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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 애 Feb 02. 2023

신혼여행 첫날밤부터 거리에서 노숙?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희망을 보다

 아름다운 패딩턴 역에서 가랑비도 아니고 정말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보며 우리는 잠시 멈춰있었다. 해는 이미 서서히 지고 있었고 비가 오는 탓에 밖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몸집 만한 큰 캐리어가 하나. 작은 캐리어가 하나. 보스턴 백이 하나. 순간 차오르는 막막함에 몸이 굳어버린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말없이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스름한 어둠과 내리는 비가 마치 열리지 않는 문처럼 느껴졌다.

 다행히도 런던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예상하여 챙긴 우비가 있어 그것부터 꺼내어 챙겨 입었다. 우비와 함께 몸과 마음을 무장하고. 숨을 한번 고르고. 열리지 않는 문을 열며 내리는 빗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신랑은 뒤에서 두 개의 캐리어와 보스턴 백을 매고 나를 따라왔고 나는 휴대폰을 보며 앞서 걸었다. 휴대폰 화면에 자꾸 빗방울이 떨어져 화면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겐 바다의 등대와 같아서 그 작은 빛을 포기할 수 없었다. 손으로 닦고 닦으며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 주소로 향했다. 사실 여전히 호스트와 연락은 닿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속 깊이 불안감이 찰랑거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도착하면 해결될 거야. 도착하면 있겠지. 숙소에 가면 호스트가 있을 거야.'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간판에서는 영어가 사라지고 아랍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백인은 거의 보이지 않고 중동 사람들만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런던에서 주로 중동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영어보다 더 낯선 언어로 가득 찬 거리. 딱 봐도 여행객 같은 우리 두 사람에게 꽂히는 눈길들. 이제는 완전히 밤이 내려앉았고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도착을 했다.


'띵동'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다시 누르고,

누르고,

누르고,

누르고.



에어비앤비에 등록된 번호로 전화 걸기를 열일곱 번. 깨어져 어차피 읽을 수 없는 문자를 다시 보기를 수십 번.

정말 우리가 잡을 수 있던 희망은 그것이 유일했으니까. '이번에는 받겠지.' 내리는 비가 우비를 때리는 소리. 수화기 너머의 신호음. 내 눈앞에 커다란 캐리어와 짐을 메고 비를 맞고 있는 내 가장 소중한 사람. 


 "그만하자, 지애야."


 신랑의 한마디에 그제야 나는 우리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비를 맞으며 대략 30분가량을 매달렸던 것 같다. 그만큼 간절했고 막막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는 신혼여행 첫날,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 들어갈 수 없음을. 


"오는 길에 호텔이 있는 것 같았어. 그리로 가보자."


 사실을 둘 다 은연중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탓에 둘 다 오는 길에 있던 자그마한 호텔을 유심히 봤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다행히 방은 있었다. 다만 작고, 지하였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자 캐리어를 펴니 발을 디딜 공간이 없을 만큼 딱 침대 하나만 놓여있던 작은 방이었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달리 앉을 곳이 없어 침대에 앉았다. 그제야 빗소리가 귀에서 멈췄다. 패딩턴 역을 나오면서부터 귓가에 내내 울리던 우비를 때리는 빗소리. 그리고 그만큼이나 요동치며 시끄럽던 머릿속이 그 작은 방 침대에 앉자 일단은 고요해졌다. 시간은 이미 저녁 시간을 한참 지나 있었고 신혼여행 첫날 근사한 저녁을 먹으리라 계획했던 우리는 비상용으로 챙겨 온 레토르트 제품을 꺼내어 먹었다. 힘을 내서 나가기에는 우리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서 내 두려움은 커져갔다.


'언제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할까?'


 내가 그렇게 숙소에 들어가고자 매달린 것에는 두려움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일이 틀어지면 매우 화를 내는 분이셨다. 그럴 때면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 그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너 때문에 -' 그 일의 원인이 나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조차 어떻게든 그 원인은 내게로 이어졌다. '너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 게다가 오늘 일은 '나 때문'이 맞았다. 내가 예약한 숙소였고, 내가 계획한 여행이었으니까. 나의 아버지였다면 이미 그 숙소에 도착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화를 내고 계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조용한 곳에 가서 혼내려나보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한 곳에 도착했고, 나는 혼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혼을 내지 않았다.


"나한테 화 안내?"


"왜 화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은 화가 나서가 아니라 애쓰고 있는 내가 안타까워서였고 조용한 곳에 온 이 순간에도 그는 내게 화낼 생각이 없었다.


'왜 화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가 아무렇지 않게 뱉은 이 한마디가 나의 얼마나 많은 순간을 위로해 주었는지 그는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 말을 한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순간들이 지나갔다. 모두 내 탓이라 여기며 분노와 비난을 당연하게 감내하던 나의 모습들이. 아 - 나는 정말로 결혼을 잘했구나. 우습게도 나는 이 모든 상황에 감사했다. 이렇게 일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난 저 한마디를 들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저 짧은 한마디로 오늘의 모든 고난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 오히려 값진 일이 되었다. 신혼여행 첫날밤. 뜻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순간에 나는 내 결혼 생활의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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