 앞으로의 기다림의 시간들도 예고한 것이다.


결국 <설득>은 긴 기다림과 헤어져있는 시간 속에서조차 사랑은 진행되고 있음을 한결같이 강조한다.


나는 앤이 말하는 ”감정을 잘 간직하는 사람“ 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안에 멈춰진 그 시간 속에서 사랑했던 감정을 잘 간직해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